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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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 3절 말씀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설교 제목 : 창조 타락 구속 시리즈 1 “태초에”
서론
이번 주에 수요일에 맥북 스피커 고장으로 인해 직접 수리에 나섰다. 노트북을 뒤집어 까고, 여러 장비들을 가지고 나사들을 풀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미리 해놓은 사람들이 고장난 장비를 고치기 위해서 어떤 나사를 풀고, 어떤 것의 연결을 해체 해야하는지 미리 작성해놓았기 떄문이었다. 막 하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전도사님은 다시 지침을 보았고, 그것조차 감이 잡히지 않을 때, 유튜브에 들아가서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그 덕분에 편안하게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어려움을 맞이할 때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러한 지침을 보고 참고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은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미 참고할 것들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 오늘 제목처럼, 창조 타락 구속이 나타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에 타락하고 황폐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다시 오셨고, 다시 만드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며, 그것은 창조에서 타락, 구속, 마지막에 완전한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성경은 너무 길고 다양하고 풍부하고 장르도 너무 많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나무가 있는 숲을 놓치곤 합니다. 그렇기에 큰 그림을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한 시리즈의 설교에서 성경 전체를 큰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몇 주 동안 우리는 먼저 성경의 시작 부분인 창세기 1-4장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일이 잘못되었는지 살펴 볼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본질적으로 성경의 구속적 역사적 중간 부분인 로마서 1-4장을 살펴볼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우리의 문제와 위험에 대해 무엇을 해결하셨는지 알려줍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성경의 마지막 4장(처음 4장, 중간 4장, 말 그대로 마지막 4장)인 요한계시록 18-21장을 살펴보고 모든 내용이 어떻게 나올지 보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창세기 1장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세상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처음 세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실제로 시작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 모두 우리가 알아야 하며 중요합니다. 태초 이전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랑이 있었고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시작될 때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시작이 없는 유일한 것, 유일한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시작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기원과 존재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이 세상은 우연이 만들어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어떠한 목적을 위해 살아가지 말고 그냥 태어났기에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모순적이게도 하나님은 없지만,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이 정직해야 하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종이칼(커터칼)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할 수 있습니다. 종이칼이 어떨 때에 좋은 칼입니까? 종이칼이 종이를 잘 자르면 좋은 칼이고, 종이를 잘 못 자르지면 나쁜 칼입니다. 게다가 종이칼은 종이를 자르지 않고 대리석을 조각한다면 좋은 칼일까요? 종이 칼로 대리석을 조각하려고 하면 목적에 어긋나므로 종이 칼을 망치거나 대리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이칼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좋은 칼, 나쁜 칼로 나눠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목적에 따라 지음 받았다면, 하나님이 선을 원하신다면, 지음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악한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런 목적을 위해 살아갈 이유도 없고, 좋은 사람,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옳고 이것은 옳지 않다"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량학살을 한 나치를 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지 않았다면, 옳고 그름이 없으며, 다른 이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옳다고 나치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싸이코패스가 있지 않는한, 우리는 본능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도 그러한 기준에 맞춰서 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웃긴 일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없다고 얘기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살아가라고 얘기합니다. 학교에서는 세상이 하나님 없이 우연이 생겨났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성품을 가지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얘기하려면, 옳고 그름의 기준도 없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얘기하듯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9-20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려면 이 사회 시스템을 거슬러 반대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심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할까요? 대부분의 경우, 자유를 얻고자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전도사님이 어제 대학원에 면접을 보러 갔어요. 대학원 1학년 때에는 무조건 기숙사에 살아야만 하거든요. 그런데 대학원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며, 전도사님 한 친구가 이 곳에 갇혀 있는 것이 너무나 싫다고 얘기했어요. 어차피 통학하기에는 너무 멀고, 갈 곳도 없으니까, 기숙사가 낫지 않냐고 하니까. 그 친구가 물론 기숙사 살건데, 무조건 기숙사에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너무나 싫다는 거에요.
이렇듯 우리는 자유를 얻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부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참된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충실하게 지킬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찾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 팔과 다리에 채운 족쇄가 아니라, 우리가 뛰어놀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커다란 울타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 발견하게 되는 진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2.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1절에 하나님이 계시고, 2절에 하나님의 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창조를 하십니다. 그래서 창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알겠고,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말씀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면,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시죠. 그래서 창조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관계의 우선성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혼자서 사랑할 수 있나요? 물론 짝사랑도 사랑이라고 얘기하겠지만, 온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게 사랑을 주기도 하고 상대로부터 받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에 사랑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 5절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서로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칭찬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태초 이전에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사랑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첫 번째, 관계의 우선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경쟁사회에 피라미드 계층 구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내가 더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있죠.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높은 성적을 받고자 합니까? 선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많은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돈을 많이 벌고자 합니까? 내가 편하고자,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사고, 권력을 부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옳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창조보다 먼저 사랑하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요? 큰 권력을 갖고, 돈을 더 많이 가지고 누군가를 힘으로 누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공동체와 관계 그리고 사랑을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영광을 돌리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영화롭게 되셨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경의를 표하다,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실제로 말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타자 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각각은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다른 두 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다른 이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향한 이기심이 다른 이를 향한 사랑보다 커져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 관계를 가로 막는다면, 나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막을 깨뜨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으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 모습을 보고 우리를 보호하는 보호막을 깨뜨립시다.그렇지 않으면 나를 보호하고자 했던 보호막이 친구들을 상처주고 그 상처로 친구들은 나를 떠나, 결국 비참하고 더 슬픈 관계의 끝을 보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태초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3. 태초에 어두움이 있었다
“이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 " 알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이 말씀하시 전 말씀 아래 태초의 혼돈과 어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말씀 아래 있을 때 질서와 빛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5-10장을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종살이와 종살이에서 구출하려고 했다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고 말하자 바로가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재앙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 하나님은 나일 강을 쳐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개구리는 모든 사람의 집에서 쫓겨나므로 개구리가 들끓고 모두 죽습니다. 개구리가 죽으면 모든 시체가 주위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알다시피, 모기와 파리의 침입이 있습니다. 그 결과 갑자기 전염병이 돌고, 소가 죽고, 사람들이 죽기 시작합니다. 꽤 자연스럽죠?
볼 때마다 모세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알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재앙, 그 다음 그 재앙, 그 재앙을 일으키고 바로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는 단지 운이 나쁜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모든 재앙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들은 자연 재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9번째 재앙에 온 땅이 흑암으로 덮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을 먹는다고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가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삶에서 흑암이 가득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심장 마비를 일으킬 것입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1등이 되고자 하면, 과로로 육신의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말씀 아래 있지 않을 때 우리의 삶에서 흑암이 가득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말씀 아래 무엇인가를 가져오실 때, 혼돈은 질서정연해집니다. 어둠이 빛이 됩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흑암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닿지 않는 그 영역은 아직도 어둠입니다. 질서가 없으며, 혼란스럽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가 찾아오셔야 합니다.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의 이야기를 우리 삶에 적용시키고자 하는데, 그 중에 첫번째, 창조에 대해서 함께 나눴습니다. 특히 태초에 있었던 3가지에 대해서 함께 보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사랑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둠 같은 우리 삶에 찾아오지 않으시면 우리 삶에 빛이 영영히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둠에서 나와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없다하고, 권력이 최고다 하지만, 정작 어둠 속에서 건져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고 하고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친구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