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가야할 가장 긴 길(마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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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예전 대학 시절, 저와 굉장히 친했던 친구와 조금 껄끄러운 상황을 겪게 되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부담감과 그 친구에 대한 미움이 생기게 되면서 힘든 날을 보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속한 선교단체에서 가는 수련회를 참석하면서 마음 속에 그 친구를 용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운데 그 친구를 용서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학교 복도에서 그 친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복도 저 멀리 친구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 친구를 용서했기에 아무렇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복도를 따라 조금 걸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도를 지나가다 그 친구를 지나치면서 인사하지 않고 그 친구를 피해 다른 통로로 빠져 나가버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한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과연 내가 용서의 사람인가?"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도대체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용서를 한다고 결단하며 기도했지만 그 결단과는 달리 제 몸은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죠. 용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소설가 공지영씨의 체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공지영씨의 '나는 혼자였다'라는 산문집에서 두 번째 남편이 작고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를 모욕하고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저의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과거에 같은 이불을 쓰던 남편이 죽는다는데 용서는커녕 오히려 자기에게 주었던 상처와 모욕이 떠오르는 것이 당황스러웠다는 공지영씨의 솔직한 고백은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용서가 쉽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용서가 힘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니" 불교의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이 한번 오그라들면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옹졸해지는 것이 인간이기에 남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입니까? 그저 마음이 오그라들도 싶어서 오그라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죠. 상처를 받아 마음이 오그라듯 탓에 용서를 하려고 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죠.
공지영씨는 아마도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죽었다면 얼마든지 그 앞에서 용서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 크기에 죽음 앞에서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혀서 조금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까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거죠. 한 때 다정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이 상처를 주었기에 이제는 바늘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오그라든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부모를, 친구를, 같은 교회 성도를, 같은 직장 동료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렇게 상처를 받았을 때는 보통 보복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008년 막장 드라마로 뜨거웠던 "아내의 유혹"의 주제가 가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 해 내 모든 걸 다 주는데 왜 날 울리니 니가 네게 상처 준만큼 다시 돌려 줄꺼야 나쁜 여자라고 하지마 용서못해”
막장 드라마를 넘어서 엽기 드라마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신청률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수는 꿀보다 달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단기간으로 보면 용서보다는 복수가 쉽고 달콤하기에 때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각할 정도로 치열한 복수는 아닐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상처를 받았을 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차라리 복수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데에 쉬울 때가 종종 있어요.
부부끼리 작은 말다툼을 했을 때, 상대방이 말 안하면 나도 그냥 말 안하는 거에요. 모른 척하고. 그러면 큰 문제 안 생기면서 얼마든지 복수를 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고, 인지상정인 것이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용서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7번씩 70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요구하시는지 때론 잘 이해가 안가죠.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딜레마에 빠져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용서를 했다한들 그것이 기쁨이 되지 못하고 짐이요 율법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7번씩 70번씩이라고 용서하고 하시는 걸까요?

