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를 바라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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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받을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2장 1-8절 말씀입니다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제목: 향유를 바라보는 시선
서론
여러분 혹시 ‘프레임’이라는 단어를 아나요? 영화 필름 한 장, 또는 한 장면을 의미합니다. 또한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만든 직사각형을 통해서 보는 것도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앞에 한 TV를 통해서 보이고 있는 그림은 왼쪽 사람이 오른쪽 사람을 찌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진짜 모습은 오른쪽 사람이 칼을 들고 왼쪽 사람을 찌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레임이 씌워지니까, 원래 모습과는 상관없는 정반대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4명이 나란히 서 있어도 프레임에 3명만 담으면 1명은 없는 사람이 된다. 특정인을 프레임 중앙에 배치하면 주인공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똑같은 그림에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프레임을 씌우고 그 프레임을 통해서 바라보냐에 따라서 수많은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이 프레임은 영상, 그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이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안경과 같습니다. 그 안경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험한 것들과 우리의 생각을 토대로 만든 마음의 안경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빨간색 안경을 쓰고 있으면 어떤 것을 보아도 빨간색으로 보이고 내가 보라색 안경을 쓰고 있으면 보라색으로만 보여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의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상과 인생은 완전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온 한 여인, 마리아와 예수님과 오랜시간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둘다 똑같은 향유 옥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제자들은 마음의 다른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프레임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마리아와 제자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지만, 서로의 행동은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들은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 중 어떤 프레임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유월절이 시작되기 6일 전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여집니다. 그 동네에 살던 나사로와 나사로의 남매들도 왔습니다. 여기서 소개되는 나사로는 죽었다가 3일 만에 예수님께서 살리신 그 나사로입니다. 그 남매 중 언니였던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마리아가 식사하시는 예수의 발 앞에 나아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서 그 발에 향유를 붓고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향유 옥합이 무엇이냐면, 그 때 이스라엘은 여자들이 값비싼 향유를 사서 옥합에 모아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팔아서 사용하기도 했죠. 또한 시신에 바르거나 귀한 손님이 집에 왔을 때 머리나 발에 부어 예의를 표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향유 중에서도 오늘 마리아가 바친 ‘순전한 나드’ 이 향유는 향나무 뿌리에서 추출한 아주 비싼 향유였다.
마리아의 세 남매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마리아가 옥합을 깼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 즉 결혼을 위해서 지금까지 평생토록 모아놓은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린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죠. 하지만 기쁨으로 그녀는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옆에서 본 제자들은 분개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배반할 가룟 유다가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에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을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향유를 낭비하는가?"
그 향유의 값은 300데나리온 정도의 가격이었습니다. 저번주에 배웠는데 한 데나리온이 얼마였죠?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300데나리온은 1년 품삯이에요. 즉 최소한 2천만원입니다. 제자들의 프레임으로 그 향유를 바라보면, 1년 품삯을 아무 곳에도 사용하지 못하고 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 여인의 행위가 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이 낭비로만 보였다. 특히 가룟 유다는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고 낭비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향유를 팔아다가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면 꽤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죠.
하지만 사실 가룟유다는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가룟유다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돈을 맡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맡아서 하고 있었죠. 그런데 사실 가룟유다는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돈이 생기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그 돈을 훔쳤던 사람이에요. 가룟유다는 2천만원이라는 큰 돈이 생기면 내가 조금 챙겨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사고 배불리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내 것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2천만원이나 하는 비싼 향유가 자신의 눈 앞에서 박살남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분노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가난한 여인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을 하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 향유 옥합을 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이 잘못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 있어야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할 수 업을 것이야, 나는 돈이 있으니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이것은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돈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있어서 돈의 힘이 커지기 시작하면, 무엇을 보든지 간에 돈으로 보이게 됩니다.
한 친구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줬다고 합시다. 그 친구가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 나에게 어떤게 필요한지 나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어떤 게 좋을지 엄청난 고심 끝에 선물을 골라요.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쁘게 포장해서 나에게 선물을 줬습니다. 굉장히 감동스럽죠. 그런데 여러분이 ‘돈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선물에 담긴 의미와 사랑을 놓치고 그 선물의 가격만 신경쓰게 됩니다. 물론 상대방이 선물해준 거니까 가격이 알고 싶을 수 있죠. 그런데 그 가격만 보고, 상대방의 사랑의 크기를 정해버린다면, 어느샌가 나도 ‘돈의 프레임으로’ 사람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룟유다는 향유 옥합을 ‘돈의 프레임’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얘기해주지 않는 향유 옥합이 가지고 있는 의미, 여인이 나와서 향유 옥합을 예수님에게 뿌리는 것에 담긴 의미들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마리아는 그 향유 옥합을 ‘다른 프레임’으로 보았습니다. 어떤 프레임이냐,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는 의미로서의 프레임입니다. 돈의 프레임이 아니라, 의미의 프레임. 예수님께서 7절에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깨트리고 예수님께 뿌리는 것은 다름 아닌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향유 옥합이 어떤 때에 쓰인다고 했죠? 결혼 지참금으로 필요할 때에 팔아서 쓴다고 했죠. 그런데 그 것만 있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시신에 바른다고 했어요. 시신에는 시체 썩은내가 나니까, 시신의 썩은내를 감추기 위해서 아주 향기로운 향유를 바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곧 죽으시실 것을 알고 미리 향유를 발랐던 것이었습니다. 향유를 돈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시는데, 내가 해드릴 것이 없을까.. 내가 무엇을 해드려야하지? 깊이 고민한 끝에 예수님의 죽음 앞에 내가 가진 향유로 준비 해드려야겠다. 내가 가진 향유를 돈의 액수로 보지 않고, 예수님께 발라드리는 행위의 의미로 바라보았습니다.
