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하시긴 하십니까?(말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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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어김이 없이 11월이 돌아왔습니다. 11월에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 또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한 밤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인사 한 번 해보실까요? ‘사랑합니다.’
여러분께서 어릴 적 이해하지 못했던 말은 무엇입니까? 저는 어릴 적에 ‘사랑해서 그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는데 부모님께서 혹은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그것을 못 하게 막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불장난 좀 하면 어떻습니까? 밥 대신 과자를 좀 먹으면 어떻습니까? 밤새 컴퓨터를 좀 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가장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어른들이 막는 겁니다. 그들은 저의 자유를 빼앗고는 그 이유를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는 ‘우리 엄마 아빠, 나를 사랑하시기는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게 하는 엄마, 아빠는 진짜 내 엄마, 아빠가 아닐지도 몰라.’ 라는 발칙한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저희 부모님은 저를 그때도 많이 사랑하셨고 지금도 저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멘이십니까? 아멘. 그런데 혹시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기는 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계시기는 한 걸까? 하나님 진짜 내 하나님일까? 라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 사랑하시기는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 사랑하시기는 하시는 겁니까?
오늘 본문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서는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어있을 때에 쓰여졌습니다. 이 때에 고레스라는 페르시아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바벨론과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성전도 다시금 건축할 수 있도록 했고 이로 말미암아서 제 2성전이 건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참 다행인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경고’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경고의 포문을 여는 첫 내용입니다.
2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고 하십니다. 보다 원어적인 해석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고 또 현재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이 어떻게라고 번역된 단어는 ‘언제’, ‘어찌하여’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이 저희를 언제 사랑하셨습니까? 혹은 저희를 사랑하시기는 하십니까? 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바벨론의 포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상황에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면서 자연스레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대에 전쟁의 의미는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 자신들의 신인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과 페르시아의 신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포로생활 중에 이스라엘은 고레스 왕에 의해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다시금 재건하게 됩니다. 이 성전을 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대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아지고 예언되었던 영원한 다윗의 왕국이 재건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유를 찾지 못한 채로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능력이 없는 신, 혹은 능력이 있다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코로나로 인해서 마음껏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 교회를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했을 때에 오히려 눈치를 봐야 하는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하는 의문을 던진 적이 없으십니까? 모든 단계들이 점차 나아지지고 회복되지만 교회에 대한 따가운 시선은 아직 그대로인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코로나라는 특별한 상황을 벗어나서도 세상을 살다가 우리가 무너질 때에, 내가 뜻하는 대로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고난으로 내 삶이 꽉 차 있는 것 같을 때에 하나님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는 의문을 던진 적은 없으십니까? 내가 하나님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왜 침묵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을 던진 적은 없으십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에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언제요? 저희를 사랑하시기는 하십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창세기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정체성으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야곱과 에서는 아시다시피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들입니다. 형이 에서고 동생이 야곱입니다.
여러분, 형과 동생 중에서 누가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까? 당연히 형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도 장자 즉, 첫 아들이 가장 큰 권리를 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을 동생인 야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근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연관성이 있기 때문인데요, 하나님께서 주신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며 그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야곱이 에서와 다른 점이 있어서였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9장 11-13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데에는 어떤 인간적인 이유도 없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실제로 우리가 야곱의 삶을 살펴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속임수를 쓴다거나 하는 등 에서와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어떠함을 보고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은혜로, 긍휼로 야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그냥 미워하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당연히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후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존재들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에서는 이 죄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줍니다. 히브리서 12장 16-17절을 보실까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죄가 있는 인간은 정작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당장의 필요나 육체의 쾌락만을 쫓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여러분 요즘 웃어넘기는 말로 돈이 많으면 형이고 누나라고 합니다. 밥 사주는 사람이 형이고 누나라고 합니다. 에서의 행동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장자권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면 당연히 나의 배고픔이 더 커 보였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이 장자권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비정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야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을, 에서에게 에돔이라는 왕국을 주시고 각 왕국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세월이 지나고 역사가 흐르면서 모든 나라가 그렇듯 이스라엘과 에돔도 흥망성쇠의 길을 걷습니다. 두 왕국은 모두 주변의 나라들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두 왕국 모두 무너진 자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 마침내 회복되는 나라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금도 잘 알지만, 에돔이라는 나라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문 4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은 이스라엘이 바라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엄청난 군사력과 영향력을 가진 나라로 이스라엘을 세워주셔서 모든 열방이 이스라엘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또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다윗과 그의 자손에 의해서 통치되어지는 나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자유해보이지만 자유가 없고 부유하지도 않고 변변찮은 영향력을 가진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망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회복하셨고 또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에돔과 같이 이스라엘이 본실상 진노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회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조금도 합당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또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분명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다윗의 자손에 의해서 통치되어지는 나라는 구약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신약에 들어와 실제로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모습을 빗대어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신 여러분, 우리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요, 이삭의 자녀요, 야곱의 자녀임을 고백하십니까? 