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중고등]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본문 마11:20-24
제목 은혜를 헛되지 받지 말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을 가장 많이 경험하고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이 고을들은 다른 어떤 고을보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을 많이 보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들었던 곳이다. 하지만 이 고을들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고, 복음에 대해서도 귀를 닫아버렸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고 심판날에 그들이 우상숭배의 도시로 유명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죄악의 대명사로 불리는 소돔보다도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신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그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20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적을 많이 베풀어 주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고라신에서 어떤 권능을 보이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이 없어서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반면 벳새다와 가버나움에서는 여러 권능을 행하셨다.
벳새다에서는 소경과 여러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다. 가버나움에서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셨으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다. 또 귀신들린 자와 중풍병자,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처럼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각종 권능의 이적을 가장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한 지역이었다.
우리는 ‘이적’을 ‘기적’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해석하지만, 성경기자들은 동일하게 해석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이라는 단어를 자연현상을 뛰어넘는 기적으로 혼동하며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서, 사도요한은 ‘이적’이라는 단어 대신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다. 이는 존재하는 뭔가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아직 학생친구들은 경험해 볼 일이 많이 없겠지만, 선생님들은 신용카드로 결재할 때 서명을 하지 않는가?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나의 서명이 있다면 효력이 있다. 그래서 굳이 내가 현장에 없어도, 온라인이나 모바일로도 서명을 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법적 효력이 있는 셈이다.
인기 아이돌의 사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만약 목사님이 아이유의 사인을 갖고 있다, 혹은 블랙핑크의 제니 사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사인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사인의 주인공인 아이유와 제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있으니까 나에게 사인을 해줬겠지.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싸인은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뭔가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표적’도 마찬가지이다. 표적의 중요한 기능은 단지 초자연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놀라운 일들 가운데 우리의 눈에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그 권능을 소유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드러낸다.
본문에서 고라신이나 뱃새다나 가버나움에서 주님은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표적들을 경험하면서 단지 초자연적 현상들에 놀라는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능력으로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철저히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만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적을 많이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표적 중에 가장 놀라운 표적이 무엇인가? 귀신들린 자들이 고침을 받고, 물고기 몇 마리와 떡 몇 덩이로 수천명이 먹었으며, 아픈 자들이 치유되는 것들도 물론 놀라운 표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표적, 가장 최고의 표적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표적을 보이셨는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리고 그렇게 장사되신 지 3일만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표적이 어디있겠는가?
마12장을 보면 이런 놀라운 표적들을 보면서도 더 나은 표적, 더 탁월한 표적, 내가 혹 할만한 더 큰 표적, 하늘로부터 임하는 다른 표적들을 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주님께서도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더 탁월한 표적을 요구하는 완악한 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표적으로 ‘부활'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장사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의 부활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도 은혜이고, 그 부활에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도 은혜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우리가 주변을 가만히 보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합당히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꼭 맞을 만큼 받은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의 사람인가? 사도 바울은 고후6:1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중고등부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질문한다. 여러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영접하였는가?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로운 존재임을 믿으시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예비된 줄로 확신하는가? 우리 중에는 이러한 믿음으로 확고하게 세워져가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아직 굳건한 믿음에 서지 못한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친구들은 들으라.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서 굳건한 믿음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부지런히 예배의 자리에 임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수단이 바로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그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주시기 때문이다. 그 영생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의 자리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그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뿌려지고 그것들이 믿음으로 자라갈 수 있도록 말씀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그 무엇도 빼앗지 못할 믿음의 확신을 주실 것이다.
또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여러분들도 들으라. 하나님께서 날마다 크신 은혜로 여러분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심을 고백하시는가? 날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시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심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합당히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 그 은혜의 초청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사람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이들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게 된다면, 이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중고등부 여러분,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만날 수 있더라도,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의 은혜는 멈추지 않는다. 나를 돌아보면 부족하고 연약하며 모자란 것들 투성이이지만, 그럼에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중단되지 않는다. 취소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들을 헛되이 받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은혜를 헛되이 받게 된다면 그 결국은 본문 속의 사람들처럼 영원한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들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에 합당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거두어가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베푸신 은혜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매 순간 주께서 내 마음 속의 최고가 되게 하라. 내 마음 깊은 곳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무엇과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분이 되도록 그분을 사랑하라. 그 절대적인 분께서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 내 삶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 되게 하라. 그 아름다우신 분께서 합당한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는 예배의 자리에 구경꾼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합당한 예배자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그 절대적인 분께서 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그분께 부르짖는 기도가 멈추지 않게 하라.
이와같이 주께서 바로 여러분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이 자리의 모든 중고등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