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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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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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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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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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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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22-23절의 말씀입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서론
고양이의 본능(생선)
저번주에 소개 했지만 고양이를 키우는데 2017년 즉 4년전에 데리고 왔다.
그때는 귀여웠는데ㅎ 그러니까 거의 2017년 5월달에 왔으니까 거의 3년 9개월 거의 4년간 온 이후부터 거의 항상 고양이 사료를 먹였다.
추르와 같이 고양이가 환장하는 간식들도 먹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먹는 것은 간이 세서 고양이를 먹이면 안된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참치 통조림도 사람이 먹는 통조림이 아니라, 고양이가 먹는 통조림을 따로 판다고 할 정도니.. 그러니까 사실 우리 집 고양이는 생선 맛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집에서 생선을 먹으려고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굽고 있으면 고양이가 슬금슬금 나와요.
그리고 주변에서 부스러기 하나 안 떨어지나 기다리고 있죠.
왜 이럴까요?
본능적으로 고양이는 맛있는 맛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비록 아직은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내 코를 찌르는 맛있는 냄새와 피부를 콕콕 찌르는 이 알싸한 느낌.
내 혀에 가져다 대면 천국을 맛보리라!! 물론 이 고양이는 경험해보지 못하였지만 ‘이것이 내 인생 푸드다’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죠.
이것이 고양이의 본능이죠.
고양이의 본능에 대해서 잘 나와있는 한가지 영상을 준비했는데요.
고양이의 본능(사냥)
어린 고양이 한마리가 대야에 담긴 메기를 보고 신기해하며 건드려보고 있습니다.
고양이 손 보셨어요?
굉장히 작고 귀엽게 생겼어요.
저는 메기를 상대로 고양이가 장난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도중에 고양이는 본인 몸쪽으로 다가오는 메기를 순식간에 낚아채더니 입으로 물고 도망가죠.
아마 이 영상을 찍던 주인도 깜짝 놀라서 영상을 끄고 고양이에게서 메기를 되찾으러 뛰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요.
이게 무엇인가요.
고양이의 본능이에요.
본능적으로 먹이를 보면 공격하고 잡아서 튀고 혼자서 맛있게 먹겠죠.
새끼 고양이에게 누구도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무엇이 맛있는 것인지, 사냥을 하는 방법들을 본인이 고양이로 태어났을 때에 알고 있는 것이죠.
문제제기(사람의 본능 그리고 올바른 방향)
고양이도 이러한 것처럼,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능이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자 하는 것, 배고플 때에는 밥을 먹고 싶어하는 것, 피곤할 때에는 잠을 자고 싶어하는 것, 배 아플 때에 화장실 가는 것. 이러한 필요한, 필수적인 본능들이 있어요.
그런데 더한 본능이 있어요.
충분히 자고 일어났지만 더 자고 싶고, 충분히 배부르지만 더 먹고 싶고, 충분히 놀았지만 더 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대로만 살지는 않습니다.
졸리다고 잠만자면 시체와 다를바가 없고요.
게임만 하고 싶다고 그대로 하면 방구석 폐인이 되어있죠.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교육과 우리의 절제를 통해서 본능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어갑니다.
이런 여러가지 본능들이 있고, 또 우리는 그 본능을 잘 조절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심어주신 본능이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능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본능을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변화 시키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아덴의 특징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던 도중에 아덴이라는 도시에 도착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변론,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아덴은 어떤 곳이냐, 현재 그리스라는 국가의 수도인 아테네라는 도시에요.
그 당시에 예술, 교육,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어느 정도일지 감이 안 잡힐 것 같아서 여러분이 알만한 사람으로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를 아시나요?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아테네였어요.
그리고 그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아테네에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아테네에는 수 많은 철학자들이 몰려 들어왔습니다.
그런 곳이기에 아덴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요.
그런 사람들이 철학을 하고 또 가르쳤기에 교육의 중심지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요.
