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지 못하십니까

요한일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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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믿지 못하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이시간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요한일서를 살펴보며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가 형제 사랑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왜 요한일서를 기록했는지 그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요한일서를 기록한다고 말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도 요한은 성경을 몇 권 썼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성경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요한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20장 31절에서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예수라는 사람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온 동네를 다니며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놀라운 가르침을 주던 사람이어서 유명했고,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이름을 믿으면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그 대상이 조금 다릅니다. 본문 13절 말씀은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해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해 들었지만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초신자를 위한 책이고, 요한일서는 신앙생활을 좀 해본 사람들에게 기록한 고급반 교재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나란히 놓고 보면 사도 요한이 원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교회 안에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해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듣게 되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느냐?”고 물으면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신앙생활하며 자라와서 교리도 다른 사람보다 잘 알고 있으며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영생이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경건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영생에 관한 질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간 차를 두고 병 중에 있는 권사님 두 분을 만났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병 중에 있는 성도를 심방할 때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믿음이 좋고 신앙의 본이 되는 권사님이니 영생에 대한 질문은 하나마나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만난 권사님에게 “당신에게 예수님이 주신 영생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다른 권사님을 만나 “권사님, 예수님이 권사님에게 영생 주신 것을 믿으시죠? 하나님 나라 들어가실 것 분명히 확신하시죠?”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이 암으로 생사의 기로에 있으셔서 다른 질문들에는 다 죽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셨는데, 이 질문에는 “목사님!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어서 구원받은 줄 믿습니다”라고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의 대답을 듣고는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서 권사님께 실례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는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이 정상입니까? 어느 쪽이 제대로 믿고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은 확신이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 땅에서 온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온전한 기쁨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내 안에 영생이 있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은 예수님을 “물과 피로 임하신 이”라고 말합니다. 물과 피로 임했다는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인데, 말씀은 이어서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7절과 8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는 말씀은 ‘성령’과 ‘물’과 ‘피’가 말하는 증거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가 예수님에 대해 같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알겠는데, 물은 무슨 말이고, 피는 또 무슨 말인지 어렵게 느껴집니다.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쉽게 말해서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실 때 ‘물을 가지고 증거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약 30세가 되었을 때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에게 나오셨습니다.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거해 주셨습니까? 하늘에서 소리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지금 세례 받은 예수라는 사람이 내 아들이라고 증언해 주신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증거하셨기에 ‘물로 증거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피로 증거’ 하셨는데, 피는 곧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통해 증거해 주셨습니까? 이적과 기사를 통해 증거해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일어난 지진과 이적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는 대낮인 정오였는데 해가 빛을 잃어 세 시간이나 어둠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잠자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이 모든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거하신 것을 일컬어서 ‘피로 증거하셨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임하셨습니다. 왜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6절에서 성령님의 증거하심을 말할 때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증거하는’이라는 말은 예전에 한 번 증거했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증거하고 있다는 시제로 기록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증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도록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믿어지게 하시는 것,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론 믿음이 약해지고, 믿음이 흔들리기는 하지만 결코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항상 믿도록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물과 피와 성령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에게 영생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물로 증거하셨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피로 증거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의심하지 않도록, 엉뚱한 길로 가지 않고 믿도록 증거하고 계십니다.
