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덴티티

요한일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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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티티.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이 많이 겪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생각해 보아도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 생각하고 골치 아픈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추상적인 질문은 저 옆으로 치워놓고 앞에 놓인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 살면서 큰소리 치고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고 혼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사람은 이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힘있고 생동감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덴티티라는 이 정체성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착각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누가 정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해 주셔야 합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정체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 아버지의 혈통을 타고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거듭났다, 중생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거듭남에 대해 말하면 떠오르는 말씀이 요한복음 3장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세상에서 어느 가문에서 태어났는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 몸이 건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 영혼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났다’는 말에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할 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것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우리를 말할 때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인 예수님을 말할 때 같은 단어가 사용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용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니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우리에게 똑같이 사용한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이요 창조하신 땅에 날아다니던 먼지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평등하고 동등하게 대해 주시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니 예수님과 우리가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한 가족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한 집안의 식구가 되면 달라지는게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연인이 결혼해서 식구가 되면 이전에는 나와 전혀 상관 없던 사람들이 내 식구가 됩니다. 이전에는 길가다 마주쳐도 몰랐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식구끼리는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마음을 쓰게 되고, 가문의 분위기에 맞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심지어 그 가문의 직업을 자손들이 이어받아 그 명맥을 잇기도 합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식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전에는 잘 되지 않던 것들이 잘 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가문의 자녀가 되어서 이전과 달리 잘 할 수 있게 된 세가지를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인 우리가 잘하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를 낳으신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낳으신 이”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아버지가 낳은 다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집안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으면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또 나와 함께 형제가 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 말에 콧방귀를 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악해서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남은 사랑하면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친구와는 통하는게 많지만, 부모님과는 꽉 막혀 지내고, 형제와 단절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비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있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부모님을 사랑하고, 가족 구성원들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 법칙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일하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네가 정말 나의 자녀라면 네 아버지인 나를 사랑하지 않겠니? 네가 정말 내 아들 딸이면 내가 낳은 다른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겠니? 네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지 않을까? 세상에서도 자기 집안 사람은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집안에서 그러지 않을 수 있겠니?’
형제는 아버지 어머니가 낳아서 된 것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선택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형제가 선하고 악하고를 떠나서,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났다’고 말할 때 믿음만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어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 내가 말만 하나님의 자녀인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 나에게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여서 아버지와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형제를 더 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잘 할 수 있게 된 우리의 다른 모습은 무엇입니까?

둘째, 자기를 낳으신 아버지께 순종하게 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 즉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같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사랑만이 순종할 수 있게 하고,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인 것과 같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사랑하는 것이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저라고 해서 쉬운 것이 아니고, 목사님이라 하더라도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매번 말씀을 선포하고 내려가서 하는 첫번째 기도가 ‘선포한 말씀대로 내가 먼저 살아가고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니 말씀 봉사자에게도 순종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재미있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3절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거운 것이 아니다는 말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피곤한 것이 아니다,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원어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절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도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식은 죽 먹기 처럼 마음만 먹으면 다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해보셔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경도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오늘 말씀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일본에 아주 유명한 우동집이 있는데 이 우동집의 사장이 원래 동경대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교수였다고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우동집을 창업하여 경영했고, 그의 아버지가 대를 이어 우동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아, 이제는 교수직을 그만 두고 가업을 이어서 네가 우동집을 운영하도록 해라” 그러자 동경대학교 교수였던 아들이 그날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우동집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3대 사장에 이르러서 우동집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한 식당이 되어 아버지의 말에도 순종하고,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유명한 사업가로 일본에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저에게 이 우동집을 공짜로 주면서 운영하라고 했으면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자라면서 집안에 가게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음식을 파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 교수님이 자신의 교수직을 그만 두고 우동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집안이 우동집을 하는 집안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에게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세상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하면 어렵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음욕을 품는 것까지 간음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부담을 넘어 무겁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실 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의 명령이 조금 힘들다 할지라도 남의 자식들처럼 무겁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계명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에게 절대 주고 싶지 않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뜻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희생을 요구할 때는 곧 죽어도 싫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말하지 않더라도 희생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를 마음에 모시고 산다고 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말씀이 부담스럽고 무겁다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와 형제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또하나 더 잘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셋째,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인간 사회와 인간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철저하게 악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선한 일이라고 말하는 봉사, 구제, 희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상관 없이 하는 것은 철저하게 악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대의 모든 정신과 가치는 악한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세상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유혹할 때 우리 마음에 있는 본성을 자극합니다. 마음에 어떤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내 정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물고기에게 낚시꾼이 보이지 않지만 그 낚시꾼은 있는 것처럼, 사탄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혹합니다.
