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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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3:12-18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라
- 강준민 목사님의 <기다림은 길을 엽니다>는 책이 있다. 그 책 서문에 목사님이 개척 초반에 겪은 일을 잠시 언급하는데 내용이 이렇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로고스교회를 개척했을 때 저는 영적 침체의 깊은 늪에 빠졌습니다. 나중에 영적 침체의 늪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영적 침체의 원인 중 하나가 저의 조급함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큰 꿈을 품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습니다. 설교를 시작한지 3개월 만에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저도 개척을 했지만 한국에서 개척하는 것도 힘든데, 미국에서 이민교회 개척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리고 교회가 빨리 성장하고 안정되는 것을 얼마나 소원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혼란스러운 과정을 통해 제게 가르치신 것은 기다리는 법이었습니다. 근육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근육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고 또 견디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근육은 반복과 지속을 통해 생깁니다. 근육이 잘 형성되는 우리는 더욱 인내할 수 있고, 끈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 이게 비단 목회를 하는 목사님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낙심하거나 불안한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원인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항상 조급함이 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수준만큼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낙심이 되고 힘든 것이다. 30대에 연봉이 얼마, 40대에 연봉이 얼마 되어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성공의 기준이 얼마나 빨리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올라가느냐이다. 대기만성이라는 단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빠르게 그 자리로 올라가려고 때로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생에는 속도만큼 방향이 중요한데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급한지 모른다. 식당에 가서 5분도 되지 않아 ‘빨리 빨리’를 외친다. 외국 사람들은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 빨리’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급한 성격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빠르게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다. 프란츠 카프카도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으며 다른 죄도 모두 여기서 나온다. 조급함과 게으름이 그것이다.”
- 조급해 한다고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급하게 해서 일을 그르칠 때가 많다. 성경에도 그런 경우가 나오는데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의 삶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 조급함의 결과가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주시지 않는 것이다. 창세기 16:3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자신도 아내도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아이를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얻는 것인데, 그가 낳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에 기쁨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모두 조급함의 결과였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지만, 그 약속은 때로 굉장히 더디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래 참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저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인내라고 생각한다. 야고보서 1:4에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예전에 룻기를 한 번 설교한 적이 있지만, 룻은 이방 모압 출신으로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온 여인이다. 그가 나오미를 따라온 것은 순전히 신앙적인 동기였다. 룻기 1:16에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런데 3장 초반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라는 남자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그것도 밤에 몰래 그가 자는 곳에 들어가라고 말한다. 굉장히 무모한 일이다. 잘못하면 룻의 진심이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그런데 룻은 나오미의 명령대로 밤에 몰래 보아스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기업 무를 자, 즉 자신과 결혼해서 이 가정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보아스는 밤에 찾아온 룻을 이상한 여자로 보지 않고 그에게 호의를 베푼다. 10절에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보아스는 룻이 자기 행복을 따라 젊은 남자를 찾아 가지 않고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자기를 찾아온 것을 보고 그를 축복한다. 그리고 11절에서도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기쁘게 룻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룻이 원하는 대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말을 들은 룻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해 보라. 아마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넘쳤을 것이다. 이제 당장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룻의 인생은 확 펴지는 것 아닌가?
-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우리 인생에서도 중요한 일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 12절에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제까지 보아스를 자신의 기업 무를 자로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보아스가 아닌 그 사람이 기업을 무른다고 나서면 이제까지 자신이 수고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룻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이다.
- 13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무슨 말인가? 가장 가까운 친족이 기업을 무르려고 한다면 그가 하게 할 것이고, 만약 그가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자신이 하겠다고 약속한다. 보아스가 아무리 룻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감정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신에게 몰래 온 룻을 그냥 아내로 삼고 살림을 차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속한 유대 사회에는 율법과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특히 유대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다. 보아스는 지금 율법이 말하는 절차대로 하려고 한다.
