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에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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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받을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입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설교 제목: 교회의 에티켓
서론
여러분 2주에 걸쳐 특별 예배를 진행하고 있는데, 저번 주 말씀 기억나나요? 어떤 말씀이었죠? 하나님께서 각 개인을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성전으로 부르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의 삶을 보았을 때에 너무나도 부끄럽고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 찾아오신 예수님, 즉 성령님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들으니 새록새록 기억 날 것이에요. 저번주는 각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심. 교회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공동체 게임을 통해서 친구들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서로를 맞추기도 하고 선생님의 어린 시절의 사진을 살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서로에 대해서 다 알았다 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자신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겠죠.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본인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들도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사님이 군대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한 번 하려고 합니다. 군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지내요. 계속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의견 차이로 인해서 많이들 싸우기도 합니다. 전도사님이 같이 군대에 있던 친구들과 싸웠던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고된 일을 마치고 밤에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근데 자고 있는데 한 친구가 깨우는 거에요. 되게 많이 짜증을 내면서 저를 깨웠어요. 일단 자다가 일어나서 기분은 좋지 않지만 일어났습니다. 전도사님이 코고는게 엄청 심하단 말이에요. 근데 다른 날들은 친구들이 그냥 넘어갔는데, 그 날은 유독 엄청 커가지고 나를 깨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태가 된거에요.
그래서 막 전도사님을 열심히 깨웠어요. 근데 전도사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를 대기만 하면 잠에 들고, 잠에 한 번 깊이 들면 누가 엎어가도 깨지 않을 정도로 밤귀가 어두웠어요. 그러니까 전도사님 친구가 코 골고 있는 전도사님을 아무리 흔들고 깨워도 도저히 일어나지 않는거에요. 계속 잠에서 깨지 않고 코는 계속 골았죠. 전도사님 옆에서 자는 친구가 잠귀가 엄청 밝은 친구여서 진짜 때려가며 깨웠어요. 그래서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어요. 근데 그 친구가 잠들기 전에 전도사님이 먼저 잠들었어요.
아무튼 이것으로 너무 힘들어하던 같은 방을 쓰던 친구들이 건의를 했어요. 그래서 전도사님은 따로 격리되어서 매일 밤에 간이식 침대를 펼쳤다가 아침이 되면 침대를 접었다 하면서 잠을 잤습니다. 매일 같이 이불을 개는 것도 귀찮은데, 침대를 폈다 접으며 거의 11개월 가량을 굉장히 불편하게 보냈습니다.
사실 전도사님도 코 곤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코 고는지 몰랐습니다. 사실 어떻게 알겠어요. 잠을 자야만 들을 수 있는 코 골이인데, 잠을 자면 내 코골이를 스스로 들을 수 없잖아요. 이런 것처럼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 해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혼자서 등을 긁어도 시원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도움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더 올바르게 알게 됩니다.
잠언 27장 17절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친구들끼리 같이 있다보면, 물론 우리는 말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죠. 그래서 상처받은 상대방은 또 나에게 서운해서 상처되는 말을 막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친구들과 싸우기도 하죠. 하지만 그러면서 나는 내가 실수한 부분들을 보게 되면서 상대방을 위해서 고쳐갑니다. 나의 이런 부분은 고쳐져야 하는구나, 나의 이런 부분이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구나. 이렇게 우리는 관계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고 배워가며 성장하게 됩니다.
저번 주에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심을 통해 각자를 그리스도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번주에 살펴본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 16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부르심과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사도바울과 고린도교회는 꽤 먼 거리를 떨어져 있습니다.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고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도 어떻게 우리라고 하며,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입니까.
에베소서 4장 4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이들은 지금 꽤 먼거리를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하나이시기에,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동체이며 지금 그들은 친구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잘못된 길인지,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우리가 어둠 속에 오래 있다보면 어둠이 익숙해져서 그것이 어둠인지 모르는 것처럼, 이들도 오랜 시간 죄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죄 가운데 있는지 몰랐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처럼 자신의 죄와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들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올바르게 보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가 우상과 일치되려 하지 않느냐. 돌아보아라.
자신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 점검하고 돌아보아도 내 눈에서는 내가 보는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주변 친구들, 공동체의 일원들이 내가 보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살펴볼 교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서 성장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론
모이기를 힘씀
히브리서 10장 25절,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모이기를 권하’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어떤 사람들에게 보냈을까요? 물론 잘 모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지금 모이고 있는 것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잘 모이라고 이렇게 보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잘 모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보다 모여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더 맞는 상황일 것이에요. 왜냐하면, 말씀의 앞 부분을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말라. 즉 지금 누군가가 모임을 취소하고 모이는 것을 방해하여 모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냐면, 박해가 매우 심했을 때입니다. 모이는 것이 들키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거죠.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알아차리면 나를 잡아가라고 고발하는 상황이에요. 그렇기에 모이는 것이 어려워지죠. 이렇게 자연스럽게 모이지 못하게 됩니다.
