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청년부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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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은 다른 것인가?
율법과 복음은 다른 것인가?
반갑습니다. 2청년부 지체 여러분.
먼저, 2청년부 지체 여러분과 목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제가 동해교회에 처음 왔을 때부터 계속 여러분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컸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동해교회에 오기 전에 울산교회에서 여러분처럼 대학생 연령층의 청년부에서 여기서는 셀장이라고 하는데 거기서는 순장이라고 하는데 순장도 하고 미디어 부장도 하고 작년에는 청년부 회장도 하면서 리더를 오랫동안하고 청년부 사람들하고도 교제를 많이 해서 지금도 울산교회 사람들하고 교제도 하다보니 자연스레 여러분한테도 마음이 가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청년부 지체들과 친해지고 같이 교제하면 좋을 것 같다”라고 계속 생각은 했는데, 막상 어떻게 다가가야할지도 모르겠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먼저 초대해주셔서 여러분과 교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할 특강은 사실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은 것으로 하게 되었어요. 매일 매일 순간 순간마다 항상 기억해야할 것이기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할 주제는 율법과 복음은 다른 것인가? (부제: 하나님의 성품 왜곡)이에요.
제가 재밌는 사람이 아니라서 막 재밌게 이야기를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최대한 재밌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우리 2청년부 지체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 제목처럼 여러분은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좀 더 쉽게 바꾸면 순종과 은혜, 또는 순종과 사랑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먼저 곰곰히 한번 속으로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쵸? 그리고 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믿으시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로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순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또 다시 여러분에게 한 문장으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먼저, 한번 상상해봅시다. 여러분이 어느 날 우리 신정환 목사님께 신앙을 점검 받는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물론 제가 오늘 말하는 것처럼 하시진 않을꺼에요 ㅋㅋㅋ
우리 뛰어나신 신정환 목사님께서 한 명씩 불러서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해 죄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건전하거나 정통하지 않다고 믿는다.”
자 말이 좀 어렵죠? 이중 부정문이라서 한번에 생각하기 어려운 문장인거 같아요.
그러면 이렇게 한번 쉽게 바꿔봅시다.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해 죄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건전하거나 정통하다고 믿는다.”
자 이제 어떠세요? 좀 더 쉽게 바뀐거 같나요? 그렇다면 이 문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해서 죄를 버려야 할까요? 버리지 않아도 될까요? 다시 말해 예수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할까요? 하지 않아도 될까요?
자, 나는 회개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손!
아니다. 나는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손!
자 이 질문은 실제로 있었던 질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작은 마을인 ‘오치터라더’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너무나 작아서 외지인들의 눈에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717년에 2월에 이 마을에서 장로회 정기 모임이 열리게 되었어요. 이 정기 모임에서는 어떤 한 젊은 목사 후보의 안수를 놓고 싸우게 됐어요.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두 달 전에 이 젊은 목사 후보생이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 시험을 쳤었어요. 시험이 굉장히 어려웠지만 무사히 훌륭하게 통과했어요. 그렇지만 이 후보에 대한 추가 검증이 필요했기에 한 달 뒤에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이 후보생은 다시 장로회 모임에 참석했어요. 이 후보생에게 장로들은 여러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서명할 것을 요구했어요. 보통은 아주 정형화된 질문들이었지만 가끔씩 독특한 질문을 던지는 장로들이 있었는데, 그 질문이 함정이 들어가 있는 질문이었어요. 그 후보생이 마침 그 함정에 걸려들고 만 것이죠. 그 후보생은 ‘윌리엄 크레이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함정이 있던 질문이 바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한 질문입니다.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해 죄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건전하거나 정통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질문은 이후에 ‘오치터라더 신조’로 알려집니다.
