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II (마가복음 서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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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오늘 본문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서론
서론
지난 주
지난 주
우리는 지난 주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그러니까 죄인들이 받아야 할 그 세례를 왜 예수님이 받으셨는가? 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그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루려고 하신 그 모든 의를 하늘이 찢어지는 모습을 통해서 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예수님께서 희생제물로서 우리에게 오셨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늘이 찢어지는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존재 바로 대 제사장으로서 오셨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난 주 의미: 욤키푸르
지난 주 의미: 욤키푸르
대재사장이 뭐하는 직분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중재하고, 회복시키는 직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번 욤키푸르라는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욤키푸르는 날이라는 욤과 속죄라는 키푸르가 합쳐진 말로 대속죄일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날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1년에 딱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날이 바로 이 대속죄일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라는 것은 성소 안에 ‘휘장'으로 가리워져 구분된 공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소 안에 지성소가 있는 것이죠.
이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대제사장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날이 아니면 못들어가는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들어 갈 수 없는 지성소를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허락하신 날이 바로 이 욤키푸르인 것이죠.
그렇다면 대제사장은 여기에 들어가서 뭘할까요?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준비한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먼저 잡습니다. 염소를 잡을 때 염소의 피를 받아두는데, 이것은 뒤에 아주 중요하게 쓰입니다. 그렇게 잡은 염소를 가지고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해서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제사가 끝나고 나면 대제사장은 모아두었던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지성소 안에서 대제사장은 모아두었던 염소의 피를 뿌리고, 그것을 통해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다시금 언약을 갱신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고 나면, 이제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나와서 남은 염소 한마리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합니다.
대제사장이 염소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동안 지은 모든 죄가 염소에게로 전가되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내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을 염소가 대신하게 된다라는 것이죠.
그렇게 대제사장에게 안수를 받은 염소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무르는 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광야로 보내집니다.
그렇게 광야에 보내진 염소를 아사셀의 염소라 하고, 이 염소는 광야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면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라고 선포하게 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은 재 갱신되는 것이죠.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통해서 이루실 그 모든 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으시는 그 이미자 보여주는 의미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아사셀의 염소로서 이 땅에 오셨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사셀의 염소가 되심으로 인하여 죽으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대제사장을 통해서 행해져야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우리가 행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죠.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아무때나 어디서든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갱신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지금 앉아서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의 갱신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본론
본론
그리고 오늘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시는 모습과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루려고 하셨던 그 모든 의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해설
본문 해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루려 했던 그 모든 의를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심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모습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루려고 하셨던 그 모든 의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되는 데까지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다!
생생한 표현!
생생한 표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는 부분을 읽으면 아주 생동감 있는 단어들과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이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마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거나 혹은 추측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라 볼 수 있는 마가가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과가 같은 1인칭의 시점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혹시 ‘셜록'을 아시나요?
네 제가 넷플릭스에서 본 시리즈 중에 집중해서 보게된 시리즈인데요.
이 셜록 시리즈는 모든 사건 현장을 셜록의 관점에서 풀어나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셜록이 재구성하고, 셜록이 새롭게 그려가는 사건현장에 같이 빠져들도록 만듭니다.
마치 내가 셜록이 된 것처럼 지금 셜록의 관점에 동의하고, 그 관점에 따라서 결과를 유추하게 된다는 것이죠.
즉, 마가는 지금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라는 이 생생하고도 생생한 1인칭의 관점을 통해서 우리는 그 속에서 마치 새로운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과 같은 재미와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머리 속에 성령이 자기에게 내려오셨다라는 그 생생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그 이미지를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통해서 유추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죠.
이사야 61:1-3 과의 연결!
이사야 61:1-3 과의 연결!
어떤 유추를 만들어 갈까요?
마가가 의도한 의미는 바로 이사야 61:1-3 의 이미지 입니다.
이사야 61:1 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라고 말이죠.
