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눈물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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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1장 1-11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 구약 성경 408 페이지 입니다. 다 찾으신 줄 알고 교독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설교 제목: 한나의 눈물과 기도
서론
이 시간 옆에 계신 분께 이렇게 인사할까요?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한 번 더 인사할 때, 하나님을 찾는 공동체가 됩시다. 네 좋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여러분 모두는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개인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오신 분도 계시고, 공동체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고자 나오신 분도 계십니다. 물론 옆에서 끌고 나와서 억지로 앉아 있는 분도 계시겠죠. 그런데 확신하건데, 오늘 여러분이 기도의 자리로 나오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자리로 부르셨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한나의 눈물과 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마지막 사사이자,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사무엘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한나의 눈물과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녀가 왜 우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가나에게는 브닌나와 한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일부다처제이죠.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부다처제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편에게나, 두 명의 아내 모두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그 두 명의 아내 중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브닌나가 한나를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 때까지 조롱하고 괴롭힙니다.
한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우는 걸까요? 우리는 이것을 고대 사회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 시대의 가족이나 국가는 여성의 다산에 의존하였습니다. 우선, 자녀가 많을수록 가족이 더 많은 돈을 갖게 됩니다. 일손이 늘어나기 때문이었죠. 또한 자녀가 많아야 일을 할 수 없는 노년이 되어서도 안락한 노후를 보장 받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복지 시스템이 없기에 노인들은 오로지 자녀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 아이들이 쉽게 죽었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자녀가 많지 않은 나라일수록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했습니다. 군대에 사람이 많지 않으면 정복당했습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출산은 가족의 기쁨이요, 국가의 이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성의 다산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불임은 절망을 표현합니다. 한나가 느끼는 것은 단순히 자녀가 없다가 아니라, 그 시대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느껴집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느끼는 주변의 시선, 모든 문화의 주장입니다. 이 문화는 한나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한나가 이것을 어떻게 느꼈냐면, 6절에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히브리어 단어로는 천둥을 의미합니다. 그녀의 내면적 감정적 삶은 그랬다. 그녀는 아이를 원했지만 가질 수 없다는 그 고통이 천둥과 같이 내면에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외침 속에서 한나는 홀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대 문화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한 시대의 외침이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그 기준이 다산은 아닙니다. 이제는 개인의 성취와 아름다움, 돈 이것들이 그 기준을 대신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이것이 없으면 주변 사람이 싫어할 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스스로를 싫어하고 경멸합니다.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브닌나가 찾아와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성적과 좋은 학벌, 좋은 직장들을 드리밀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나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증명해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다시 한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금 한나는 참으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브닌낭게 조롱당하여 마음이 흠든 그 때에 남편이 다가와 그녀를 위로합니다. “한나여 왜 울고, 왜 먹지 않으며, 왜 그토록 슬퍼하냐. 비록 너는 자식이 없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 참으로 스윗하고 꽤 괜찮은 남편이지 않나요? 우리가 혼자서 울고 있을 때,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참으로 이렇게 공감받는 것도 쉽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를 들은 한나의 반응이 신기합니다. 이런 남편의 위로를 받았을 때, 남편은 어떤 반응을 기대했겠습니까? “나 이제 쓸모없는 사람 아니야?, 나 아들 낳지 못해서 계속 사랑해줄꺼야?” 이렇게 남편의 사랑으로 인해 안도하며 평안을 찾아야 하는데, 한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한나는 일어섭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여기서 “그녀가 일어났다” 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상의 관용어입니다. “그녀가 일어났다”라는 표현은 단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표현이 아니라, 그녀가 마음을 정했고, 이제 결정적인 행동을 하기로 했다는 의미입니다.
한나가 엘가나에게 응답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이 계신 성막으로 간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엘가나의 위로는 너무나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제 너는 성취를 통해 너의 존재를 증명하지 말고, 나의 사랑 안에서 푹 쉬어라. 내 사랑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려라. 와우 너무 좋은 멘트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무 좋은 이 멘트 안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가족의 사랑, 위로, 너무나 고귀한 것이지만, 이것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되면 그것은 우상이 되어 결국 우리를 옭아맵니다. 그 사랑안에 거하며 머물러,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우상은 항상 좋은 것입니다. 나쁜 것은 우상이 될 수 없죠. 누구나 동의할만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가치인 가족의 사랑, 이것이 하나님보다 앞서 마음에 평안과 만족을 준다면, 그것은 헛된 평안이요 헛된 만족입니다.