윌리엄 크레이그는 이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을 해야했는데, 이 질문의 표현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느꼈지만 동의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그런데 나중되서 윌리엄 크레이그는 다음 장로회 모임에 찾아가서 너무 성급하게 서명을 했다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장로회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1717년 2월에 오치터라더 장로회 정기 모임에서 윌리엄 크레이그의 설교 자격을 박탈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일단락 될줄 알았지만 더 커져서 스코틀랜드 장로회 총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넘어가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오치터라더 신조를 중심으로 이 신조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를 받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일부는 율법주의자로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서로를 율법주의자 또는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하며 비난을 했을까요? 그리고 왜 이 문제로 교회가 분열하게 되었을까요? 팀 켈러 목사님이 이것에 대해서 한 말이 있는데 제가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매로우 논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 현대 신학의 매로우 」 의 옹호자들이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받고, 반대로 비판자 중 최소한 일부는 율법주의자로 오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 칭의와 행위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교리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표현은 놀랍도록 정확하고도 분명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성과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 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물론 선행이 칭의의 이유가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졌다는 확실한 증거는 된다. 하지만 은혜로운 구원에 대한 "감사와 확신" 에서 비롯된 "복음적 순종", 곧 선행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이 칭의는 한 번 얻으면 잃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노여움" 아래 놓인다 해도 칭의는 취소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개신교의 교리를 놀랍도록 자세히 강해한 문서다. 매로우 논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정확하기 짝이 없는 이 신학적 문서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편이 갈라져 상대를 율법폐기주의와 율법주의로 매도하고, 결국 한 교단이 완전히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팀 켈러 목사님의 말처럼 도대체 어떤 문제가 스코틀랜드 장로회를 분열시키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율법과 복음에 관한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여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왜곡을 했을지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음은 오늘의 부제이기도 한 하나님의 성품 왜곡입니다.
이번에는 창세기 2장과 3장을 한번 비교를 해볼건데요.
잘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가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놔두십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말씀하시죠.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여기서 각종이라는 것은 원어로 보면 ‘모든’이라는 뜻이라고 ‘임의로 먹되’라는 것은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열매이든지 그들은 먹고 싶으면 다 먹어도 된다는 이야기죠. 여기까지는 굉장히 좋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더 나아가 한 가지의 순종, 즉 한 가지의 율법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즐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기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아담에게 선물로 주시죠.
그러다가 어느 날 뱀이 그들에게 찾아옵니다.
뱀이 찾아와서 하와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냐”
이 뱀의 질문에 하와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어”라고 말이죠.
자, 하와의 말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3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제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을 비교하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한번 맞춰보실 분!
그 세 가지는 중 첫 번째는 ‘모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하와는 모든 나무의 열매가 아닌 그냥 나무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먹지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 말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와는 먹게 되면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죽을까 하노라는 먹으면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거나 먹고 나서 그때되서 한번 보자 라는 뜻이죠.
자 이 세 가지에서 하와는 빼버렸거나 더했거나 왜곡해서 말하게 됩니다.
그러자 뱀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는 점을 노려 더 강하게 말합니다.
“아니야 그 열매를 먹어도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꺼야. 그 열매를 먹게 허락하지 않으신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야.”
하나님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고 하와는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고 뱀은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뱀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 열매를 너희에게 주시지 않은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통칭 선악과를 우리는 뭐 사과 같은 이미지로 떠올리거나 아니면 다른 나무의 열매와는 좀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뭐 좀 더 이쁘게 생겼다던가 아니면 좀 더 특별하게 생겼다던가. 아니면 뭐 여기에 죄가 들어가게끔 만드는 독 같은 것이 있다던가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신학자들 중 대부분은 이 선악과가 다른 나무의 열매와 그렇게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나무였고 뭐 독 같은 것도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도 다른 열매로 만족하면서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굳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뱀의 유혹으로 인해 하와는 결국 먹었고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게 되고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뱀이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으면서 선악과라는 율법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율법에 기꺼에 순종했습니다. 그렇지만 뱀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는 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 저게 있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너희에게 절대로 주시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래서 하와는 어떻게 될까요? 하와는 이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지 선악과에만 집중하였고 선악과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은 분, 그리고 내가 이 선악과를 먹지 않아야만 나에게 다른 나무의 열매를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잖아요. 나에게 항상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하시잖아요.” 바로 이것이 하와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켜 내가 하나님의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나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단 하나만 그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셨고 그 율법을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혜택들을 하나님의 성품과 분리시킬 때에 바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증거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혜택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회개조차 말입니다. 회개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혜택 중 하나입니다. 죄를 깨우치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혜택이며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그리스도와 분리시킬 때에 회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되며 회개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자격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신게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신겁니다. 