2003년에 스웨덴 외교부 장관이었던 안나 린드 살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목격자가 29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범인이 밀리터리 무늬 자켓을 입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머지 목격자들은 이후 추가 조사에서 하나같이 범인이 밀리터리 자켓을 입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나중에 범행 현장 사진 자료가 확보 되었는데 이 증언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범인이 밀리터리 자켓이 아니라 회색 자켓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5년 영국 리버풀 대학교 심리학건강사회연구소의 크레이그 시올리 박사는 실험을 했습니다. 크레이그 박사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범죄 동영상을 시청하게 한 후,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목격자의 진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피실험자의 40%가 그 진술을 읽은 후 똑같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크레이그 박사는 추가 연구에서 피실험자들에게 소매치기 영상을 보여준 뒤 거짓 진술을 읽게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선 실험과 똑같은데, 이 때 거짓 진술을 한 목격자가 강하게 확신했다는 정보를 피실험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피실험자들은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 대부분 두 사람 정도의 증언이 있으면 그 증언이 법적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두 세 사람의 증언만 있으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앞선 실제 사건과 실험을 통해 볼 때 사람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까. 앞의 예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얼마나 진실하지 못한 존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 하더라도 거짓말 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본성 때문에 위기가 찾아오면 나도 모르게 거짓을 말합니다.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사람도 두 세 사람의 증언만 있으면 그 말은 법정에서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증거를 두 가지만 제시하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실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땅은 …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고 하시니 짐승이 그 종류대로 생겼습니다. 온 우주만물이 사라지면 사라졌지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거짓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진실되신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는 내 아들이고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만으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9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세 가지 증거를 가지고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는데 우리가 믿지 않거나, 확신하지 못하면 그것은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영생이 있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자연스레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생이라면 우리에게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을 영원히 누리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이 누리고 계신 삶,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완전한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삶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들어가 함께 누리는 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생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확신의 문제입니다. 앞서 말한 병 중에 있던 권사님처럼 영생이 내 안에 있는지 확신이 안 서는 것입니다. ‘성경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무언가 내 안에 영생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원합니다. 느낌이 확실하게 오던지, 눈으로 보이던지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도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분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온 땅에 충만하신 분이시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우리가 물리적인 방법으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길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기 위해 원하는 증거를 가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말씀하지 않으시고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딱 한 마디 하십니다. “믿는 너희에게”. 우리가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대로 믿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여전히 믿기는 하는데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기는 하는데 내 안에 영생이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왜 믿는데 확신이 서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는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대학에 다닐 때 폐결핵을 앓아 수 년간 고생을 하셨다고 합니다. 결핵이 있으니 3개월마다 엑스레이를 찍는데 엑스레이를 자주 찍으면 몸에 좋지 않으니 결핵환자인 자신이 엑스레이를 자주 찍는 것이 싫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엑스레이를 찍고 나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불안한 마음도 들어 엑스레이 찍는게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엑스레이를 찍고 기다리는데 의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약을 끊고 안먹어도 되겠네요. 다 나았습니다”
의사가 이렇게 말하면 기뻐야하는데, 옥 목사님은 의사 말이 믿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걸어놓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하는데, 목사님 눈에는 지금 엑스레이나 3년 전 엑스레이나 뭐가 다른지 구분도 되지 않고, 이전에 상처가 그대로 있는 것 같아서 의사 말이 믿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병이 완치되었다고 말하는 의사의 말이 믿어지지 않으니 불안해서 결국 약국에 가서 약을 6개월치를 더 사와서 혼자 먹었다고 합니다. 얼떨결에 완치된 사람이 계속 투병생활을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의사의 말에도 완치된 것이 확신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누가 “결핵균이 없는 사람이 약을 계속 먹으면 나중에 딴 병이 생긴다”고 말하자 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약을 안 먹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약을 안먹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자 그제야 ‘아, 의사 말이 맞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제서야 마음에 기쁨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늘을 보아도 괜히 더 파랗게 보이고, 바람이 더 상쾌하게 느껴지고 춤추는 것 같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도 있지 않은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아무리 영생이 있다고 말해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옥 목사님이 “병이 다 나았다”는 의사를 불신하여서 그 마음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인데,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뒷전으로 제쳐놓고 무엇인가 내 안에서 증거를 찾으려고 하니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내가 말하는 걸 믿지 못하니? 다른 누가 아니라 하나님인 내가 말하는데 왜 믿지 못하니? 왜 확신을 가지지 못하니? 확신을 가져라. 내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가지고 영생이 있다고 말하는데, 왜 그렇게 믿지 못하니?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왜 마음으로는 온전히 믿지 못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완전하고 행복한 삶을 우리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마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어서 내 안에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고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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