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인가 필레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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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레몬서 1장 18-20절
[도입]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또 예배를 드리며 생각보다 자주 접하게 되는 헬라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뜻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곤 합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 ‘에로스’가 있습니다. 이는 ‘충동적인 성애의 쾌락’을 나타내며 주로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 에로스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써있듯 ‘필레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형제애’를 나타내며 주로 형제사이에 또 친구사이에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이외에도 ‘스트로게’라 하여 부모와 자녀간의 쌓아가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는 아가페와 필레오에 초점을 두고 오늘 본문을 접근하고자 합니다. 아가페와 필레오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 본문이 어디일까요? 오늘 본문이 빌레몬서이기에 ‘빌레몬서가 가장 잘 드러난 본문인거 같아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한 아가페와 필레오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 본문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신 사건이 아닐까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 또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단 한 번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두 번째로 물으시고, 17절에서 세 번째 물으시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대답에서도 변함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아시자나요.’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향해 아가페적 사랑을 하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던 것이지요. 다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향해 필레오적 사랑을 함에 만족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마 상심이 크셨을지도 모릅니다. 이해하기 쉽게 상황을 하나 그려보자면,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의 마음이 식어버렸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에게 묻습니다. ‘너 나 좋아하지?’ 그럼 상대방은 대답합니다. ‘당연히 좋아하지’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마음이 떠났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묻습니다. 사랑하냐고 말입니다. 이 상황이 어쩌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상황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품으시고자 하시는 열망이 있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을 행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 사랑을 모른체합니다. 마지 마음이 떠나고 사랑이 식은 연인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시기가 너무나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시기 말입니다. 코로나로 땡잡은 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분명 예배에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자유가 있다 말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기쁨과 행복 그리고 자유가 줄어들고 점점 고난과 고생이 늘어납니다. ‘조금만 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시기를 통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더 뜨거워진 신앙을 지녀 살아갑니다. 저도 코로나 초기 쉽지 않았습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뛰어다녀야 하는 스타일을 지닌 저에게 갇혀 사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좌절과 지침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신앙의 회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겪고 일어나는 많은 크리스천들 그리고 우리 안디옥교회 청년부에 하나님의 귀한 뜻이 담겨 있고 실천될 것이라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청년부가 차츰 회복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코로나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차츰 회복됨에 따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은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기쁘고 행복합니다. 사역에 열정과 열망의 시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정과 열망이 채워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사랑이 회복됨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식어가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이 떠나면 상대방의 입장보단 나의 입장이 우선시 됩니다. 하지만 사랑이 회복되고 채워지면 상대방의 입장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인 빌레몬서가 그렇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로, 매우 짧지만 어마어마한 사랑이 담긴 서신임을 알게 합니다.
[빌레몬서에서 나타난 전반적 상황]
전반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 있습니다. 편한 육신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리고 빌레몬서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서신의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그에게는 종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잘못을 범한 후 로마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붙잡히게 되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바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완전 변화된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떻게 변화됩니까? 골로새서 4장 9절을 보면 오네시모를 향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도둑놈, 범죄자 오네시모는 이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사도 바울의 아가페 사랑]
그런 그를 향해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과 같이 대변하여 말합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거든 그 모든 것을 사도 바울, 내 이름 앞으로 달아놓으라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갚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행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사랑이 있는데 시간을 전혀 낼 수가 없다던가, 돈은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거짓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해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오네시모가 진 빚을 자신 앞에 달아두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레위기 설교를 통해 알았듯이 빚진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지금 그 빚을 갚아나갈 여력이 없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부터 약 1,500km가 떨어진 로마로 도망쳐 왔습니다. 꽤나 큰 금액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가 훔친 모든 것들을 도망치며 소비하였으니 자신이 빚진 것을 갚아갈 여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희망처럼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빚을 자신이 갚겠다 하니 오네시모 입장에서 얼마나 감사고 소망이고 희망이 됩니까?
이러한 사도 바울의 행동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로 새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원동력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도울 수 있음은 그가 먼저는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받아 그 또한 아가페적 사랑을 베풀고자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베푼 사랑은 필레오가 아닙니다. 아가페입니다.
[빌레몬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아가페 사랑]
그의 사랑은 오네시모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19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는 친필로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왜 빌레몬을 향한 것인가? 로마서 16장 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위대한 복음, 로마서 또한 사도 바울이 구술하고 더디오가 기록했으며, 갈라디아서 6장 11절을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시력이 좋지 않기에 글자를 크게 기록했던 사도 바울이기에, 그가 편지를 쓸만한 육체적 상황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러니 친필로 편지를 기록했음은 그만큼 중요한 사안임을 알게 합니다. 또한 직접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간절함은 친필로 기록함보다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데,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요? 빌레몬도 과거 사도 바울로부터 돈을 빌려 빚진 자라는 것입니까? 그가 사도 바울에게 빚진 것은 무엇입니까? 빌레몬 그가 빚짐은 바로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이미 그들은 만나 복음의 은혜를 누렸던 사이입니다. 즉 빌레몬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준 교사이자 어둠에서 빛으로 길을 안내해준 목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만을 향해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세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을 향해서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
사도 바울의 사랑을 이미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9절을 보니,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사랑으로써 빌레몬을 향해 간구하는 서신이었으며, 16절에서는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라고 기록하며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둘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권면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실천할 사랑]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빌레몬은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접한 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길 소망했습니다. 그 첫 걸음이 바로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용서하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의 믿음의 동역자로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백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사실인데,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과연 우리는 우리가 받고 입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지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느낀 복음을 전하며 지내냐는 것이지요. 사랑을 입은 자, 복음을 전해들은 자는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레오에서 아가페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가 질문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필레오의 사랑을 하는 자이지만, 훗날 그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길 소망하셨습니다. 그 소망을 담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가페입니까? 필레오입니까? ‘나를 사랑하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랑한다’ 대답하지만, 그 대답 안에는 주님을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있습니까? 아니면 우정정도의 사랑이 담겨있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베드로는 훗날 자신이 순교자의 길을 걸으며 필레오에서 아가페로 변하는 사랑의 모습을 실천하였습니다. 베드로 뿐입니까? 날마다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라 설명했던 사랑의 사도 요한도 아가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도 바울 또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희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아가페 사랑,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빌레몬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도 사도 바울로부터 받은 복음에 힘입어 얻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했을까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그 또한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빌레몬서가 성경에 남아있었을 것이며, 이미 빌레몬은 충분히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였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이미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많은 기쁨과 위로를 누렸기 때문에, 충분히 그가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오네시모의 훗날 행보를 보면 빌레몬이 아가페 사랑의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네시모가 감옥으로부터 나온 후 사도 바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빌레몬서가 기록된 후 50년이 지나서는 그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음에 우리는 빌레몬이 사랑을 성실히 실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 삶에 이와같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날마다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믿는 자로써, 복음에 기뻐하는 자로써 기꺼이 아가페 사랑을 가감없이 실천해나가는 귀한 우리 청년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결단의 시간을 갖길 소망합니다.
[합심기도]
Ⅰ.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Ⅱ.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도록
Ⅲ. 청년 공동체의 회복을 넘어 부흥의 주역이 내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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