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제물과 형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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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

218장 /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기도

성경봉독

1 Corinthians 8 NKRV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서론

오늘 살펴볼 8장의 주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것이다.
성도님들과 신앙 상담을 하다보면
‘제사 음식’으로 인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분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고,
그 분들은 여전히 집안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로 고민을 하는 것이다.
제사하는 그 자리에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등으로 고민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갈등을 빗기도 한다.
특히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초신자들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신앙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2천년 전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들은 자연환경과 우리 인간 사회의 여러 영역을 주관하는 다양한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이 신들을 위한 수많은 신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제우스는 하늘과 천둥의 신이다.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의 신이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다.
아르테미스는 달의 신이자 풍요와 생식의 신이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이다.
헤르메스는 목동과 나그네의 신이다.
이렇듯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이러한 신들을 잘 섬겨야 해를 입지 않고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도시나 마을마다 각자의 수호신을 정해 그 신을 더 특별히 섬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즉 아르테미스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섬겼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도시와 마을 곳곳마다 다양한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는 이 신들의 모습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우상들이 있었고,
그 우상들 앞에서 사람들은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리고 그 음식을 먹었다.
또한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 중에는
이렇게 제사에 쓰였던 제물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리스의 한 도시였던 고린도도 이러한 종교적 문화적 배경 가운데 있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살다가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일찍부터 유대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성경에 익숙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문제가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 논란이 된 것이다.
한 쪽에서는 먹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먹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일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 해결을 요청했고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이에 대한 올바른 신앙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상의 제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배우는 복된 시간 되기를 소망한다.

본론

1-3절

1 Corinthians 8:1–3 NKRV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먼저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바울 자신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와 관련된 부분도 이미 그들에게 가르치고 알려주었다는 말이다.
지식 측면에서는 이 9장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이미 웬만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면 알고 있는 지식이며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러한 지식이 가지는 위험성을 먼저 경고한다.
무엇이라고 경고하고 있는가?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무슨 뜻인가?
내가 무엇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는 이들을 얕보고 무시하게 되기 싶다는 말이다.
그 지식이 자신의 의가 되고 자랑이 되고 자기를 높이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지식이 있는 자신이 그렇지 않는 자들보다 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식의 위험성'을 먼저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식을 갖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다.
지금 바울이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니'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되는대로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힘써 알아야 한다.
지식을 쌓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19절에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Ephesians 1:17–19 NKRV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에게 속한 지식이 풍성해지기를 소원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식의 위험성을 언급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과 성경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성경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빠진 채
그저 지식만 늘어간다면
결국 그 지식은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상처와 아픔을 주고 말 것이다.
지식과 함께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의 동기로 그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 지식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지식이 된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보듬어 주고 품어 주면서
그를 세워주고 격려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지식이 된다.
사랑 없이 지식만을 자랑하는 자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 우리의 사랑을 보시는 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식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먼저 언급한 후에
본격적으로 우상의 제물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4-6절 말씀이다.

4-6절

1 Corinthians 8:4–6 NKRV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선포한다.
아멘인가?
바울은 6절 말씀에서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우리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바울은 이어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하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도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인 것이다.
여기에 성령 하나님까지 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에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들을 위한 수많은 우상과 신전이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각자의 신을 이야기하지만
참된 신은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지식이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상이 말하는 그 신은 이 세상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상에게 바쳐졌기 때문이 그 제물이 어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물과 동일한 것이기에
거리낌없이 먹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7-8절 말씀을 읽어보자.

7-8절

1 Corinthians 8:7–8 NKRV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이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면 어떤 초신자들은 아직 이러한 지식을 배우지 못하고
과거 우상숭배했던 그 습관과 지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지식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따라
양심에 거리낌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기도 하고,
우상의 집 즉 신전에 드나들기도 했던 것이다.
이 지식을 통해 볼 때
우상의 제물은 일반 음식물과 다를 바 없고
신전 또한 일반 집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아직 제대로 갖지 못한 신앙의 초신자들 중에 어떤 이들이
지식 가진 자들의 이러한 행동의 겉모습만을 보고 흉내내고 따라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우상이 실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그들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었고,
더 나아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따라 한 것이다.
분명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상의 제물을 안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도 아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온전한 지식을 갖지 못한 이들이
무리하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된 이유 중에는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자랑하는 분위기가 고린도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없이 먹는 사람이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그들에게 있었고 그것으로 서로의 믿음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이끌려 온전한 지식 없는 이들도 겉모양만 따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생기게 된 이유는
바로 지식 가진 이들이 지식 없는 이들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지식 있는 자들을 향해 경고와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9-12절 말씀이다.

9-12절

1 Corinthians 8:9–12 NKRV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믿는 자에게 ‘자유'를 준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그리고 우리를 얽매고 있던 온갖 비진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하나님과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이들이
거리낌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신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 지식 안에서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이 가진 권리를 행사하고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형제 사랑이다.
형제 사랑의 관점에서
혹여라도 내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다운 것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양심의 거리낌을 갖고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는 죄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의 행동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고 그를 멸망케 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마지막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3절

1 Corinthians 8:13 NKRV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기는
일차적으로 제사에 바쳐진 제물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시장에서 파는 고기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에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상당수는 제사에 바쳐진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가 고기 먹는 것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형제 중 한 명이라도 실족하는 일이 생긴다면
평생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형제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결론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 온전한 지식을 깨닫고 자유함을 누리는 자들이 되길 축복한다.
하지만 또한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늘 기억하며
그들의 연약함을 판단하고 나의 지식을 자랑하기보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며 하나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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