이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제가 죽어야만 비로소 저들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듯이 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저를 보내시는 것을 압니다. 아버지. 저를 보내주소서. 제가 기꺼이 죽겠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도,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도 잘 아시는 탕자 이야기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 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유산은 아버지가 죽어야만 받을 수 있기에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 즉 아버지가 주시는 혜택은 원했지만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둘째 아들의 모습임에도 아버지는 순순히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나서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소비하고 맙니다. 그 나라에 흉년이 들자 둘째 아들은 돼지를 치게 되었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지만 그조차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굶주려 죽는 것은 아닌가 라고 좌절에 빠지자 아버지께는 많은 품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죄를 저질렀는데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은 없으니 아버지의 품꾼이라도 되서 살고보자 라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저 멀리서 아버지가 뛰어옵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셨던 모양입니다. 뛰어가 아들을 마주하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십니다. 아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고 다시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십니다. 이 시대에 반지를 낀다는건 상속자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시말해 아버지는 이 둘째 아들을 다시 아들로 받아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가는 너무 기뻐 파티를 열어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러다가 첫째 아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았는데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종 한 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그 종은 이때까지의 일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이 첫째 아들은 분노합니다. 그래서 이 파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신은 즐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깥에 있는 이 첫째 아들을 본 아버지는 이 파티에 같이 참여하자고 권하십니다. 그러자 이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아니 아버지. 저는 항상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적이 없는데, 아버지는 저에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는데, 이 배은망덕한 괘씸한 패륜아인 아버지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이게 말이됩니까?” 첫째 아들이 자신의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따뜻하게 말씀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란다. 너의 동생은 죽었따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얻었기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단다 얘야”
여기서 우리는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 즉 율법에 순종하기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받고는 싶은데 순종하기가 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폐기주의의 모습입니다. 율법에 순종하기 싫어서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죽길 바랬던 것이죠.
그리고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과는 달리 율법에 열심히 순종합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닌 단지 아버지의 것을 받기 위해서 순종한 것입니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 그런데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는 서로 다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겉으로는 달라보이지만 둘은 같은 겁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모두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율법폐기주의는 율법주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받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율법주의는 율법에 순종하기 싫은데, 순종하는 것이고 율법폐기주의는 순종하기 싫어서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 입니다. 겉으로는 달라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이유에서 출발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들을 사랑했고, 아들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항상 주시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3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주고 계셨고 자격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항상 모든 것을 주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아들들이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렇게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순종하길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울산동해교회 2청년부 지체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 아들들과 마찬가지는 아닐까요? 그리고 하와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많은 조건들이나 자격들을 제시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해서는 “이거 이거 이게 필요해. 이게 없으면 그리스도께로 나갈 수 없어”라고 말입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고신대 신학과를 졸업하며 사회복무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신대 신학과를 다니며 정말 좋은 교수님들 밑에서 배우고, 그리고 좋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올바른 신학을 배웠고 올바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반복해서 제가 죄를 왜 짓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는데, 나는 왜 죄를 버리지 못하는걸까?”라고 말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죄를 버리지 못하는 저의 모습에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발버둥이라도 쳐보자라는 마음으로 경건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사람과의 연락을 끊고 일주일간 경건생활만 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는 남을 정죄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른 가르침을 알기에 신앙이 연약한 지체들이나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는 모습이 보이면 판단하거나 정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연 중에 하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 저렇게 살면 안되는데, 저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닌데”라고 말이죠.
이 두 가지 모습에 저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책 하나를 만나게 되었고 그 책은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나눈 내용입니다.
여러분. 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것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의 저처럼 반복해서 짓는 죄를 가지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회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를 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예전의 저처럼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모습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아무런 조건과 자격을 보시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연약한 신앙을 가진 지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항상 이런 마음이 불쑥 찾아옵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는 분이라고 마음 속에서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의 결정체인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날마다 되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겐 날마다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