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에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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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받을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말씀입니다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설교 제목: 그리스도인의 에티켓
서론
여러분 집 ‘개인적인 장소’가 있는 친구. 많은 청소년들이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고 싶어한다. 프라이버시 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개인적인 공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간을 갖으려 한다.
힙합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할렘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거나, 후드티를 덮고 있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만의 공간을 누리지 못하니까 후드티를 깊게 씁니다. 그러면 아주 작은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요. 그곳에서 자신이 편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요즘 여러분이 핸드폰을 제외한다면 어떤 것을 가장 많이 사용하나요? 대부분의 경우 핸드폰과 같이 사이어폰을 많이 사용할 것이에요. 이어폰을 착용하는 이유는? 그냥 노래를 듣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한편으로는 공간을 갖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끼고 음악 소리를 많이 높이면 내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죠. 내가 있는 공간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죠. 다른 사람들이 간섭하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이어폰을 낍니다. 특히 지하철과 같이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어폰을 끼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들의 간섭을 차단하고,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죠. 이것이 우리가 떄때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공간은 사람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라는 상황 때문에 지금도 어딘가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은 아닙니다. 아직도 많은 확진자가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거리두기가 2.5단계일 때 기억나나요? 그때는 카페도 테이크 아웃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거에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만나도 어딘가에 앉아서 대화할 수도 없었어요. 밥을 먹는 것 외에는 대화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공원에서 걷는 것 정도…? 진짜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었습니다. 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답답해지죠.
이렇게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간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배 드릴 때에도 공간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맨 앞자리에 가서 예배 드려야 해. 라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누군가는 항상 드리던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익숙해져서 자신의 고정석을 찾기도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드리는 친구들도 자신만의 공간이 있을 것이에요.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공간을 찾아서 드리고 있겠죠. 우리도 이러하지만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본론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한복음 4장 20절)
저번주에 함께 살펴본 말씀이 사마리아 여인이었잖아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대인들이 얘기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얘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너무 싫어해서 그들을 왕따 시켰을까요?
신명기 12장 13-14절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이 바로 이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한 군 대에서만 예배 드리도록 당부하였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얘기하고 있죠. 이제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문화가 잔뜩 세워져 있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그런 문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여호와 하나님만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을 돕기 위해, 회중 예배를 중앙 예배 처소에서만 드리도록 지정하셨던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절대로 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시온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며, 우리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을 망하게 하겠어.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 그 곳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파괴하실 일이 없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떨어트리는 일이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들이 외쳤죠. 평안하다 평안하다.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은 땅에 처박혔음에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 괜찮다 괜찮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 절대로 망할 일이 없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이제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어떠했나요? 그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민망해질 정도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 의해 멸망해버리고 맙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도 남겨놓은 것이 없게 된 채 멸망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 외쳤던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되었고 무너져버렸습니다. 그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보물들도 다 빼앗겨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방나라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매여있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다는 이유로 그곳은 무조건 안전한 곳이다? 이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분도 아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집착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하여 우상숭배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함을 얘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에 있던, 다른 나라에 있던, 어느 곳에 있던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영적인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시간들 속에서도 우리는 영적인 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왕족, 부유한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흔히 이야기하는 전도사님 같은 엘리트들을 데리고 자신의 나라로 끌고 갑니다. 그렇게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바벨론이라는 나라로 끌려 왔지만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그곳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를 질투한 주변 사람들이 다니엘의 흠을 찾다가 도저히 찾지 못하고 한가지 꾀를 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다니엘은 이방나라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니엘 입장에서는 망해버린 조국의 신이었지만, 다니엘은 수 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믿었죠. 다니엘은 하루에 3번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어요.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신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보호하시며, 다니엘을 신고한 사람들이 오히려 죽음에 놓이게 하십니다. 이제껏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이스라엘이라는 장소에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다니엘의 이야기를 통해 보았던 것처럼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의 포로 사건 이후에 포로로 잡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은 조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제는 다시 그곳에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조상들이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 드려야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지정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도 하나님을 직접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방법도,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다른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따로 성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성령이 누구인가요? 작년 11월달에 제자훈련을 마치면서 은별이라는 친구가 간증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었어요. 성령님은 내 안에 찾아오신 예수님입니다. 맞아요. 성령님은 내 안에 찾아오신 예수님이죠.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이 내 안에 찾아오실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찾아와서 함께 하시죠.
