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저녁] 참된 예배를 올려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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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2 만유의 주 앞에 / 317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기도 정종순 집사
본문 요4:23-24 (신p. 148)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서론
서론
헬라어로서의 ‘예배’라는 단어는 개가 주인의 손을 핥으며 복종의 표를 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말이며, 히브리어로서의 ‘예배' 라는 단어는 강대국의 왕 앞에 약소국의 왕이 엎드려 절하며 나의 목을 내어드리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예배란, 엎드려 절하는 것이며, 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복종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예배공동체로 부르셨다. 교회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날마다 확증해야 하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어야 하며, 자격없는 죄인들을 향하여 베푸신 그 큰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이 땅에서 누리는 이 영광스럽고 복된 특권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질 것을, 그리고 그 날 완성될 것을 확신하는 자리이다.
참 예배는 온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삼위 하나님만을 높여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위로와 책망을 받으며, 하늘의 뜻을 깊이 드러내는 천상의 모임이어야 한다. 하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다. 어떤 책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그들을 ‘여호와의 군대'라 하셨는데, 그 여호와의 군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예배였다. 따라서 예배는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는 원동력이며, 또한 거룩하신 천상으로 들어올려져서 삼위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위로와 힘과 복을 받아 누리는 이 예배는 곧 우리의 힘이다.
그러나 사탄 마귀 역시 예배가 가진 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우리의 예배를 공격한다. 예배를 부패시키고, 예배에 본질을 흐리게 만들며,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헤집어놓는다. 성경을 보아도 이러한 사탄의 공격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가? 마찬가지로 사탄은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예배를 공격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를 할 수만 있거든 훼방하려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예배자로 하여금 예배로부터 어떠한 유익도 얻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의 군대 교회가 힘을 잃게 만들고 있다. 여러분의 예배는 안녕하신가?
영이신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라. 여기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 말씀하시니, 곧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이 사실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저에게 큰 도움을 입어서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저의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라.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곰돌이푸’를 만들어놓고 이것을 가리켜 ‘송진영’이라고 한다면, 혹은 ‘오징어 형상’을 두고 이것을 ‘송진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만들었다 하지만 결코 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쾌감만 생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답게 하나님을 섬겨야 바르게 섬기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한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답게 바르게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하나님을 할아버지 형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을 불이나 번개형상으로 조각한다 한들 그것 또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사실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으로 존재하시지 않고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적어도 4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이다.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떠한 조건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둘째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이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변하지 않으신다. 셋째는 영원하심이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존재와 속성에 합당하게 섬겨야 한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
참되게 예배하는 자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를 돌아보면, 정말 많은 예배들이 있다. 정말 많은 예배 가운데에서 살아가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 풍성한 예배만큼 예배를 통해 부어지는 은혜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수 중 소수에 불과하다. 예배의 횟수는 정말 많아졌고, 또한 예배마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으나 그 예배를 통해 약속된 온갖 유익들을 받아 누리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러할까?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공동체로 부르셨고, 우리에게 이 세상 가운데에서 사탄의 권세와 싸워 나갈 수 있는 무기로서, 또한 이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과 위로를 공급하시는 수단으로서 예배를 허락하셨는데, 왜 그 많은 예배들이 우리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인가? 왜 수많은 예배들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삶에 어떠한 힘이나 능력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왜 예배를 통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왜 예배를 통해 소망을 누리지 못하며 오히려 이 귀한 예배가 무거운 짐이 되어 짓누르는 것 같은가.
예배를 제정하신 하나님이 뭔가 무능하셔서인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예배라는 수단 자체에 뭔가 부족하거나 모자라서인가? 아니면 그 예배에 참여하는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라. 예배가 문제인가? 아니면 예배에 참여하는 내가 문제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 이라고 말씀한다. 참되게 예배한다고 표현하신다. ‘참되다’는 것은 ‘진실한, 옳은’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표현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지금 참되지 못하게, 진실되지 못하게, 옳지 못하게 예배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늘 예배의 자리에 참여는 한다. 수많은 예배들에 참여는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지 않는다. 진실되게 예배하지 못한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 결과 예배를 통해 누리는 어떠한 유익도 누리지 못한 채로 마당만 밟고서 돌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예배하다’ 라는 단어의 의미를 말씀드렸다. 참된 예배와 참된 예배자란 하나님께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예배 중에 선포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 그분 앞에 나의 뜻과 생각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 내 목숨가지도 기꺼이 내어드리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 모든 것들을 다스려주시길 간구하며 나의 삶의 모든 주권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바른 예배요,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참되지 않게 예배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예배이다. 하나님과 나와 아무런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예배이다. 하나님과 나와 아무런 교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식조차 하지 않은채로 그저 멍하니 앉아있다 가는 것이며, 예배를 드리는 같은 시공간 안에는 있어도 마음은 전혀 없는 빈껍데기 몸만 왔다 가는 태도이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마음은 교회 밖에 있어도 내 몸이라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예배의 자리에 다녀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복을 주셔야 하고 나를 섬겨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저들을 향하여 사1:4 에서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라고 탄식하셨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섬긴다 하였지만 실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요, 하나님을 무능한 신으로 여겼으며,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채로 이 자리에 앉아만 있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여기는 것은 큰 죄이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결코 참된 예배라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는 예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가 될 것이다. 제발 그런 예배자가 되지 않길 바란다.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몰려든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지만 실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길 원하는 마음에 찾아온 허황된 예배자들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그녀의 예배