사탄이 끈질기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미혹하고, 괴롭히는 목적은 하나님의 가문을 파괴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안을 망치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알게 된 사탄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고 어떻게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에서 빼내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를 어떻게든 방해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세상을 보게 하려고 하고, 아버지의 자녀답지 않은 타락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해치려고 매일 같이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매일같이 이상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휘황찬란한 것을 가지고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목숨걸고 싸우지 않겠습니까? 사탄이 우리에게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을 망치겠다고 대놓고 찾아오는데 어떻게 가만히 둘 수 있습니까. 두 팔 걷고 싸워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우리가 두 팔 걷고 세상과 싸워야 하는데 우리는 반드시 세상과 싸워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기게 합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과 싸워 이기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까?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길 같이 보이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리 같은 것이 있어도 진리가 아님을 압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진리도 길도 생명도 없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니 마귀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해도 거기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길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귀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 안에 정욕이 일어나면 내가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 해서 어떻게든 마귀를 꺾어 놓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백전백패합니다. ‘내가 그래도 목사인데, 내가 장로인데, 권사인데, 믿음 생활을 내가 몇 년을 했는데 이런 유혹하나 못 이기겠어?’ 하면서 싸우면 무조건 패배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귀가 공격하고 시험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귀가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가지고 와서 내 앞에 쏟아놓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서 세상을 능히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가면 뉴 샴푸톤이라는 동네가 있다고 합니다. 인구가 35,000명 정도인 작은 도시인데 이곳에는 특산물이나 좋은 관광 코스가 없는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작은 오두막 집 하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오두막 집 앞에 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집은 비록 조그만 하지만 이 집은 미국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낸 위대한 집입니다” 미국의 작은 도시에 있는 작은 오두막 집이 어떻게 미국 역사를 새롭게 한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간판의 문구 아래에 그 집에서 나온 인물들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그 오두막 집을 짓고 남편 조나단과 아내 사라가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가문의 사람으로 초라한 삶을 살았던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12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 후 4대, 5대를 거쳐 가며 후손이 늘어갔는데 그 중에 부통령이 한 명, 13명의 대학 총장, 3명의 주시자, 3명의 시장, 149명의 변호사, 48명의 판검사, 116명의 목사, 75명의 사업가, 25명의 발명가, 66명의 교수, 82명의 차관급 공무원, 68명의 의사가 배출되었습니다.
이 작은 오두막 집에서 정말로 미국의 역사를 바꿀 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자 유명한 학자들이 그 가문을 연구해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결론은 조나단과 사라가 12명의 자녀에게 다른 것은 물려 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을 잘 물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그 믿음을 자손에게 잘 물려주는 것을 통해 복이 무엇인지 알게 했고, 그것이 그 작은 오두막 집에서 시작한 가문을 명문가로 만들었다고 논문의 결과를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나단과 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가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정이라고 세우고, 그 정체성을 자녀들에게 잘 물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던 집안이 미국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할만큼 위대한 집안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올바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의 모습을 돌아보니 부끄러운 모습이 많았습니다. ‘저 집은 가정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애가 저래’라는 말을 들을 법한 모습이 많은 것이 저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 저의 모습은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 욕을 합니다. 교회 욕이라고 하기 보다는 교회 다니는 사람 욕을 많이 합니다. 불법 주차를 해두고 예배 중이라는 글자를 번호판 위에 대놓고 길을 막아버린 차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사랑은 없고 이기적인 사람들만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다 잊어버리고, 말 그대로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왜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모른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순종하며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정체성을 잊고 살아가니 내 마음 가는대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아버지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형제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놓치지 않고 풍성히 누려서 아버지의 자녀로 이 세상을 이기며 세상 속에서 담대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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