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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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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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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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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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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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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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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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29UNLIKELY
Conscientiousness
0.27UNLIKELY
Extraversion
0.54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9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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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찬송 283 218 212
기도
본문 마18:1-14 (신p.30)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는 명예욕일 것이다.
누구나 명예롭게 되기를 바라며, 누구나 조금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 하는 욕구들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들이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이왕이면 부끄러운 구원으로 간신히 천국에 턱걸이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하나님께 칭찬 받고 인정 받길 원한다.
할수만 있거든 온 천군천사들의 환호 속에서 황금 면류관과 황금지팡이를 거머쥔채로 영광스럽게 입장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지 않으신가?
저만 그러한가?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제자들도 장차 메시아께서 정치적인, 군사적인 왕으로 오르실 그 날에,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로 오르게 될지, 이 문제를 두고 그들끼리 자주 논쟁하였던 것 같다.
누가복음에서는 '변론이 일어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적어도 제자들은 그들 중 누가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인지에 대해 습관적으로, 자주 논쟁을 벌여왔던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논쟁은 때로 다툼으로 이어졌고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주님께로 그들의 문제거리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란 누구일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서 큰 자들이 될 수 있을까? 먼저 ‘큰 자’ 라는 개념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천국에서 큰 자 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위대하고, 중요한 사람’으로서, 좀 더 정확한 의미로는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아 상급을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제자들은 이 땅에서 누릴 명예와 출세에 대해 질문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있을 상급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천국에서 큰 자, 하나님께 인정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는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 3가지를 말씀드리려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다.
1절처럼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시각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부르셔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신다.
본문 3-4절 말씀을 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어린아이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할때 아이들의 순수함, 순결함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로 아이들이 순수하던가?
아이들이 정말 티 하나 없이 순수하고 순결하던가?
때로 이 아이들이 내 배에서 나온 애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영악할 때가 있지 않던가.
물론 어른에 비하면야 아이들이 깨끗하고 순수한 면들이 있겠지만, 결코 그들도 순결하지 않다.
순수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3절에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과 4절에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서로 같은 의미이다.
즉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함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 아이가 겸손함과 연결이 될 수 있는가.
고대 사회에서 미성년 아이들은 여성 만큼이나 가볍게 여겨지곤 했다.
그들은 성인 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재산 증식을 위한 노동력 정도로 가치 평가 되곤 했다.
왜냐하면 미성년 아이들은 외부로부터 적절히 가장의 재산을 방어할 줄도 알았고, 또한 적절히 노동력을 제공할 줄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 안에서 아직 아무런 권리가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아직 어떤 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이야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 취업도 가능하다.
특수한 경우에는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 사회적으로 독립을 하는 경우들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대 사회는 달랐다.
그들은 당장 아버지의 도움과 지원이 없다면 아직 어떠한 일도 자발적으로 행할 수 없는 연약하고도 무능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홀로 남겨진다면 죽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적으로 아버지를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아이가 아버지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 머물며, 아버지만 의지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의 의미가 이와 같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연약함, 무능함으로부터 오는 겸손을 말씀하신다.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의 의와 능력이나 공로를 의지하려 한다면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들,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분명한 은혜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19장에서 부자청년은 자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면 지킬 수록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주님을 찾아왔다.
주님은 그에게 가진 재물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주님께서는 할수만 있거든 더 율법을 지켜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셨던 바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롬3:20 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기록한다.
본래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고,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나타낼 수 있었지만, 죄에 완전히 물들어버린, 잠식된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고, 율법의 모양은 어느정도 따라할 수 있을지언정 율법의 정신까지 온전히 따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율법을 살필수록 자신의 죄만 드러날 뿐이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이와 같이 ‘나의 무능함과 무력함에 엎드러지는 것’이다.
도저히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연약함과 무능함과 무력함에 대해 인정하고 엎드러지며, 나와 같은 무가치한 인간에게는 내 안에 어떤 것도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오직 전능하시며 온 우주의 재판관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롬3: 23-24 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만을 바라보는 자들이요, 또한 롬3:28 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는 말씀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그 간절한 믿음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그리스도의 공로로 덮어주시고, 인정하시며, 천국에서 높여주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러한 믿음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한다.