그렇다면 내 마음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 즉 성령님께서는 과연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러분 시험볼 때 가장 억울한 게 어떤거에요. 아는데 틀리는 거잖아요. 모르는게 아니라 알고 있는데 생각나지 않아서 틀리는거. 꼭 그런거는 시험 보고 있을 때까지는 하나도 기억 안나다가 답지를 내야 될 때 생각나거나, 답 맞춰볼 때, 아 저 문제 답 4번인데 1번으로 했네. 이렇게 보이죠. 진짜 이럴 때마다 나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가 맞나..? 나는 혹시 금붕어인데 금붕어라는 사실을 까먹은 것이 아닐까
성령님께서는 금붕어와 같은 나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즉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알리신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기억 못할 것을 아시고 성령님께서 필요한 때에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배웠고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살아가죠. 그러한 이유는 배운 것들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꾸준히 했다면 나의 삶을 진작에 180도 바꿨을 만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진작에 들어왔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도 들었던 말씀이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들이죠. 하지만 나는 하지 않던 것들, 내 삶에 적용되지 않던 그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적용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살게하십니다. 그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보이는 것. 그렇게 되려면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계속 생각나야만 합니다.
여러분 하나에 깊이 빠져본 적이 있나요? 전도사님이 어릴 때 이누야샤, 나루토라는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달릴 때, 팔을 흔들며 달리지 않고, 팔을 일자로 쭉 피고 달렸어요. 여러분도 이런 거 있지 않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투를 따라하죠. 그게 가능한 이유가 내 머리 속에서 그것들이 수십번 돌아다니고 계속 생각나는 것이에요. 그렇게 말투나 행동들이 머릿 속에서 계속 생각나면, 그것들이 말로 나오게 되고,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계속 생각나게 되면, 결국 그것이 말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으로 연결되어 나옵니다. 나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다시 읽어볼텐데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 내용입니다. 2가지를 강조하는데요. 첫째,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지 아니하느냐. 둘째,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원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신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꼭 가야만 했던 성전, 어느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이 되어 있던 그 성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내 안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바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 내 안에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내가 과연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성전이 되나요? 아니에요. 깨끗하지 않더라도 나의 삶이 너무나도 부족하여도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하겠죠. 나의 삶을 보면, 너무나 더러워서 하나님의 성전이라 얘기할 수 없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매번 쓰러지고 넘어지는 저를 보면, 저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항구도시인데, 어느 항구도시나 그렇듯 고린도지역도 많은 문화가 섞인 곳입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물건들이 바다를 건너 항구를 통해서 들어오죠. 올 때에 여러 사람들도 함께 오기 때문에 그곳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문화가 섞인 곳이에요. 거기에 항구를 건너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들을 항상 섬기며 넘어옵니다. 왜냐하면 배가 떠있는 바다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거든요.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함 앞에 항해를 떠나는 사람들은 항상 신을 섬기며 신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번 항해에는 절대로 폭풍을 만나지 않게 하소서. 제발 제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이번 항해에 어려움 없게 하소서’ 그렇게 각자 자신이 믿는 신에게, 심지어 믿음이 없는 사람도 죽을 수도 있는 항해에 나설 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항해를 마친 사람들은 고린도라는 항구에서 모였던 것이죠. 그렇기에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는 다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문화들이 섞인 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고린도 성도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혼란들이 있었으며, 그 뿐 아니라 자신이 섬기던 이전 종교 방식들을 가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서는 도덕적인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전에 섬기던 종교처럼 음란한 행위를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서로 베풀며 서로 사랑을 나눠야할 그 교회에서 서로 싸우고, 싸우다 못해서 고소하고 법의 통치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몰랐을까요? 그렇게 엉망진창인 것을 모르고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지 않느냐.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성전이라 칭한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물론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않다면 너희는 깨끗한 성전은 아니겠지, 하지만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성령님이 너희 안에 계시면서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도바울이 우리를 향해서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너희 안에 계신다면, 너희도 하나님의 성전이야, 너희 각 개인이 교회야. 그 이유는 너희가 깨끗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매번 죄를 짓고 넘어지더라도 너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라 칭하신다. 물론 깨끗해져야겠지. 그런데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 하여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교회야. 여기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이야기하고서 더 나아갑니다. 지금까지는 더러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았을 수 있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 깨끗해져야 되지 않겠니?