아멘. 본질 상 진노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미움을 받을 대상이었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께서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사셨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우리가 한없이 연약하고 죄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무너진 폐허와도 같은 삶,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삶에서 다시금 힘을 얻고 소망을 얻어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더욱 이 믿음을 더욱 굳세게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 믿음, 이 사랑, 이 소망이 다른 어떠한 것으로 인해서 옅어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기를 진심을 담아 소망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항상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면 좋겠지만, 여러 상황이나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우리는 무너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께서 무능력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며 나를 사랑하기는 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 회복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에돔은, 세상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여 죽겠지만, 우리는, 저와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지고 지친 이스라엘을 향해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의 능력의 하나님, 말씀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를 씻겨주시고 기름을 바르시고 수놓은 옷을 입히시고 패물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무너질지라도, 무너짐 속에서 세우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뒤이어 우리는 어느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예비 된 영원한 천국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증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증거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사랑하기는 하냐는 이스라엘의 물음에 야곱과 에서를 말씀하시며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한 증거가 무엇이 있을 지 한 번 살펴보고 또 이 증거가 우리에게는 어떤 유익이 되는지를 살펴본 뒤에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서 너희를 사랑한다고 선언해주시고 계십니다. 야곱과 에서를 예로 들어 이스라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 그리고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찬양 들어보셨습니까? 그 찬양의 후렴구는 이렇습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이스라엘이 말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 삶이 사랑받기 합당해서가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데도 불구하고 철저한 그분의 은혜와 긍휼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어떻게 사랑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땅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뒤 나라를 잃었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땅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십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완전히 멸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과 함께 자신을 회복시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비난의 말들과 원망의 말들을 쏟아놓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멸망하게 두시지 않으십니다. 시편 73편에 기자는 하나님을 향해 왜 악인들이 잘 되고 형통한지에 대해 물으며 자신이 시험에 들 뻔 하였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같지 않습니까? 또 마치 저희와 같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편하고 또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지요. 하지만 이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에돔을 멸망시키심과 같이 사랑하는 자들을 회복시키시고 미워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위기 속에 처해있을 때마다 역사를 한 번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들은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또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또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구원을 경험하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 대신에 천국백성으로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두 번째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서 있는 땅에 무너진 성전이 재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시며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에 예배가 회복되었음을 말해줍니다. 학개 선지자는 이 재건된 성전을 보며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예언과 함께 평강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의 재건은 매우 큰 의미였을 것입니다.
말씀을 한 구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스라엘이 세운 이 두 번째 성전은 로마의 침략으로 인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무너진 성전을 삼 일 만에 세우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전의 중요성은 랜드마크나 상징이 아닙니다. 성전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거하셨고 예배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그분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 가운데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 모이신 주님의 존귀한 백성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인 분들이심을 믿습니다. 아멘. 성전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각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움직이는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어디에서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세 번째 증거입니다.
결론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속 이스라엘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고난과 도저히 나아질 것 같지 않는 현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을 의심하며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따라갈 때에, 그들은 나를 사랑하기는 하십니까? 라는 물음대신 이스라엘 밖에서도 여호와께서는 크시다라고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세상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이 썩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그 능력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돌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으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의 예배와 삶을 더욱 소중히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말씀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의지하여 우리를 통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또 확신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이 그러하였듯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에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시기는 하시는지, 나의 가족을, 나의 교회를, 나의 나라를 사랑하시기는 하시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로 말미암아서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 가운데 확증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의심대신에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고난이고 여전히 아픔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하여 주소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사랑을 누리는 존귀한 동서울 광염교회의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밤 교회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각자의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또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있고 수험생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