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히 타는 풀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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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오늘날 코로나와 더불어 많은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청년일 때보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이 더 많은 문제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문제들은 우리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을 계속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주는 방법을 따라 살 것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과연 이런 어려운 때에 우리는 어떻게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 알아보길 원합니다.
본론
본론
1. 금 신상과 풀무불: 합리와 실용
1. 금 신상과 풀무불: 합리와 실용
[왕의 계획: 영원한 제국을 거부하며 풀무불로]
우리는 왕이 금 신상을 왜 만들었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어 제국의 일치와 통합을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왕이 정한 시간에 똑같은 행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면 가차없이 풀무불을 던져버렸습니다.
[금 신상에게 절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금 신상에게 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왕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간에 맞춰 절만 하면 되었습니다. 즉 국가를 위한 국민의례로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절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세 친구들처럼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정과 실용을 추구하는 MZ세대]
요즘 20-30대를 가리켜 ‘MZ세대’라고 합니다. 1980년대부터 시작해서 200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세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와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여기 속해 있습니다. 이 ‘MZ세대’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인터넷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안정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젊은 세대들이 다니엘 3장을 봤을 때 세 친구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왕의 명령을 겉으로만 지키는 척하면서 안전하게 신앙 생활하는게 더 나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풀무불에 들어가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금 신상에게 절하면서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합리와 실용이 적용되어선 안 되는 영역->신앙]
저는 요즘도 월요일마다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는 것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교통비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제 저의 가정에 새 식구가 생겼는데, 육아를 도우면서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결코 합리와 실용을 따라가선 안 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실용과 합리를 추구하는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것을 보고 화를 냅니다. 이렇게 아깝게 허비하는 것보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는 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당시 여인이 깨뜨린 향유 옥합은 300데나리온인데, 노동자 1년치 품삯입니다. 유다의 말처럼 이 향유를 팔면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의 생각이 아닌 이 여인의 행동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통념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 신앙생활을 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와 개념,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선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세상의 통념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다고 해서 우리는 신앙을 타협하거나 놓쳐선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를 가리키고 인도하시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2. 풀무불: 하나님을 경험하는 장소
2. 풀무불: 하나님을 경험하는 장소
[풀무불은 매우 위험한 자리->하지만 성도만 갈 수 있는 자리]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세 친구들이 어디에 있다고 말씀합니까? 금 신상 앞에 있습니까? 아니면 풀무불 앞에 있습니까? 세 친구들의 자리가 오늘날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임을 믿습니다. 풀무불은 세상적으로 볼 때 매우 위험한 자리입니다. 성경은 풀무불을 그냥 풀무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맹렬히 타는 풀무불’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맹렬히 타는 불이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왕은 분노하여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겁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최대한 가장 뜨겁게 만들어 세 친구가 결코 살아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풀무불 근처에 있던 군인들조차 타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풀무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무시무시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풀무불은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도로 살아가는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어려우셨다.]
우리가 성도로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풀무불과 같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큰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물론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밤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면 풀무불과 같은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이 길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 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물론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 고난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풀무불을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성도로 살아가기를 멈추거나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큐티를 사사기 본문으로 하고 있는데요,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실패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특별히 그들에게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도 하기 전에 가나안 민족들이 가진 강력한 무기와 군사력으로 인해 절망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포기하고 산으로 계곡으로 숨어서 지내게 됩니다.
[풀무불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다.]
오늘 여러분들 마음 안에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성도로 살아가면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성도로 살아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풀무불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만약 풀무불 때문에 성도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풀무불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하나님을 경험하는 세 친구]
세 친구는 풀무불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왕은 매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분명 세 명이 들어갔는데, 지금 보니깐 그곳에 네 명이 있는 것입니다. 왕이 볼 때에 세 명은 누구인지 알겠는데, 이 네 번째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모습을 볼 때,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고대에는 왕을 ‘신들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요, 즉 왕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세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르는 불은 이 네 사람만큼은 태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들의 아들’과 같은 이 사람이 세 친구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로 살아가려고 할 때, 어려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난 받는 성도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 바울은 무엇을 하러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나요? 성도들을 고발하고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향해 누구이신지 묻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하늘 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주님을 풀무불 가운데에서 만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풀무불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3. 풀무불: 연단의 장소
3. 풀무불: 연단의 장소
[풀무불은 성도를 연단하는 장소다.]
앞서 풀무불은 오직 성도들만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장소도 있는데 왜 풀무불 안에서 성도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풀무불은 성도를 연단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과 베드로의 권면]
금은 어디에서 제련을 하나요? 풀무불 안에서 제련합니다. 풀무불을 통해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금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성경은 풀무불을 영적으로 연단 받는 장소로 자주 언급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개역한글,욥23:10)” 또한 사도 베드로도 성도가 연단받기 위해 ‘불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풀무불은 고통스럽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곳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풀무불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연단받고 힘을 공급받는 곳입니다.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게 된 이유: 하나님을 경험하고 연단 받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 인도하신 후에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광야는 어떤 장소입니까? 불신과 불순종이 난무하는 자리입니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경험했습니다. 아직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자비와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고단한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배웠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연단 된 출애굽 2세대는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연단받는 풀무불과 같았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풀무불을 경험하지 못해서->세상의 방법 찾고자]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한 때 선교 강대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선교가 필요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저도 주변 목사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위드코로나가 되면서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참석하시는데, 젊은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회복이 더디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풀무불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어려운 위기 때마다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의 어려움만 당해도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방법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빠르고 확실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을 행동->세상 속에서 방법을 찾고자 함]
이스라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을 정복해갔지만 그 이후의 세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방법을 따라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삼상3:1).
결론
결론
[풀무불을 통해 거룩한 성도로 성숙되어져 가자!]
저는 우리 청년들이 풀무불과 같은 고난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풀무불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타버릴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의 몸과 머리카락, 그리고 그들의 옷까지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풀무불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거룩한 성도로 성숙해져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