감이 오시나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라는 말과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려오셨다라는 말이 매우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가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라는 이 문장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사야 61:1-3 의 말씀을 떠올리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신다라는 말을 통해서 마가는 이사야 61:1-3 에 기록된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려오신다’라는 그 구약의 표현을 떠올리도록 만들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도록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려오셨다라는 말은 이사야 61 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대부분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려오셨다라는 말은 크게 3가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61:1-3 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사야 61:1 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려오시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61:1-3 을 보면, 주 여호와의 영 그러니까 성령이 지금 이사야 에게 임하시는 그 모습을 통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모습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하여서 이루려 하셨던 그 모든 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 답을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61:1-3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이사야 61:1-3 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그 모습"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루려 하신 그 모든 의는 바로 이사야 61:1-3 이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시는 그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들려주시는 아름다운 소식으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서에 기록된 이 말씀들이 곧 이사야를 통해서 황폐해진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되어졌던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교만함 속에서 스스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사야를 통해서 그들 가운데 회복을 명하셨던 것처럼, 지금 세례 요한이 “너희 그러다 다 죽어!” 라고 외쳤던 그 도시, 그 교회를 향해서, 아니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경쟁하며,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 무한 경쟁의 시대 속에서, 서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를 향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서 죄인들이나 받아야 할 그 세례를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굳이 굳이 받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들려진 그 아름다운 소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소식을 듣고, 그 아름다운 소식을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 과의 연결!
창세기 1:2 과의 연결!
다음으로, 마가는 이 생생한 표현, 그러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날아서 예수님에게로 내려오시는 그 장면을 통해서 창세기1:2 의 말씀을 떠올리도록 만듭니다.
창세기 1:2 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말입니다.
뭐라구요? 아니,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구절을 가져다가 마가는 이 구절을 떠올리도록 했다구요?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2 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라는 이 말에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신명기 32:11 에서 ‘너풀거리며’ 라는 단어로 연결되며,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를 운행하셨다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영이 독수리 같이 수면 위를 맴돌고 계셨다라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기 1:2 을 통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모습을 이해하자면, 창세기 1:2 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그 모습은 결국 창조 이전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모습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했던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이 관계가 지금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신다라는 모습과 연결되며, 우리로 하여금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그 모습의 의미,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해서 이루시려 했던 그 모든 의를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그 모습이 마치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세상은 혼탁한 그러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상황이었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상황 가운데 지금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 땅 가운데 만연해 있는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변하여 새로운 피조물들로 채워질 것을 기대하도록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 부분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 다음 주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결론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는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를 통해서 보여졌던 그 창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했던 곳이 새로운 생명들이 가득히 채워졌던 그 창조를 다시금 기대하도록 만들고, 이사야를 통해서 선포하셨던 그 은혜의 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시는 그 아름다운 소식이 선포될 것을 기다리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와 기다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하여서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적용되어질 것임을 확신하도록 만듭니다.
어떻게요?
아사셀의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1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죽음을 맞이하시고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인하여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직접 거하시는 지성소가 됨으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들의 가치를 드러내고 증명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새로운 재창조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과 자신의 깨끗함을 헛된 것으로 여기고 버리시면서까지, 죄인들이나 받을 그 세례를 받으셨던 그 아름다운 소식을 통하여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모든 모습은 우리를 죄인이라 인정하도록 만들고, 우리를 죄없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서 우리 앞에 드리워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광야에서 죽으시는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신 그 예수님의 의를 통하여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이 삶을 쫓아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곧 우리의 높아짐이 되었던 것처럼 나 자신이 낮아짐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높아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우리의 생명이 되었던 것처럼 나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모습의 의미이고 이것이 마가가 그토록 생생하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장면을 묘사한 의도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나 자신을 향하신다면 우리는 마가의 의도를 벗어나 예수님의 뜻을 벗나 살아가기를 추구하는 자들이 될 것이지만, 여러분들의 삶이 나를 벗어나서 나의 이웃을 향할 때 우리는 마가의 의도 안에서,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그 아름다운 소식을 다시금 맛보고 들으며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그런 공동체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어둠 가운데, 환난 가운데, 고난 가운데 혹은 두려움 가운데, 불안감 가운데 광야 속에서 묵묵히 우리를 앞서 걸어간 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시는 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