모이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피부로 와닸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박해 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내가 박해 받을 것을 생각하면 모이는 것을 당연히 피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모이지만 않아도 발목 잡힐 일이 없었을테니까요. 그렇기에 점점 서로 모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사도바울과 고린도교회가 떨어져 있었죠. 하지만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되도록 함께 모이는 편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모이지 않을 때, 우리는 둔해지고,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지고, 서로를 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우리도 떨어져서 예배 드릴 수 있죠. 하지만 될 수 있다면, 안전하다면 최선을 다해 함께 모여야 합니다.
환경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두명의 사람을 비교할 텐데요. 성장하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지만 성장할 생각이 없는 사람과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지만 성장하고 싶어하는 사람,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성장할 가능성이 클까요? 쉽게 예를 들어볼게요. 챌린져 프로게이머에게 설렁설렁 배우는 사람과 실버에게 모든 것을 열심히 배우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성장할 것 같습니까?
혹시 ‘맹모삼천지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키울 때 3번이나 이사를 했다고해서 생겨난 말 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맹자는 자나깨나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소리를 들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놀때도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흉내내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맹자를 데리고 시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맹자가 매일 장사하는 모습을 흉내내었다고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곳에 와서야 맹자는 글을 읽으며 훌륭하게 자랐다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 있는 것, 이것이 성장에 굉장히 큰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여러분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나요? 사실 쉽게 흐트러지곤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더 편한 자세를 찾게 되고 조금만 더 하면서 다시 눕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불편함이 아닌 편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 조차도, 믿음생활 조차도 조금 더 편하게 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환경, 함께하는 공동체,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나 혼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분명히 우리는 넘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낙심하거나 배교자가 되지 않도록 서로를 감시하고 격려하고 훈계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 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하는 주변 환경을 통해 나를 점검하고 다시 앞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힘써 모일 것을 강조하십니다.
히브리서를 쓸 때 당시의 배경이 박해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써 모일 것을 요청했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모일 것을 요청하나요?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다고 했을 때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었냐면 초대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얼마 안되서 성령님을 받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이미지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46-47절 말씀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 교인들은 지금 뭐하고 있나요?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날마다 모여 성전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근데, 표현이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굳이 앞에 떡을 떼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떡을 떼는 것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나에게 줄만큼의 있나요? 넵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만찬을 드실 때에 떡을 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26장 26절에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주 메뉴가 떡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떡을 찢어서 나눠 먹었어요. 근데 밥을 먹기 위해 떡을 뗄 떼마다, 떡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과 먹었던 마지막 식사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 가운데 떡을 떼시는 장면이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억하죠.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교회는 집에 모여서 떡을 뗄 떼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을 묵상했습니다. ‘나 때문에 죽으셨지, 나를 위해서 죽으셨지.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기에서 죽으셨어. 그러니까 내가 이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지’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모여서 함께 떡을 뗄떼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묵상했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푹 절여졌습니다.
전도사님이 고등학생 때에 위클래스에서 하는 또래 상담사를 했어요. 혹시 그 나이에 무엇을 알아서 다른 친구들을 상담했겠습니까. 대단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똑똑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마음 하나로 또래 상담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계신 상담 선생님께서 새롭게 상담사가 된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셨어요. 만약에 어떤 친구가 상담을 지속적으로 하는데, 스스로 어떤 것을 하기로 결정했다. 근데 그 친구가 막 못하고 있다고 너무 푸시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오면, 상대방은 나의 얼굴만 봐도 자신이 하기로 한 숙제가 떠오른다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너무 푸시했을 때, 상대방이 미안한 마음에 관계를 끊어버리고 더 나은 모습으로 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신앙 생활 하던 친구들, 함께 하나님 붙잡아 보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같이 예배했던 믿음의 동역자들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자신의 엉망징창인 모습이 보이고, 다시 그러한 은혜를 사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잖아요. 박해로 인해서 모이지 못하니, 안타까움은 있지만 몸이 편하니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살아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시 모여서 얼굴보면 그것 자체로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구나, 잊어버렸던 은혜를 기억하게 됩니다. 다시 얼굴을 보며 함께 떡을 뗄 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찢기셨구나,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힘써 모일 때에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하나됨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의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로께 연결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한 겨울을 지나서 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기온이 올라가면서 덜 추워졌어요. 그런데 한 겨울 1월 중순 쯤에 여러분 어떻게 길을 걸어다녔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우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놓고 걸어가요. 그런데 그렇게 걸어가다가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나요? 진짜로 엄청 크게 다쳐요. 손 넣고 다니다가 넘어지면 손으로 충격을 완화시키지도 못하죠. 진짜 위험합니다. 근데 하루는 여러분이 자갈 밭에서 걷고 있는데, 발이 꼬여서 넘어지려고 해요. 얼른 손으로 땅을 짚으며 보호하려고 하는데, 손이 갑자기 말을 안 듣는거에요. ‘잠깐만, 내가 잘 못한게 아니라 발이 잘못했는데, 이대로 땅에 손을 대면, 내가 까지겠는데?’ 이렇게 갑자기 지 갈길을 가는거에요. 사실 발이 잘못 한 것은 맞지만 손이 피해를 줄이지 않으면 다른 몸이 훨씬 크게 다친단 말이죠. 근데 손이 자신은 잘못 없다며, 책임지지 않고 고통을 같이 덜지 않으려 합니다. 이건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사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서 손이 조금 까지는 한이 있더라도 몸을 보호합니다. 결국 손이 조금 까지지 않으면 몸은 더 많은 피를 흘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내 옆의 지체를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지 않는다면,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옆에 지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말씀을 우리를 향해 사랑해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너희는 꼭 서로 사랑해라.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사랑을 베풀 줄 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받고자만 한다. 사랑을 받고자 여러가지 방법으로 떼를 쓴다. 나를 봐달라, 나도 특별한 존재라고, 나도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세요!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 사랑을 받게 되어도 항상 사랑을 간구합니다. 내가 실수하면, 나를 떠날까 두려워 하고, 내가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못하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 많이 수용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가정에서 친구들에게서 무엇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해주는 것. 우리가 해야할 가장 큰 숙제이다.
