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의 시대, 구원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Notes
Transcript
[서론]
요즘 대선때문에 뉴스들은 모두 대선후보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뉴스거리입니다.
그들이 주로 집중하는 대상은 20-30대입니다.
겉으로는 그들이 우리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표심이 결국 당락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청년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청년들은 시큰둥하기만 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최악의 실업률로 인해 일자리가 없습니다.
평생 일해도 집 한채 살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또한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어 온갖 재난재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코로나에서 언제 해방될지도 모르고, 코로나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언제 일어날 지도 모르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넷플렉스에서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같은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만 현실인것만 같아 마음은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선후보들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한숨이 나오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불안한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본론]
오늘 말씀에서 만나는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은 지금 우리들만큼이나 어둡기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나라에 40년 동안이나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사사들 이야기중 가장 긴 기간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깊은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님께 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서 악이란 그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어 그 악, 즉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계속된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은 블레셋이란 나라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앞에서는 이런 상황이 되면 이스라엘은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은 구원자 사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패턴이 깨집니다.
이스라엘은 40년동안 고통가운데 있는데도 주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어 버렸거나, 죄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이 반복되고 습관적인 회개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 회개하는 것도 잊어먹게 됩니다.
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할 때 우리는 점점 선을 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살던 빌라는 화재경보기가 너무 자주 울리는 거에요.
아마도 누군가 집에서 담배를 피웠던지 한 거 같아요.
처음에 몇번 울릴 때는 놀라서 사람들이 다 나와봤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또 그냥 울린 거겠지 하고 아무도 안 나와보더라구요.
저는 진짜 이게 큰 불이 난거면 어떻하나 걱정이 되더라구요.
우리가 작은 죄악을 계속 지나치는 것도 이런 상황과 같습니다.
작은 죄를 가만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무감각해져서 나중에는 인생 전체가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압제당한 기간 40년이란 상징적인 숫자로서 고난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끊어지고, 부르짖을 힘조차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기다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40일, 40년이 흐른 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노아의 홍수로 온 인류가 멸망한 후 40일이 지나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40년동안 블레셋에게 고통당하며 자포자기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을 선택하시고 어둠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십니다.
2,3절입니다.
그 때에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가운데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주님의 천사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보아라, 네가 지금까지는 임신할 수 없어서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마노아라고 불리는 사람의 가정은 결혼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불임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임신은 신의 영역으로서 여성의 불임은 신에게서 저주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불임인 여성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수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에서 이 여성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런 여성의 처지와 연관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반면 그녀의 남편 이름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마노아, 즉 ‘안식, 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아이가 없는 가정에 안식, 마음의 평화가 있었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의 모습과 그녀의 남편 이름을 통해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희망과 미래가 없는 저주받은 시대, 절망적인 시대를 불임상태인 한 여인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죄악과 블레셋의 괴롭힘 속에 안식이 없는 시대를 마노아라는 이름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과 미래, 안식이 없어 어둠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새로운 한줄기 빛을 비춰주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천사를 보내 이 불임 여인에게 아이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태어날 아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태어날 아이가 바로 그 유명한 삼손입니다.
그는 과연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처음에 제가 말한 대로 대통령후보들은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운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구원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염병을 막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습니까?
단적인 예로 코로나를 한번 보십시오.
사라질 듯 하니까 또다른 변이가 등장합니다.
변이는 아프리카나 인도, 중남미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나라들은 백신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나라들이 다 쌓아놓고 가난한 나라에 나눠주지 않기 때문에 변이가 계속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심은 세상이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한편 주님의 천사는 아이를 낳게 될 마노아의 아내에게 몇가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줍니다.
4,5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조심하여,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라. 부정한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술마시지 말고, 성경에서 금하는 부정한 음식 먹지말라는 것은 여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특별한 아이가 뱃속에 있으니 태교에 각별히 신경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태어날 아이에게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나실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그 기간만큼은 최대한 거룩하게 살도록 하나님과 약속한 자들을 말합니다.
나실인이 해야 할 일은 민수기 6장에 나옵니다.