아덴의 우상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선교여행을 같이 다니고 있는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아덴 성 안에 우상이 가득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테나라는 전쟁의 여신의 이름을 딴 도시였어요.
그렇다보니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신들이 총망라된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공식적인 우상만 300여개가 되며, 그 우상들의 신상이 3만여 개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것보다 신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라고 얘기할 정도니까요.
아덴의 또 하나의 특징이 예술, 교육 철학의 중심지라고 했잖아요.
뛰어난 예술적인 창조성을 신전, 다른 신을 섬기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아덴 사람들에게 주신 예술적 창조성이 우상 숭배에 사용되는 것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할지 고민하였고 그 분의 이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분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만나는대로 변론을 하였습니다.
철학적 논쟁
그러던 어느 날 아덴에는 철학자들이 많기 떄문에, 사도바울은 철학자들과 쟁론을 하게 됩니다.
다행인 것은 사도 바울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인 논쟁이 붙었을 때에도 사도바울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고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본인이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들을 활용해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러자 아덴의 철학자들은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바울에게 물어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공식적으로 아레오바고 공회 앞에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덴의 종교심
이제 오늘의 본문이 시작되는데요.
22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종교심이 많다.
무슨 뜻일까요?
사도바울이 아덴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보니까 수 많은 제단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특이한 제단이 있었어요.
바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인데요.
이게 뭔 상황인가 하면, 본인들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섬기는데 이런 생각들이 든 거에요 ‘내가 아는 신들만 섬기고 내가 모르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시 그 신이 나에게 분노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결단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모르는 당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사도바울이 그래서 ‘너희는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굉장히 미신적인 모습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러한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는 아덴 사람을 지적하기보다는 그 알지 못하는 신을 참 하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현대인의 종교심
아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심은 그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사람들도 이러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적지를 찾아가거나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오래된 나무에는 신비한 효염이 있다고 해서 줄을 걸어두고, 차곡차곡 쌓아둔 돌 앞에서 절을 하고,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딱히 신은 믿지 않지만 로또를 당첨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거나, 주변에 아픈 사람이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거나 꼭 이뤄져야 하는 일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죠.
이렇게 무엇인가를 필요하고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다른 신들에게,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에게 가지고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종교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하나님을 향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 바로 공허한 기분, 아무리 노력해서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팡세
파스칼의 팡세에 이러한 문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뿐이다’ 우리는 마음 속에 공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본능적으로 그러한 마음을 지우고자 합니다.
누군가는 강렬한 성취,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뤄냄으로, 누군가는 맛있는 것을 먹음으로, 너무 달기만 하거나 짜기만 하면 쉽게 물리니까 단짠단짠으로, 누군가는 재미있는 코미디 영상, 예능 프로그램으로, 누군가는 달달한 로맨스 드라마, 유튜브를 보면서 대리 설렘을 느끼곤 하죠.
그런데 그것을 다하고 나면 어떠합니까?
공허한 마음,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였지만 그러면 어떠합니까, 완전히 다 채워지나요?
아니죠.
멈춤과 동시에 다시 더 큰 공허함이 내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영화는 끝이 존재하고, 유튜브도 새로고침을 하여도 재밌는 것이 나오지 않자, 더 재밌는거 없나? 하면서 새로운 채널을 찾게 되죠.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면 내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건지, 돌아보면 그동안 한 것 없어서 현타가 찾아오죠.
그래서 이제는 똑바로 살아야지?
어떻게 이 빈 마음을 채울까 하지만 어느 새인가 다시 더 큰 즐거움을 찾고, 또 다시 맛있는 것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이냐, 바로 우리의 마음에는 채워져야할 하나님의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덴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신들을 섬기지만 그럼에도 불안하여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겼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그 공간을 채우셔야 불안한 마음,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공허한 마음을 채워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떠한 물건을 만들 때에는 항상 목적이 있게 만드는데요.
