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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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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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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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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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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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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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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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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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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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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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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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본문 : 대상 10:13-14
하나님, 버러지와 같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떤 사랑을 베풀어주셨는지를 이 시간 기억합니다.
본질 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었는지를 또한 기억합니다.
그 사랑과 인애와 희생과 자비를 기억하며, 늘 하나님 앞에 겸손케 하시고, 그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서론]
이스라엘의 초기 왕정시대에서 ‘블레셋' 국가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향한 굳건한 믿음 가운데 서 있을 때에는 블레셋은 늘 이스라엘에게 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신앙에서 미끌어지고 부패하기 시작할 때에는 언제나 블레셋은 가시가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블레셋은 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와도 같았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블레셋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사울을 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한 때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던 막강한 권력자였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존재였다.
그랬던 그와 그의 가문을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치시는 것인가? 그리고 이 본문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 것인가?
[배경설명]
대상10:1 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블레셋을 들어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치신다.
전쟁은 완전히 패하여 이스라엘의 병력 대부분이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했고, 이 전쟁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도 전사한다.
자기 아들들이 전쟁 중에 엎드러지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울 역시도 자기 자신을 맹렬하게 추격하던 궁수에게 중상을 입게 된다.
더이상 도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가 내렸던 결정은 무엇인가?
저 원수 블레셋에 사로잡히게 되면 죽어서도 수치를 당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사울은 자기의 무기든 자에게 칼로 자기를 죽여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종도 두려워하여 주저하자, 결국 사울은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그 다음날 블레셋 사람들이 전리품들을 챙기다가 사울과 그 아들들이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옷을 벗기고 그의 자른 머리와 갑옷을 블레셋 땅 사방에 보내어 모든 이방신전과 그 백성들에게 소식을 전한 후 그 갑옷은 그들의 신전에, 그의 머리는 다곤의 신전에 매달아버린다.
10절 말씀을 보라.
이 부분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삼상31 장에는 없는 특별한 내용이다.
먼저 ‘다곤의 신전’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는가?
삼상 5-7 장을 보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서 그 언약궤를 빼앗아 다곤 신전에 던져두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다음날 사람들이 다곤 신전 안에 들어가보니 다곤의 신상의 얼굴이 땅에 닿을 정도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향하여 엎드려져 있는게 아닌가.
다시 일으켜 세워놨더니 그 다음날에도 다곤 신상이 엎드려졌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상징하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둥이만 남아있는게 아닌가.
이처럼 ‘다곤의 신전’ 은, 하나님께서 다곤에게서 영광을 받으신 곳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다곤을 이기신 곳이었다.
그리고 사울 왕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 거룩한 직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울의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사울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사울 가문에서 영원히 떠나셨음을 보여준다.
이가봇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떠나셨다.
[사울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이유]
13절 말씀을 보라.
사울이 이토록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을 원어로 보면 그가 왜 이토록 비참한 죽임을 당했는지 그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데, ‘그가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그 죄로 인하여 죽었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사울이 하나님을 거슬러 어떠한 죄를 지었길래 그 죄로 인해 죽은 것인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의 고유성을 어겨버렸고,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 말씀하셨음에도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가축들은 따로 챙겨두고 부실하고 쓸모 없는 것들만 진멸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죽은 이후 더이상 의존할 사람이 없어지자 그는 무당을 찾아가 귀신의 영에 조언을 구하였다.
차라리 그때라도 전심으로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자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면 좋았으려니와 그는 14절 말씀처럼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사울의 죄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사울이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그 죄로 인해 비참한 죽임을 맞았다는 것은 모든 죄인들의 결과가 이러하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다면 사울과 같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죄의 결과가 이처럼 참담하다.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희생제사를 생각해보라.
그 번제단 위에서 참혹하게 쪼개진 짐승은 곧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당한 것임을 기억한다면, 죄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하여 얼마나 진노하시는지를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사울과 다르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명하시기를,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과연 우리는 이와 같은 열심과 열정으로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다른 어떤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하나님께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며 살아가는가?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수준의 사랑으로, “이와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명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과 정성을 다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고,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은지, 그들이 괴로움 중에 있지는 않은지, 그들이 낙심하며 넘어져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정말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어기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죄”라고 정의한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 10,000가지 중에서 9,999개를 지켰어도 1을 순종하지 못했다면 그 하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도 사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도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철저한 죄인으로서, 사울을 비롯하여 수많은 희생제물들이 당했던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존재이다.
[구원의 열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시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이시기까지 우리를 견고하게 붙들고 가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받아들여졌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 믿음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정말 참된 믿음이 맞는가? 아무 증거도, 효과도 없는 맹신이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살아있는 식물은 반드시 성장이 있다.
줄기가 뻗어가고 뿌리가 내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반면 죽은 나무토막은 생명이 없다.
조화를 생각해보라.
살아있는 것 같다.
꽃의 색도 아주 화려하다.
그러나 이는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향기도 없다.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열매를 맺지 않는다.
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열매를 통해 알리라" 구원받은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결과로서 열매를 맺는다.
구원의 열매가 무엇인가?
바로 선행, 선한 행위이다.
[선행]
우리는 선한 행위를 가리켜서 구제를 한다거나, 불우이웃을 돕는다거나, 남몰래 어떤 선을 베푼다거나 이런 행위들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것도 큰 범주 안에서 선행에 포함은 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행은 믿음에 기초한다.
나의 윤리적인 가치관이나 도덕적인 양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위가 바로 선행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독생하신 아들의 피값으로 값주고 사셨는데 어찌 다시 죄 가운데 내 몸을 더럽힐 수 있는가 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애통해 하고 회개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의 거룩하신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어찌 내가 죄를 사랑할 수 있는가 하여 죄를 더욱 미워하는 것, 사랑하면 닮아간다는데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 더욱 그분의 성품인 거룩과 성결함으로 점점 더 나아가는 것,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을 믿고 참으며 인내하는 것 등,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그 구원의 결과로서, 그 구원의 열매로서 선행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물론 즉각적으로 이런 열매가 맺히는 사람들도 있고 아주 느리게 맺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속도는 제각각 다를지라도 분명한 것은 ‘성령 안에서 살아난 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결론]
여러분, 이 사실을 두렵고 떨림으로 들으시길 바란다.
사울에게는 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돌이킴이 일어나지 않았다.
거룩을 향한 열망도 없고, 죄에 대한 애통해함도 없었으며, 당연히 회개도 없었다.
이는 곧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분명 이스라엘이라는 언약백성 가운데 속해 있었고, 특히 그 중에 왕이라는 직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죽은 자였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고, 늘 예배의 자리에 참석할지라도, 늘 뜨겁게 찬송을 부르는 것 같고, 또 열심히 ‘주여' 외치며 기도하는 것처럼 보여도, 직분을 받고 주의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아도,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여전히 죽은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주의할 것은 이 말씀을 가지고 저 사람은 알곡인가, 저 사람은 가라지인가, 저 사람에게는 구원의 열매가 보이는가, 저 사람에게는 선행의 결실들이 나타나는가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매우 교만한 일이다.
왜? 판단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데에 사용할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라.
여러분 자신을 한번 냉철하게 점검해 보라.
여러분의 삶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구원의 결과로서의 선행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함께 기도하자.
주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라면, 반드시 거듭남의 열매들이 일어나야 한다.
내 안에 그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는 분들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 농부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길 기도하자.
또 아직 열매가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주님 나에게도 거듭남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나에게도 살아있는 증거들이 보여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나에게도 구원받은 증거들이 보여지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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