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시리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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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춰야 산다 (마 5:5;눅 18:9-14)
낮춰야 산다 (마 5:5;눅 18:9-14)
서론
예화) 눈사태를 당할 경우 중요한 생존 전략
1) 침을 뱉으라. 2) 파라.
<파퓰러 사이언스> 지에서 희생자에 관한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구조팀이 시체를 발견하고 보니 희생자는 무작정 눈을 파다가 오히려 10미터나 ‘더 깊이’ 파고들어 간 상태였다. 그는 남은 힘을 오히려 목표에서 더 멀어지는 데 전부 소진하고 말았다.
눈에 뒤덮이면 어디가 어느 방향인지 파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력은 여전하다.
전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세상은 방향감각을 상실해 있었다. 위가 아래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빛을 찾는답시고 오히려 더 깊이 파내려갔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오신 이후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이제는 통치왕이 달라졌고, 통치 방식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이 질서를 바로잡으셨다고는 하는데 웬지 그분이 지도를 거꾸로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 세 번째 축복도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예화)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양자) vs 안토니오 (카이사르의 친구, 클레오파트라)
“온유한자 (겸손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성경은 온유하다는 의미는 겸손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CSB 성경도 “the meek”을 “the humble”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도 본인의 성품을 이야기할 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7:11절은 아래와 같이 말씀합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37편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번에도 우리는 21세기의 귀로 들어서 이 말씀이 모순처럼 들립니다. 겸손한 자, 자신을 낮추는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really? 땅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대기업 회장, 연예계 스타, 정계의 거물들이다. 이들은 겸손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의미는 구약에서 약속한 Physical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복, spiritual blessing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도 똑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의 방향과 세상의 방향은 다릅니다. (톰라이트 굴러가는 바퀴 비유)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문화적 격변 속에서 약화되어 가는 유대교를 율법 준수 운동으로 회복시키고자 했다.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히브리 율법을 철저히 지켰으며 곧은 인품과 학식, 영향력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최상류층이었다.
반면에 세리는 부요했지만 동족들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세리는 심지어 창녀들에게도 경멸을 받는 인간쓰레기였다. 이때의 세리를 1세기의 국세청 직원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였다.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것도 모자라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고 동족을 이중으로 착취한 자들, 세리는 합법의 탈을 쓴 강도였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봅시다. 이 두 사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한 사람은 우리가 이들에게 “저분 보이니? 너도 커서 저분처럼 돼야 한다"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우리가 아들에게 “에이 그, 저 나쁜 놈! 나가서 던질 돌 좀 주워와라"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누구를 겨냥한 것이었을까? 바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눅 18:9)이었습니다. 거드름을 피우며 잘난체하는 자들, 이 가르침은 콧대 높은 자들에게 먹이는 원투펀치였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기도하는 중에 눈을 떴던 게 분명하다. 세리를 본 그는 자기 의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희생양을 발견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바리새인은 세리의 잘못을 꼬집고 나서 재빨리 자신의 베풂을 자랑한다. “하나님,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모든 세전 소득에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사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아마도 감사로 시작했을 지 모른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멋진 사람인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아가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더욱 빛나게 해 줄 악인을 물색합니다.
연관성)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절대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 겸손은 곧 교만이며, 교만은 당사자만 모를 뿐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훤히 보인다. 성경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라고 말한다. 마음속에 교만이 가득하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그 교만이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교만이 가득한 마음의 증상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르는 이 교만의 증상은 무엇일까요? 카일 아이들먼은 다음과 같이 할 때 당신은 바리새인일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1)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라고 말할 때 - 교만은 비판이나 지적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아울러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지적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기분 나쁘다는 투로 대꾸한다.
예화) 아이언맨 설교학 크리틱 - 박사과정 생인데 Mdiv에 있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이 설교에 대한 비평을 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다. 내 안에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2)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라고 말할 때 - 교만은 자석처럼 갈등에 끌린다. 그리고 교만은 사소한 언쟁을 큰 싸움으로 키운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하려면 겸손이 필요하다.