한나는 성취를 요구하는 사회의 노예가 되지 않길 원했고, 또한 남편의 사랑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는 하나님이 계신 성막으로 갑니다. 사회가 외치는 천둥 소리를 거부하고, 남편이 속삭이는 달콤한 소리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보면 의아스럽게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나 싶습니다. 11절에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마치 그녀가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저를 위해 먼저 아들을 주시면, 제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제 나에게 아들을 주셔서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게 해주세요”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서원을 하며, 말도 안되는 기준을 붙입니다. 하나님.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께 아들을 있는 그대로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것은 나실인의 상징입니다. 원래 레위지파 외에는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실인이 되어 어릴 때부터 성막에서 자라며 하나님을 섬기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한나는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인해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를 다시 하나님께 드려버린다면, 결국 그 아이는 한나, 엘가나 집안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한나는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로 인하여 남편의 사랑을 더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나의 이 기도는 더 이상 나에게 아이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나님께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하면, 지금까지 한나가 하나님께 아이를 구했던 모든 이유가 나의 성취와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즉 “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한나는 그 아이를 통해 사회가 말하는 성취의 노예, 남편이 주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태어난 그 자녀를 자신의 무기삼아 보호하며, 다른 이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한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아이를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7-18절을 보면, 그 성막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얘기합니다. 그 때 한나는 본인의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았으나, 그녀는 평안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먹지 않던 밥을 먹었으며,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지금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체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나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세상이 얘기하는데로 ‘다산’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세웠다면,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녀 이제는 자신을 위로하여 주는 남편의 사랑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었다면, 그 것 또한 사랑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
이것은 지금 오늘날 우리에게 2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오늘날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무엇인가를 해내라고, 그렇게 성취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 얘기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가치 없으며, 도퇴된 인간이야. 우리가 이것을 때어놓고 보면 잘못된 기준이라는 것, 너무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세상의 기준은 어느샌가 가정에 들어와 자녀를 향해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라고 외칩니다. 이 세상의 기준은 어느샌가 교회 안에 들어와 서로의 가치를 판단하여 신앙이 좋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죠. 그리고 끝내 이 세상의 기준은 내 안에 들어와 나의 가치를 갉아먹습니다. 성취에서 오는 편안함은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거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하게 되면, 다른 이들을 공격하던 그 기준들이 나를 향해 드리밀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수순이에요
그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유혹에 빠집니다. 자연스럽게 심리적인 안정을 찾고자 다른 이들을 찾습니다. 가까운 이들은 다른 이들을 욕하면서 우리 편에 서주고, 우리의 마음을 위로 해줍니다. 사랑이 주는 편안함은 너무나도 안정적이죠. 마음을 위로해주는 한 사람, 친구, 가족이 있다는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 가까운 이의 사랑과 위로로 인해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다면, 가까운 이의 사랑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된다면, 아무리 고귀한 사랑도 결국 헛된 만족을 누리게 하는 우상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놓여진 길은 우리를 잡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겪는 고통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한나를 보세요. 만일 그녀가 자식이 있고, 브닌나의 조롱이 없었다면, 과연 그녀가 하나님께로 갔을까요? 그녀가 이토록 큰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을까요? 하나님을 믿기는 했어도 그토록 헌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본인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사람 한명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물론 한나는 그 크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겪게 하신 그 고통으로 인해 그녀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결핍의 문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어둠 속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말리기 선지자 이후 400년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으나, 그 끝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고통의 문제, 하나님의 부재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현재 우리 대흥교회는 참으로 평범하지 않은 시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상황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구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담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를 담고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사람의 말과 위로를 통해 평안을 누리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안을 누리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함께 찬양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의 얼굴만 구하리.
이 시간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기도합니까? 그런데 그 안에 세상의 기준대로 나의 유익만을 위하여 기도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오니,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기도가 세상의 주는 만족과 유익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는 기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 시간 다 같이 주님 한 번 부르짖고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흥교회의 예배와 교회 사역, 담임목사 청빙 절차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다음세대를 위하여
고3을 비롯한 청소년부 아이들이 세상 문화에 분별력을 갖게 하시고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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