가룟유다는 향유 옥합을 볼 때에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돈의 프레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전달하기 위해 의미의 프레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돈의 프레임인가, 의미의 프레임인가. 여러분은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쇼.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마리아보다 먼저 더 자세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태복음 16장 21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을 것에 대해서 수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생각했을 때에 예수님은 절대로 죽으시면 안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2-23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한낱 제자였던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께 항변을 합니다. 이 항변이라는 단어는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면서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뭐하시는거에요. 지금 정신줄 놓으신거 아니에요? 똑바로 정신 차리세요. 지금 몬 소리하시는거에요. 설마 포기하신 거에요?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스승이고 우리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야 하는 분인데, 도대체 왜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네버, 내 이름을 걸고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 일을 막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그 말을 믿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죠. 제자들은 수 없이 들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프레임을 벗어나는 밖의 이야기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른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분이시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였습니다. 자신의 전부였던 향유를 예수님께 붓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향유 옥합을 가져온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행동을 ‘좋은 일’이라고 칭하십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 위로받고 계십니다.
전도사님이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한 모임에서 이런 주제로 나눴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물어서 한 가지 알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물어볼래요? 어떤 친구는 로또 번호 물어본다고 했어요. 아주 정확한 돈의 프레임이죠?ㅋㅋ 그런데 그 모임을 인도하시던 목사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다.
저번에 한 번 나눴는데, 우리는 불확실할 때 굉장히 불안해지죠.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나? 하나님 이 길 계속 걸어가는 것 진짜 하나님의 뜻인가요? 너무나도 걱정되죠. 어떤 학교 가야지? 내가 인문계 가야하나, 특성화 가야하나. 문과 가야하나, 이과 가야하나. 수 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딱 이야기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속이 뻥 뚤린 듯이 시원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딱 이렇게 해! 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때로는 상황을 통해서,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기도를 통해서, 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민을 안 하셨을까요?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그 말이 예수님에게도 고민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죽음도 순종하겠지만,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내가 죽어야 할 날짜가 얼마 안 남은거 같은데 벌써 맞나? 제자들의 꼬라지 보니까 아직 한참 남은 거 같은데.. 내가 죽어야만 하는 일인거 알지만,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이겠죠?
이런 예수님의 마음에 마리아를 통해서 위로를 하십니다. 마리아가 하는 행동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으심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아!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자가 있구나, 이 제자들은 아직도 돈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마리아야 너는 의미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구나.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나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알겠다.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맞구나. 내가 가야할 길, 방향이 맞구나.
제자들의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선택한 돈의 프레임이 아니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의미의 프레임으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로 받았습니다. 돈의 프레임, 의미의 프레임.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리아는 똑같은 향유 옥합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과 마리아가 똑같이 예수님을 바라보았지만 제자들이 원하는 모습의 예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토록 같은 것을 보았지만 달랐던 이유는 제자들의 프레임과 마리아의 프레임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처럼 우리 또한 프레임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결코 아무도 프레임 없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내가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려 해도 우리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방향의 프레임을 쓰길 원합니다. 왜곡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올바르게 받아드려 다른 사람에게 위로하는 프레임이길 원합니다.
이번 주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주일이죠. 그리고나서 내일부터는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늘 찬양팀과 함께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찬양할 때, 누군가는 멜로디만 따라하면서 흥얼거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사를 묵상하며,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누군가는 의례 있었던 행사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하게 돌아오는 부활절을 맞이하겠죠. 하지만 누군가는 고난주간 특별 새벽 기도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다음 주의 부활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제자들의 프레임을 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왜곡해서 바라보지 않고,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프레임은 우리의 선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전도사님이 대학생 시절에 동아리의 대표로 있었어요. 하루는 동아리원들이랑 같이 어떤 활동을 하러 갔는데, 너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그러니까 옆에 계시던 목사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대표가 얼굴이 굳어 있으면 쓰나, 일단 기분을 좋게 하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살짝 어이 없는 거에요. 나는 진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사실 기분이 더 안 좋아졌죠. 뭐 어떻게 기분 좋게 하라는거지? 근데 목사님 말대로 일부러 조금씩 대화에 참여하고 의도적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알겠더라고요. 웃을 수 있는데 웃지 않았더라고요. 맞아요. 우리는 자신의 감정조차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상을 보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거에요. 술 취한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이랑 부딪혔어요. 사과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니까 뒤돌아봤는데 자기보다 약한 사람인거에요. 그러니까 쌍욕들을 막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의 친구들이 덩치가 산만한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술 취해 있는데도 갑자기 화가 쏵 사라지죠. 그리고 비굴 모드가 됩니다. 우리는 감정을 상황과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조절을 할 수 있어요. 감정이 그렇듯 프레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을 이렇게 볼 것이야! 그리고 기도합시다. 특히 이번 주에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가 있는데, 내가 지금껏 바라보고 있었던 세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보는 프레임을 보길 원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구합시다. 그러면 그 시야가 열릴 것이에요.
기도제목
나의 시선을 들어 하나님의 시선을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 나를 변화시키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을 통과하여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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