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널 위하여

요한일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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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것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기에 그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죄가 정말 용서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근심에 빠진 분이 우리 안에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주셔서 기쁨 가운데 거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선한목자교회를 섬기시는 유기성 목사님이 김해에 부흥회를 갔다가 한 권사님을 상담했던 이야기를 설교 중에 하셨습니다. 그 권사님이 울면서 “자식을 죽인 엄마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여든이 넘으신 권사님이 죽을 때가 다가오니 마음 속에만 묻어두었던 죄 문제가 실제적으로 다가오며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권사님 나이가 17살, 일제강점기 시절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징용에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고, 그런데 임신은 되어서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그 시절 시집 간 딸이 임신을 해서 돌아온 것이 친정에서는 마땅치 않게 여기던 때에 태어난 아기가 쌍둥이였습니다. 친정 가족들이 고개를 다 돌리더랍니다. 17살 어린 여인이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아이 하나에게 젖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만 알고 있던 비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 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런 자신이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묻고 싶으셔서 찾아온 것입니다. 권사님이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까 하는 마음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이 권사님께 세 마디 말을 따라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자식 죽인 어미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식 죽인 어미의 죄 하나님은 이제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식 죽인 어미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딸로 삼으셨습니다.”
이 세 마디 따라 고백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렇게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이 세 마디의 고백을 하고서 권사님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을 넘어가셨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유기성 목사님을 찾아와서 권사님이 그렇게 웃으시는 것을 처음 보셨다고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어떤 죄라도 용서하고 구원받게 하는 복음입니다. 이 권사님의 죄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다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더라도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도 용서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가 있다고 말하니 혼란스럽고 헷갈리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박해 했던 것이 성령을 거역한 것이니 용서 받지 못할 죄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지만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기 전에 성령을 거역하여 살아간 것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고 나서 성령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성령을 거역한 것입니까? 성경 좀 읽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전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죄 가운데 살아갔던 그 모습이 혹시 성령을 거역한 죄라서 용서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마음 속에 ‘내가 성령을 거역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인해 용서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걱정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고민하는 여러분은 성령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성령을 거역하지 않았을까?’라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여러분이 성령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을 거역한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꿀 같은 저녁 시간에 굳이 추위를 뚫고 예배 드리러 나온 사람은 성령을 거역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근거로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문맥상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는 죄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는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누구나 용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무시하고 버리는 것이 성령을 거역한 죄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도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 말씀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한 번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사람이 타락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맛보고 타락한 사람이 되돌아서서 갈 곳은 없습니다. 구원에는 하나님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그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외의 길을 찾으려는 타락한 자들에게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의 조건이나 길은 결코 없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짓는 죄는 모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니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만 않으면 어떤 죄든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냥 자동적으로 용서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파 이단은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그 이후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다 용서 받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예수님을 믿으나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을 믿지만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가만히 두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죄 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시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 믿기는 하지만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가냐고 말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너도 죄 짓고 나도 죄 짓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만연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든, 여러분의 가족이든, 여러분의 구역원이든 그 누구든 죄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에 빠진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를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짓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뒷담화를 하고, 소문을 내고, 정죄합니다. 어떻게 그 직분을 가지고 그런 죄를 짓고 살아가냐고 정죄하기 바쁩니다. 누가 어떤 죄를 짓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가정 생활을 비관하고 여자친구가 떠나서 수면제를 먹고 음독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일찍 발견이 되어서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병원을 찾아갔는데 병문안이 아니었습니다. 병실 문을 열고 친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니가 그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야? 어떻게 자살할 수가 있어! 너 자살하면 지옥가는 거 몰라? 난 너랑 같이 교회 다녔다는게 부끄럽다”고 소리를 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친구에게 소리치고 저주하고 돌아나오면서 그걸 잘 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뒤에야 그 때 자신이 얼마나 율법주의자로 살아왔었는지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 뿐만 아니라 주변의 죄 짓는 사람을 보고 정죄하는 우리는 참으로 웃긴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말할 수 없는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은 사람들인데 그런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죄를 보고 정죄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 상황인지 모릅니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에서 다른 이들의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무서운 정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약 믿음의 형제 중에 누가 죄 짓는 사람을 보면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돌아오고 바로 설 수 있도록, 그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말합니다. 죄 짓는 사람을 보면 제발 소문 내거나 정죄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은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기에 구하면 얻은 줄 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이 없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기를 얼마나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이 없다고 말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가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전도하기를 너무도 원하십니다. 그러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 주변이 없어서 전도 못한다, 체험이 없어서 전도 못한다고 말하지 마시고 전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죄의 문제에 빠져 계신 분이 계시다면 다윗처럼 이렇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안들어 주실리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기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데 어떤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죄 짓고 멸망의 길로 가는 형제 자매가 돌아서게 해달라고 하는 그 기도를 가장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죄에 빠져 허우적 대는 사람,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 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그 기도를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한 목사님이 지금 이 시대를 ‘칠면조의 시대’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칠면조에게는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내다가도 우연히 한 마리가 다치게 되면 갑자기 무리들이 몰려와 상처를 쪼아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에도 예외가 없다고 합니다. 결국 공격 받은 칠면조가 피가 나고 쓰러진 뒤에야 칠면조 무리가 돌아섭니다. 그 과정에서 죽는 칠면조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칠면조의 습성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달려들어 정죄하고 망신을 주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비판한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험담을 자주 하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을 먼저 찾아내 헐뜯었기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친정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 날도 이 아주머니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웃집의 불결함에 대해 험담을 했습니다.
“엄마, 저기 봐요. 옆집 빨래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러워요. 저 집은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하나봐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더 자세히 보렴. 이웃집 빨래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너희 집 유리창이 더러운 거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칠면조와 같은 성도, 이 아주머니와 같은 성도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의 죄를 보면 그들을 정죄하고, 뒷담화하고, 온갖 소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 지은 형제가 쓰러지고 교회를 떠나게 하고 나서야 속 시원해 하며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묵묵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아름다운 기도가 쌓여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져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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