- 지금이 바로 룻에게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13절 마지막에 보아스의 말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여러분이 만약 룻이라면 잠이 오겠는가? 지금 일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거기서 잠이 오겠는가? 그런데 오늘 룻을 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거기서 잠을 잔다. 14절에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물론 잠을 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해가 지고 저녁때에 보아스 곁에 누웠다가 아직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보아스 곁에서 잠시지만 잠을 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둘 중에 하나다. 룻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여자이던가, 아니면 보아스의 말을 믿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여자이다. 저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룻이 아무리 조급해 한다고 해도 일이 당장에 성사되지 않는다. 아무리 급해도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 저는 이 말씀을 보다가 문득 시편 127편 말씀이 생각났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무슨 말인가? 아무리 자신이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려고 해도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지켜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조급증을 내어도,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형통하게 되고 잘 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조급해 하지 않고 오히려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다. 여러분, 요즘 밤에 잠을 잘 이루시는가? 아니면 걱정과 근심으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가? 왜 요즘 많은 분들이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나? 내 인생을 내가 잘 되게 해야 하니까 조급증이 나고 그래도 잘 안 되니까 잠을 못 자는 거 아닌가?
- 그렇다면 룻이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 룻은 보아스의 신실함을 신뢰하고 있다. 보아스가 이제까지 룻에게 보인 모든 것은 바로 신실함이다. 처음에 자신의 밭에서 만난 룻에게 마음껏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고 또한 그 약속을 지켰다. 보아스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13절에서도 자신이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그 사람이 기업 무를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이 이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13절에서 강조점은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무슨 의미인가? 자신이 한 말과 약속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다. 더디게 보인다 할지라도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찬송가 445장 가사처럼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품도 바로 이 신실함이다. 에베소서 1:1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에베소에 있는 성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성도는 바로 신실한 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닮아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말이라면 보증수표처럼 믿어줘야 한다. ‘저 사람 말은 못 믿겠어.’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하다.
- 18절에서도 나오미가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오미가 보기에도 보아스는 정말 성실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성취하려고 하는 열심히 있는 사람이다. 4장에 가면 보아스는 즉각 성문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도 바로 우리 하나님의 성품 아닌가? 이사야 37:32에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 시편 121:1-4에서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일이라면 내 온 힘을 다해서 하려고 하는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한다.
- 그렇다면 둘째로 룻이 신뢰하는 것은 보아스의 긍휼과 자비다. 15절을 같이 읽어보자.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7절에서도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보아스는 아직 룻의 기업 무를 자로 정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룻과 나오미에게 풍성한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있다. 룻이 이삭줍기로 주운 양식을 다 떨어졌을까봐 그에게 다시 양식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풍성하고 넉넉한 사람이다. 앞에서도 그랬다.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일할 때부터 그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었다. 룻이 보아스를 신뢰할 수 있는 것도 그가 근본적으로 긍휼과 자비의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2:4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도,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긍휼하심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긍휼히 여길 수 있다. 은혜를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과 같다.
- 이 두 가지 사실, 보아스의 신실함과 보아스의 긍휼과 자비를 의지하고 신뢰하니까 룻은 기다릴 수 있다. 이번 주 전국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다시 폭증하고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이 많이 확진되는 모습을 보고 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 나오는 아이들 가운데 학급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코로나 검사도 하고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제 김포에서 확진자가 66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어쩌면 코로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딜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조금 힘들었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긍휼과 자비하심을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 때로는 이 기다림과 인내의 과정이 힘들게 느껴진다. 모든 기다림은 어둠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수 몽크 키드가 이렇게 말했다. “계란은 부화를 통해 병아리가 된다. 부화한다는 것은 발육에 필요한 조건을 조성한다는 뜻이다. 그 조건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때 퍼뜩 깨달았다. 어둠이었다. 모든 생물은 어둠 속에서 부화한다. 비로소 나는 내가 처한 어둠이 거룩한 어둠임을 알았다.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부화하고 있었다. 새 생명이 자라 출현할 때마다, 그 과정에 어둠이 꼭 필요하다. 번데기 안의 애벌레든 땅속의 씨앗이든 태내의 아이든 영혼 안의 참 자아든, 모두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