두번째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형제를 굳건하게 세우는 자이다.
주님께서는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실족하게 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넘어뜨리거나 범죄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사냥꾼이 사냥감을 포획하기 위해 덫을 설치하던데서 비롯되었다.
사냥꾼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 그 짐승이 자주 다니는 길을 찾아다니고, 그 중에서 덫을 놓기 쉬운 장소를 물색하며,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덫을 설치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찾아나서고, 반드시 걸릴만한 덫을 준비하며, 그 덫으로 넘어뜨리고 쓰러지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남을 실족하게 하거나, 자기 스스로를 실족시키는 자들에 대하여 6-10절을 통해 엄히 경고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을 서로 돌보아 굳건하게 세워주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인데, 도리어 그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경고를 주신다.
연자맷돌이란 사람의 힘으로 돌리는 맷돌이 아니라 나귀나 말의 힘으로 돌리는 거대한 맷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우리의 형제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자, 낙담하게 하고 죄를 짓게 내버려두는 자들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바다에 맷돌을 달고 떨어지는 사형을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을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8-9절에서 스스로 실족하는 자들에게도 엄히 경고를 하신다.
이는 실제로 육신의 일부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형제를 범죄하게 만들고 유혹하고 넘어지게 만들려는 유혹이 임할 때에 ‘그 죄악된 본성과 습관을 끊어내어 마음을 다스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업신여기다 라고 번역된 원어는 ‘속이고, 부끄럽게 만들고, 멸시하고, 경멸하고, 조롱하고,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고, 모두가 신뢰할 수 없을만한 대상으로 만들고 결국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14절 말씀을 보라.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와 같이 누군가를 실족시키고, 그들을 업신여겨 결국 그들이 주의 몸된 교회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심각한 죄이다.
여러분, 혹 우리도 은연중에 이러한 악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떤 지체를 향한 이러한 업신여김의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는가? 이는 결코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엄한 경고대로 심판이 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하여도 주님께서 찢기시고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을 굳건하게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자주 실족하는 자들, 자주 넘어지는 자들, 자주 쓰러지는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일으켜줄 수 있어야 한다.
굳건하게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 히10:23-24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 우리의 형제들을 굳건하게 세워줄 수 있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을 찾는 사람이다.
사람도 양 한마리를 잃어버린다면 만사 제쳐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다.
하물며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바 된 영혼을 위하여 자기 몸 찢기시고 피흘려 죽으시지 않았는가?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바 되었던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혈을 쏟아내셨거늘,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우리의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 나서서 그들에게 주님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5절 말씀을 보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서 영접하다 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맞이하다, 환영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받아들이다, 기쁘게 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확대된 후자의 의미까지 반영한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을 찾아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이 교회의 지체로 세워질 수 있도록,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같은 단 하나의 믿음으로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세우는 것 까지가 ‘영접하는 것’에 포함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첫째는 전도이다.
전도는 주님께서 교회에 일임하신 거룩한 사명이다.
롬10장 말씀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믿음의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분들도 계시지만, 또한 이 자리의 많은 분들이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예수를 믿기 시작한 분들도 많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라고 명하셨다.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사랑을 이제는 다른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전파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
복음을 전파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시험에 들고 넘어진 지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줌으로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든 시험에 들 수 있고, 여러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 낙심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신앙생활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지체들을 붙여주셨다.
이는 혹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든 넘어질 수 있으니, 우리의 형제들이 넘어지고 실족한 것을 보거든 일으켜 세우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말씀을 정리한다.
천국에서 큰 자는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하시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을 인정하시는가?
어린아이와 같이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을 인정하시는가?
형제를 굳건하게 세우는 자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을 인정하시는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와 같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또한 우리 양문교회가 이 일에 열심내는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는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말씀을 기억하며(369장 찬송)
1. 나의 가진 능력과 재능과 지식과 공로 모든 것들을 온전히 내려놓고, 오직 죄인들의 소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2. 형제를 실족하게 하여 넘어지게 만드는 악한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약한 자들을 굳건히 세워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3.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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