절대로 목적이 없이는 어떠한 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의자를 만들 때에는 앉기 위해서이고, 침대를 만든 것은 눕기 위함이죠.
인테리어 용품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이든지 목적에 따라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만들 때에도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겠죠.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곧 그것들의 존재 목적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목적도,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는데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 무엇을 기대하셨나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어요.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셨고요.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단순히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66편 4절에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심지어 생명이 없어 보이는 하늘과 온 땅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합니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아름답게 꾸며 놓은 해와 달과 별, 구름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오신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야.
돌들로 하여금 찬양하도록 할 것이야.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결국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못할 정도로 죄를 지었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인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결단 하였고, 내가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으로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나에게 필요한 하나님으로 짤라서 나만의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 마음에 심겨둔 종교심,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본능을 일깨우어 다시 하나님을 보이십니다.
그런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종교심을 보고 꾸짖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제껏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임을 모르고 즐겁기 위해서 살아가고, 자신의 배만 불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결국 쉽게 사라져버리고 말 허망한 것들을 쫓고 살았느냐?
하지만 이제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리라.
이제 이것을 향해 살아가라.
감사한 것은 26절, 27절의 말씀인데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혹시라도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을까… 마음의 불편함, 공허함으로 인해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열망하는데 도대체 무엇이지?
무엇을 향해 가야하지?
이렇게 혹시라도 더듬거리면서 하나님을 찾으려 할 때에 그들이 발견하게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아담의 자손이라는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와 동떨어진 공간과 시간 속에 사시면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방관하면서 지켜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혹시라도 나에게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멀리 계시지 않고 즉 가까이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배하는 자로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두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허함 가운데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옆에서 찾아오길 기다리시고 다가오십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진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의 공허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시편 105편 3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할 때에 마음이 즐거울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채우려하는 그 공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즐거움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억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좋은 책을 쓴 로렌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의 맨발의 까르멜수도회에서 식당 일을 하는 사람이었던 평수사였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주방보조 역할이었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어갈 때에 누군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로렌스 형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내가 지난 40년 동안 했던 것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것을 할 것입니다’.
상대가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굉장히 큰 사건일 것입니다.
하지만 로렌스 형제는 그러한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것은 별 큰 의미가 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잠시 지나가는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물론 그는 지금 죽었을 것입니다.
1600년대 사람이니까요.
지금 살아있다면 400살이 넘었을테니까요.
그렇지만 죽은 그는 지금도 예배드리고 있을 것이고, 영원토록 예배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에, 천국에 갔을 때에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로렌스 형제가 평생해오던 일을 영원토록 하겠죠.
하나님과 영원히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잠시 시간이 멈춰 주길 바라는 상황,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어떻게든 건수를 만드는 그러한 감정일 것이에요.
또한 함께 있을 때에 내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아주는 마음, 꾸밈 없이 그냥 내 속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그 마음, 바로 공감받는 마음일 것입니다.
내가 굉장히 좋은 곳에 있어도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허름한 곳이라 하여도 같이 있고 싶은 그러한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만 채워지는 마음, 본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품으려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안한 마음이 들어 더 깊이 다른 신들을 열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와 가까이 계시며, 그 뜨거운 종교심으로 본인을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이 시간 같이 찬양 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원이라는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인데 과연 무엇이니?
라고 물어보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바라는 것들이 수 없이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라고 이 찬양의 고백을 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에 하나님, 나의 마음 한편에 공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 것을 채우기 위해 수없이 노력을 해 보았지만 헛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나의 부족함이 있지만, 하나님보다 다른 신들을 쳐다보았지만, 가까이 계시는 주님, 내가 돌아오길 원하시는 주님, 이제는 당신만을 예배하길 원합니다.
나의 유익만을 위해 기도하던 소원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 간절히 원한다는 것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이시간 한번 더 기도했으면 좋겠는데요.
하나님 이시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우리가 마음 모아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실패할 것이 두렵습니다.
내 영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만, 저의 육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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