나실인은 술마시면 안되고, 부정한 것, 시체같은 거 가까이 하면 안되고, 머리 깎으면 안됩니다.
그 나실인이 바로 태어날 아이 삼손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나실인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그를 나실인으로 삼아서 그의 신분과 사명을 정해주셨습니다.
그럼 왜 하필 사사 삼손만 나실인으로 정하신 것일까요?
삼손은 하나님의 아픈 손가락,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삼손이야기 잘 아시지만 삼손이 정상이 아닌 자거든요.
나실인인데 금기사항 하나도 안 지킵니다.
괜히 자기 힘 자랑하고, 시체 가까이 하고, 여자 좋아하는 난봉꾼에 나중에는 여자한테 속아서 머리카락이 잘려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지 않습니까?
이런 삼손의 삶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나실인 삼손을 선택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에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삼손처럼 그 힘을 자신들만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또한 삼손이 여인에게 유혹당했듯이, 이방신에게 유혹당해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는 삼손처럼 비참한 포로생활과 죽음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미리 정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업을 다양할 지라도 사명은 똑같습니다.
음악가, 화가, 직장인 모두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나실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면 사소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일들, 즉 내가 밥먹고 마시는 것, 머리카락 자르는 이런 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사소한 일도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식기도 왜 하나요?
식기도를 하는 이유는 그 밥먹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하나님이 주신 음식들로 에너지를 얻어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천사가 자신에게 한 말을 남편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그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7절입니다.
뭐가 들어갔고, 뭐가 빠졌나요?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이런 말 천사가 안했는데 자신이 집어넣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삼손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게 되거든요.
또 빠진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이 머리카락 자르지 말라는 것과 이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이 여인은 자기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과 그 아이가 나실인이라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인데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의 반응도 어쩐지 이상합니다.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이렇습니다.
8절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셔서 태어날 아이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 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여 주십시오.
천사는 그의 아내에게 다 말해줬습니다.
머리카락 자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보면 나실인들이 해야할 사항들이 다 정해져있습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웃기는 내용은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남편 마노아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천사가 다시 찾아옵니다.
그런데 남편 마노아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또다시 아내를 찾아옵니다.
기도는 남편이 했는데 아내한테 다시 찾아가는 것도 웃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편의 물음에 대해서 천사는 아내에게 했던 말 그대로 전합니다.
새로운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성이 영적으로 더 예민해서 아내만 찾아온 것일까요?
누군가는 어떤 교회든 여성이 더 많은 이유가 바로 여성들이 더 영적으로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꼭 그런 이유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일까요?
사사기는 전체적으로 여성의 역할에 매우 긍정적입니다.
여자 사사 드보라와 적장 시스라를 죽인 여인 야엘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하나의 소유개념이었습니다.
심지어 불임인 여성이니까 얼마나 무시당하고 천대받았을까요?
그러니까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굳이 그 남편놔두고 그 여인에게만 찾아가십니다.
그만큼 여성에게 매우 우호적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일수록 하나님은 시대의 틀을 깨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편견과 통념을 깨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왼손잡이, 소몰이꾼의 막대기, 창녀의 아들도 구원의 도구로 쓰시는 것을 봤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나타나 있지 않는 불임 여성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능력이 많다고 교만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이 가진 능력이 적다고 주눅들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삼손만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서 자격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 태어났지만 개 망나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보다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그럼 여기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과연 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 우리의 구원자,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과도한 관심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마치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처럼 보면 안됩니다.
그들이 결코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삼손은 그런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이 진정한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 강력한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미래를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세상 지표들은 우리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는 사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이름없는 불임여성에게 찾아와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부르짖을 힘도 없었지만 지금 우리는 아직은 부르짖을 힘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존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절망 거인과 그의 부인 자포자기에게 붙잡힌 크리스천은 처음에는 좌절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절망과 안식이 없는 감옥같은 시대에 주님은 우리의 삶을 풀어내실 열쇠가 되십니다.
우리 다카포 식구들도 가슴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열쇠를 품고 세상에 나아가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