공동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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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5:1 - 29
모세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았습니다. 이후로 성경은 회중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한 사람, 개인의 이름도 많이 등장하지만 공동체적 성격을 띄는 회중이라는 표현은 더 자주 사용되지요. 어째서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경이 개인 그리고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그리고 은혜는 개인에게 주어진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쉬웠다면, 모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씩만 불러서 주님의 명령을 전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은 이것과 참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매우 관심히 많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은 매우 드물죠. 개인의 구원, 개인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집중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은혜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공동체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보았던 성막의 건축 이야기는 공동체는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로서 협력이 무엇인지, 헌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막 건축 계획의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일까요? 모세의 순종? 그의 놀라운 리더십?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성막을 진심으로 짓기 원하는 사람들만 모았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딥니까? 광야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그들이 의지할 것은 그들 서로일 뿐입니다. 매우 친밀하고, 서로 아주 깊은 것까지 알고 있는 막역한 사이였겠죠. 이런 관계에서 가장 힘있고 능력있는 인물이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강제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정 금액을 세금 걷듯이 수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치고 싶은 자들만 예물을 가지고 오게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을 짓는 일에 무언가를 헌신하기를 꺼리는 이들이나,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참여를 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막을 짓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원하는 자들도 있었겠지만, 광야에서 함께 생활하던 많은 사람들은 이 일에 심지어 무관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 없이 드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었습니다. 모세는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막의 건축은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기술들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막을 짓는 일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 중에 그러한 노동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막 자재의 목록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금, 은, 동처럼 홍색 실이나 청색 실처럼 귀한 예물도 있지만, 염소 털, 양 가죽, 아카시아 나무나 등잔용 기름 등 아주 흔한 물건들도 있었죠. 이것은 성막을 짓는 일에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후 성막이 완공되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막을 짓는 일에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참 놀라운 일입니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성막을 지은 이들은 특별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부족한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동일한 그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죠? 성막을 짓지 않았던 이들은 어쩌면 죄송스럽고,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이 어떠한지 여부와 상관 없이, 하나님은 임재하셨습니다.
이들이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공동체 덕분입니다. 성막을 짓는 데에 헌신했던 공동체 말입니다. 성막을 짓지 않은 이들보다, 지은 이들이 더 부유하고 뛰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가난하고, 연약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찌 되었든 광야의 백성들 중 일부가 성막을 지었고, 그 덕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저 광야의 이스라엘의 회중에 속한 이유만으로, 그곳에 함께 공동체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단 한 명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때로는 공동체 전체의 복이 되기도 합니다. 공동체 내의 소수가 받은 복이 전체의 복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그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이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것만으로도, 교회에 부어지는 복이 여러분의 복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은혜는 동시에 두려운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 속한 단 한 명의 죄가, 공동체 전체의 죄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그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은 동시에, 우리의 죄가 공동체에 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짓고,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출애굽기 32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언약을 맺는 40일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세우려고 합니다. 모세는 이 장면을 목격하고 언약궤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공동체가 함께 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금송아지 상을 세운 일은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무려 40일이나 사라진 모세, 그의 부재, 백성들은 불안했습니다. 모세는 죽었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광야 앞에 버려진 등불과 같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믿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더 쉬운 길을 택합니다. 바로 금 송아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백성을 멸하고, 모세와 새롭게 위대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어진 그 놀라운 약속을 계승할 수 있는 단 한 명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의 저주를 받은 것과 대조되는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도리어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주려고 하셨던 복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모세 단 한 명이 누릴 복은, 60만명이 넘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로 확장됩니다.
모세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교단의 차이, 신학적 차이로 범위가 넓어지면 매우 공격적이게 변하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를 다녔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일조차도 꺼린다고 합니다. 자신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며,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까지도 있지요. 이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 번 생각할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세와 같은 제안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사회를 바라보면, 서로를 향한 증와와 분노가 가득차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양보나, 배려의 마음보다는 내가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들 중 한 명이라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모세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 세상은 분명 변할텐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금송아지 우상, 그리고 성막, 두 가지 모두 한 공동체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얼마나 다릅니까? 결과가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금송아지 우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세운 것이었습니다. 40일 동안 돌아오지 않는 자신들의 지도자가 당연히 죽었을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만족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금 송아지를 세울 때에는 단 한 명의 백성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무엇입니까? 모세가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고, 공동체원들이 공동체를 위해 지은 것입니다. 성막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헌신하는 일부만이 참여하여 세워졌습니다. 금송아지상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뻔 했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모두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가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공동체는 인간의 죄성을 거스르기 위해 고안된 장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고안하신 장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공동체는 어떠한 모양, 형태를 가지고 있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협력은, 아주 놀라운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한 목적을 위해 일할 때, 세상이 놀랄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본질인 죄성을 거스르기 위해 공동체로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 공동체를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