3) “이건 공평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 -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불공평해 보인다. “왜 그가 승진했지?” “왜 그가 나보다 더 좋은 집에 사는거야?” “왜 다들 저 사람만 칭찬하지?”
4)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
5) “내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라고 말할 때
우리 안의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본질이 성과욕이라는 것이다. 성과는 눈에 보이는 부분이다. 겉모습에 집착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며, 바리새인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 달인이다. 오늘 본문처럼 바리새인은 금식하고 나서 자랑한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수표를 공중에 흔들고 나서 헌금을 한다. 마태복음 23장 5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리더의 위선을 지적하셨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그러나 예수님 설교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성과 위주의 믿음은 정말 위험하다. 빛나는 성과에 대한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다 보면 점점 가식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들은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고, 그들의 눈에는 굶주린 자들과 아픈 자들의 고통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저 “자기애" “자기의" 뿐이었다.
예화)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조차 자기홍보에 중독되어 있을지 모른다. 사실 저도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행복한 척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우리의 가장 좋은 모습만 볼 수 있도록 아예 사진 필터 앱을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 스노우라는 앱도 사용하는데, 오죽하면 찍은 사진을 날 것 그대로 올렸다는 표시로 “#논필터"해시태그를 붙인 글까지 나타났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일인칭 대명사 “나"를 연거푸 사용한다. “나는, 나는, 나는..” 자신의 교만 지수를 측정하고 싶다면 100 단어 당 일인칭 대명사를 몇 번이나 사용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전환) 그럼 세리는 어떠한가?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었지만 세리는 자신의 끝에 이르러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그의 자세까지 상세히 묘사하신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반면, 세리는 “멀리" 서 있다. 세리는 하늘도 쳐다보지 않는다. 하나님을 뵐 면목조차 없다는 것이다. “가슴을 치며" 세리의 기도는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말로만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게 아니라 죄에 대한 애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성전에 온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평가가 나오는데 오늘 제목처럼 “왜 낮춰야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8장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삶의 방식이고, 삶의 능력이고, 복음의 본질입니다. 이제는 교만한 자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는 원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길 원하십니까? 그럼 자기를 능동적으로 낮추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8:14)
여기서 카일 아이들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낮아지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누군가나 뭔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낮아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실직이나 깨진 관계, 부서진 꿈은 우리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게 아니라 ‘능동적인’ 낮아짐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절로 낮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게 아니다.”
몇 년 전 닉 왈렌다가 방송에 나왔을 때 엄청난 시청율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는 2012년 외줄 하나로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갔습니다. 2013년에는 외줄로 그랜드캐니언을 건넌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그가 교만의 함정을 어떻게 다뤘는지 궁금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수백만 시청자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낮출 수 있었을까?
왈렌다의 외줄타기 공연에는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몰려듭니다. 그만큼 쇼가 끝나면 엄청난 쓰레기가 현장을 덮습니다. 그런데 왈렌다는 외줄타기를 마친 뒤에 바로 이동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현장을 돌아다니며 팬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 시간 동안 쓰레기를 줍는 일은 내 영혼에 매우 유익하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겸손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스스로 낮출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렇게 한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는 그분이 다른 이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한다. 남을 섬기지 않으면 내 자아만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넘어지는 지름길이라는 걸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을까? 먼저 예수님께서 그 본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2장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주의할 점은 겸손마저도 자기 성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카일 아이들먼은 그의 책에서 다시 한번 그 전략을 소개한다.
1)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한다.
2) 희생적으로, 익명으로 나눈다.
3)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잘 대해준다. ex) 49:51 법칙
4) 도움을 요청한다.
결론
자신을 낮추기 위한 전략은 거의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방대한 미개척자다. 모든 상황이 겸손을 실천할 실험실이요 그리스도를 높이고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을 기회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이미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