근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사랑할 만한 자격도 없고, 사랑할 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도 수준 낮은 사랑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실천 할 수 있게 먼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안에서 서로 실천하도록 하십니다.
근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사랑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연합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내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손을 내밀어 내 손에서 피가 나며 피부가 까지면서 몸을 보호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전부 내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만 놓고 보면 그냥 손을 갑자기 꺼내서 상처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행동들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던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알게 되면, 사랑을 하게 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냥 눈 딱 한번만 감으면, 딱 한 번만 감으면 자기 편한대로 살아갈 수 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 한 몸된 지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사랑을 실천할 때에, 세상은 나를 보고 처음에는 저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야! 하고 욕을 하지만, 그 사랑의 진가를 맛보고 나서는 그 사랑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진짜 사랑하는데 너가 잘못한 거 너가 다 해결하고 와. 이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어떤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믿고 맡겼어요. 그런데 그 일을 하다가 진짜 큰 실수 한거에요. 그러면 대신 책임 져주는 것.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쳐했을 때에, 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책임져야할 의무가 없을 때에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을 때, 대신 책임지는 것. 전도사님이 운전을 되게 못하다가 운전에 맞들리고 나 진짜 운전 잘한다..! 자뻑이 심할 때가 있었다. 하루는 무리해서 다른 사람들을 굉장히 먼데 다 데려다 주고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는데 주차를 하다가 차 앞에 범퍼를 부셔뜨렸다. 와.. 진짜 멘붕이었는데, 어떻게 해결 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그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께서 들으시더니, 먼저 내 몸을 먼저 확인하시고 쫙 확인하시더니 멘탈 나가있는 나에게 그정도면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주시고 다음날까지 완벽하게 고쳐주셨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청소년부가 서로를 사랑하여 책임지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서 한 아이가 아파하면 내 책임이다 생각하여, 가슴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겪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 진짜 사랑하여, 책임지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혼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랑했으면 좋겠다. 혼자서 사랑하면, 패할 것입니다만 두 사람이 함께 사랑하면 능히 당하고, 세 사람이 함께 하면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좌절되고 말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책임지고 사랑하는 그 사역을 함께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을 전달하는 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힘써 모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성령을 주셨고,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를 챙기고, 서로를 책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코로나로 인해 교회, 공동체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우리는 개인플래이 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살아남아 1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여 행복을 경험할 자들이에요.
서로를 책임지기 위해서 내가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길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돌아섰던 영역이 있다면 겸허하게 하나님의 꾸짖으심에 응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을 여호와께 돌이키길 원하노니, 하나님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더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회복이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마음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격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배의 회복이 있길 원합니다. 힘써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말씀을 묵상했던 것처럼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에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삶이 변화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 예배 이후 모든 예배가 매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삶의 예배를 회복하길 원합니다. 나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도, 쉬는 것도, 잠 자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 되게 하옵소서,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우리 공동체가 예배에 목숨을 거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교역자부터 선생님,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예배 하나에 목숨 걸기 원합니다. 한 주를 예배를 준비하며, 예배를 위해 기도하며, 예배 드리며 단 하나의 목적 예배를 위해 살아가게 하옵소서
서로를 책임지길 원합니다. 나의 마음에는 나를 향한 사랑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기는 하나님꼐서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 말씀에 순종하길 원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옵소서, 서로를 책임지려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로 만나게 하셨고, 하나님꼐서 부르신 삶의 자리에서의 길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중1 유초등부에서 새로운 학년으로 넘어옴.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 중학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중 2-3 중2는 올라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중3는 특히 사람이 없음. 리더 역할을 감당하도록.
고1-2 경쟁 속에 들어감. 하나님이 중요함을 알지만 바빠지는 다른 친구들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도록
고3 수능과 취업을 앞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신뢰하도록, 하나님이 인생의 산보다 크심을 인정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