고린도전서 3장 17절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지금 그것을 위해서 사도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죽음에 처했습니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럽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더럽힌 사람은 끌어내어 돌로 쳐죽였습니다. 이것은 사람 뿐 아니라 동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잘못 성전 가까이에 가서 오물이라도 배설했다면 그것 역시 돌로 쳐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에 물리적으로 더러움을 묻히는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영적인 더럽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됨을 훼손시키는 것 입니다. 영적인 더러움의 예를 하나 들곘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분노하셨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는데,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소와 양을 내 쫓으시고 돈을 엎으시고 그들에게 외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을 예배 해야 할 성전이 지금 돈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였던 성전이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의 돈 버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배할 곳에서 예배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더러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 뿐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더러움은 무엇일까요?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떡진 모습으로 꾀죄죄한 상태인가요? 물론 우리의 모습을 깨끗하게 가꿔야겠죠.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하게 더러운 것은 성령님이 계시는 터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더러운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나를 사랑하는 것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웃조차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사실 나를 너무나도 괴롭히고 있다면 내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겠죠. 그렇기에 나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나쳐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지나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오히려 더럽히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제일 깔끔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겠지만 속을 썩어 들어가고 있겠죠.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에게서 가장 실망하는 부분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 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이지 않길 바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모습을 계속 보게 되죠. 우리가 나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이기적이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웃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손해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누군가는 교회에 전도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어요. 하지만 그 상대가 그것은 조금 어렵다며 교회에 오지 않았어요. 물론 당연히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겠죠. 하지만 많이 서운했는지, 그 사람을 속으로 원망하며 상대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 버리죠. 오히려 상대방은 당황해 하게 됩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으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이기적인 모습인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내게 생각나게 하시는 그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수 없이 말씀하셨지만 지금껏 내가 하고 있지 않던 그것, 오늘은 그것을 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누군가는 친구를 용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일 수 있고요. 누군가는 부모님을 용서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일 수 있는 이유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매번 듣고 멈추고 또 잊어버리지 않고 오늘은 제발 그 말씀하신 그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멈출 때,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히 할 때, 우리의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피곤해도 졸지 않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데, 순종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내게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결단하십쇼.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첫번째 기도제목
이 시간 기도할 때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찾길 원합니다. 나의 슬픈 마음 가지고, 병든 몸과 영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길 원해요. 사실 너무나 오랜시간동안 병 들어 있으면, 내가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까먹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어 버린 몸.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지 않나요.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나에게 있어서 당신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때로는 나혼자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지만 돌아보니 하나님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나에게 찾아와 주시고 나에게 말씀하여 주소서.
두번째 기도제목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이 말했죠. 성령이 너희 안에 있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실상을 보아서 알겠지만 전혀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보다 이방의 신전과 같았죠.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고, 과거의 신을 섬기던 습관대로 하나님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완전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지 않느냐.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지간에, 죄로 뒹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니 깨끗하게 하여라. 이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나의 인생 가운데 너무나도 많은 죄 가 있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불경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얘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나의 인생을 더럽히는 모든 것을 씻어주시옵소서
나의 죄악들을 놓고 하나님꼐 씻겨달라고 다같이 기도합시다.
세번째 기도제목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던 말과 행동들을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계속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이전의 것들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이제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닮게 하옵소서.
네번째 기도제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하지만 제일 어렵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인생을 돌이켜 사랑을 전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사랑을 받고자 할 때에 가장 해야하는 것은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채우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거리며 나 좀 봐줘 할 때에 그 때 일어서 없는 사랑을 쥐어짜 사랑을 베풀 때. 그 때 사랑이 샘솟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