본론

어느 날 베드로는 용서에 관해 예수님께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21절에,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형제의 죄는 사소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바로 직전에 형제가 죄를 범하면 두세 명의 증인을 데리고 가라고 한 것을 보면 심각한 범죄인 것 같고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냐고 한 것을 보면 심각한 범죄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전제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은 이런 경우 3번 용서하고 했습니다. 3번 용서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랍비의 가르침을 넘어서 "7번까지 하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아마도 7번정도면 충분할 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산너머 산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씩이라도 할지니라
계산해보면 490번입니다. 이렇게 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죠. 아마도 창세기 4장 24절을 염두하시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 라멕이 두 아내에게 자랑을 하는 겁니다. 가인 건드리는 사람은 7배 벌을 받겠지만 나를 건드리면 벌이 77배야. 이것이 바로 세상의 정신이죠. 복수의 정신으로 가득찬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수의 정신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나를 따르는 자는 용서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7번씩 70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7번씩 70번은 다시 말해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7은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7번씩 70번은 절대 완전수죠. 주님은 우리에게 끝없이 복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용서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는 것을 이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왜 용서는 끊임없이 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용서는 한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리기 때문이에요.
(한 자매 이야기)
용서와 사랑을 평생 연구한 미국의 풀러신학교의 교수인 루이즈 스미즈는 이런 경험을 우리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저는 어느 날 제가 사는 마을의 경찰관이 아무 이유없이 제 막내 아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분노에 쌓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경찰관 때문에 며칠을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살았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는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정말 용서했습니다. 저는 제 서재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 경찰관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전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다 용서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순찰차를 타고 가는 그 경찰관을 보는 순간 저는 다시 용서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금 분노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번째로 용서하였기에 조금은 쉬웠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저는 그 경찰관이 난폭한 행동으로 해임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이 저에게는 꿀보다 달았습니다. 마치 제가 보복을 한 것처럼 달콤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저는 다시 한 번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다시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를 완전히 용서하기 위해서 몇 번을 더 용서해야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렇게 용서는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죠. 물론 우리는 용서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해요. 용서의 감정과 느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결단해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것을 "결단의 용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를 결단한다고 해서 쉽게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그 사람을 보거나 유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미운 마음이 다시 들죠. 따라서 용서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쉬워도 정서까지 바꾸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머리부터 가슴까지는 인생이 가야할 가장 긴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가슴을 변화시키는 용서를 해야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그 사람에 대한 분노, 두려움, 적개심의 정서 옆에 그를 이해하고 동종하고 사랑하고 긍휼을 베푸는 긍정적인 정서를 병치시켜서 긍정적인 정서로 부정적인 정서를 대치시키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지속시키면 이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학자들은 "정서적 용서"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를 한다고 해놓고 또 다시 내가 용서를 못했구나. 나는 용서할 줄 모르는 실패자나 위선자라는 느낌이 들면서 자신을 비난하고 성처 위에 상처를 가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이 용서를 결단하고 정서적인 용서의 과정을 겪으면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역사를 보면 아무리 결단하려고 애를 써도 인간에게 진정한 용서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2005년 국회의원이었던 김근태씨는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씨를 용서하고 대화합을 했다고 해서 대서특필했었습니다. 이근안씨는 85년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받던 김근태씨를 10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당사자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기사와는 달리 김근태씨는 용서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후에 밝혔습니다.
악수를 했다.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까지 흔쾌해지진 않았다. 지난 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와 가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던 어떤 질문 때문이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김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 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인가?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했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는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사죄하고 있는 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는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며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김근태씨는 용서하고 싶었지만 끝내 용서한다는 말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서는 신의 영역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용서에 대해서 솔직한지 몰라요.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마 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용서를 했겠죠. 목사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7번씩 70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한 다음에 그가 주신 비유를 보면 용서는 신의 영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23~27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한던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 만 달라트 빚진 자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다 갚에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이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엑 왜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은 용서로 이루어져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 달란트 빚진 자인데 다 탕감 받았다는 거죠. 만 달란트에서 일만은 헬라어에 최대의 숫자입니다. 달란트는 최대의 화폐단위예요. 일만 달란트는 최대 숫자와 최대의 화폐단위로 엮은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가치인거죠. 오늘 날로 말하자면 수십억 달러 내지는 수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몸과 그 처와 그 다음에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지 못한 천문학적 빚을 졌는데, 그래서 임금이 몸과 처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지시한 거죠.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엎드려 빌면서 긍휼을 요구하자 임금이 다 탕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주인에게 한량없는 은혜와 빚 탕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죠. 28-30절을 보면,
그 종이 나가서 주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같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그가 가서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였지만 탕감받은 이 사람이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목을 잡고 갚으라고 요구한 다음에 감옥에 가두는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가엽기그지 없습니다. 물론 백 데나리온도 작은 것은 아닙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3개월 정도의 봉급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와 비교해 보면 오십만분의 일, 내지는 육십만분의 일정도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액수입니다. 이 사람은 작은 돈에 분노하여 통제력을 잃고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심하게 과장한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오십만배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오십만분의 일밖에 안 되는 적은 빚을 진 자를 이렇게 목잡고 갚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 종은 무엇을 놓치고 있습니까? 바로 빚 진자의 마음입니다. 이런 의식이 없었기에 그는 용서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너무가 잘 보여주고 있죠. 진정한 용서란, 내가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다는 빚진 자의 의식이 아니고는 결코 남을 용서하거나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죠.

결론

우리에게 빚진 자의 삶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고 계시는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필리핀 북부 몇 안되는 산지 부족을 위해 선교사역을 하고 계시는 권영수 선교사님이십니다. 이 선교사님은 제가 신대원 시절 수련회 강사로 오셔서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필리핀 중에서도 외진 고산 지역 '비키칸' 지역에 들어가 일생을 바쳐 사역하시는 분입니다. 비키칸이라는 마을은 원시 부족 마을입니다. 그래서 부족인들은 제대로된 옷도 없고 먹을 때도 손으로 먹습니다. 한번은 선교사님이 한 성도의 집을 심방을 하는데 어린 아이가 그만 설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본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배설물을 손으로 훔치더니 밖으로 내다버리고 그 손을 자기 옷에 쓱쓱 닦고는 씻지도 않는 채 밥을 손으로 퍼서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이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먹을 수 있었겠지만 이걸 본 이상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먹기 곤란한 거예요. 그래서 물에다 밥을 말아서 물과 함께 후루룩 마셨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시는 분입니다. 권 선교사님께서는 설교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들을 위해 제 평생을 바쳐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 큰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이 아니고는 이 일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서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죠. 그렇기에 주님은 7번 용서하면 됩니까? 물었을 때 7번씩 70번 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는데 그 몸과 처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인데 팔아서 갚으라고 하니까 용서해달라고 해서 다 용서해주었더니 이 사람이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자 목잡고 갚으라 했다.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십만배나 되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 오십만분의 일되는 사랑과 용서를 뿜어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를 사모하며 우리가 받은 은혜의 오십만분의 일이라도 뿜어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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