사마리아 여인과 그녀의 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속해있는 요4:1-18 까지를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다. 이 여인은 그리심 산에서 드리던 예배에 참석하던 자였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경 중에서도 모세오경만 인정했기 때문에 모세의 명대로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거기서만 예배를 드렸다. 저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장소는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별짓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따라서 이 여인도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그리심산에서 드리는 제사를 참석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예배의 자리에 참석을 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 마음 속 영혼의 공허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왜? 참예배와 거짓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수많은 예배가 예배자에게 아무런 유익도, 변화도 안겨다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으로 그 공허함을 채워보려 했고, 남편만 다섯 이상을 두었지만 그 갈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혼의 갈증을 느껴서 그것을 채워보려고 온갖 세상적인 것들로 우리 마음을 꽉꽉 채워넣는다 한들 그것이 해결되겠는가. 그럴리 없다. 왜? 이 갈증은 영혼의 갈증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만 충족될 수 있고, 참된 예배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면, 내가 예배의 자리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인의 삶이 달라졌는가? 그 공허함이 신령한 것들로 채워졌는가? 영혼의 갈증이 충분히 해갈 되었는가?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배는 매우 형식적이었고, 예배자의 마음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은 빈껍데기 예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가 되어 예배의 자리에 참석은 하지만 그것은 마음과 정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예배였지, 아무런 기대도 감흥도 감동도 없고, 어떤 정성도 진심도 없는 죽은 예배였지, 참된 예배자로서 살아있는 예배를 올려드리는 식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영과 그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 구절을 예전 한글성경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라고 번역하면서 마치 예배에 임하는 예배자의 태도 적인 뉘앙스로 번역을 했지만, 사실은 옳지 않은 번역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는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조건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진리는 보편적이고 또한 불변하다. 시대나 상황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진리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이 세계는 전부 유한하다. 변하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수천년 동안 밝히 지구를 비추던 태양도 어느 순간에는 그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진리라고 불릴 만한 것이 이 세계 가운데에는 없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진리’란 무엇인가? 영원부터 영원까지 결코 변하지 않는 이 진리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 곧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디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 희미하기 때문에 그것만 보아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모든 지식을 성경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도 알 수 없고,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마련하셨으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도 알 수 없다. 특별히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선언하면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곧 진리란 말씀이신 예수님이시다. 주님께서도 자기 자신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예배는 진리가 선포되는 시간이다. 오늘날 동네마다 십자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교회가 많이 세워지고 그만큼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듣기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하나님보다 자기 만족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 진리를 사랑하기는 커녕 진리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렇게 드리는 예배가 과연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는가? 그 예배를 통해 삶이 바뀔 수 있는가? 그 예배를 통해 신앙의 결실들이 맺혀질 수 있는가? 그 예배를 통해 진리이신 하나님을 더욱 믿고 따를 수 있는가? 그렇기에 여러분, 바르고도 참된 예배를 드리길 원한다면 가장 먼저 여러분 자신이 진리를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라.
또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이 위대한 힘은 오직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내 안에 숨어있던 죄를 알려주고, 그 죄로 인한 비참함을 깨닫게 하며, 이제는 돌이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성화의 삶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성경은 믿음이 들음으로 생긴다고 말씀한다. 바른 진리의 말씀이 예배 가운데 선포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선포되는 말씀을 받아 먹을 때, 성령께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의 깨달음 안에서 우리는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복음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게 하신다. 반면 성령 안에서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분명 같은 예배의 공간 안에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성령님의 일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지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배를 계속 드리게 되면 그 마음은 정반대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정말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교회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에서 늘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가운데 있는 것임을 기억하라. 예배를 통해 그 어느 양분도 받아먹지 못하는, 메마른 심령들이 바로 굳어진 자들이다. 따라서 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길 바란다면, 가장 먼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늘 주장하셔서 우리 속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여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굳어진 마음들이 성령의 일하심 속에서 살과 같이 부드럽게 되어 진리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가 될 수 있길 기도하라.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신다. 대다수 무리들 중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그 소수의 사람들을 찾으신다.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는데, 사탄이 삼킬자를 ‘찾는다’는 표현과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표현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만큼이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는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것처럼, 사탄 마귀가 그 넘어뜨릴 자들을 찾아다닐 정도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려 하고, 아무런 생각없이 빈 껍데기처럼 예배의 자리에 왔다 가며, 예배를 통해 아무런 유익도 교제도 누리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이 넘처나기 때문이다.
결론
결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세상 가운데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는 전초기지로서 세워진 기관이 바로 교회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며, 그분을 사랑과 경외함으로 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일들이 바로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예배는 생명이 있다. 참된 예배는 변화가 일어난다. 참된 예배는 소망과 위로가 있다. 참된 예배는 성숙이 있다. 참된 예배에는 힘과 능력이 있다. 성도 여러분, 다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서 질문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무기인 예배가 바로 이러할진대, 과연 여러분의 예배는 안녕한가? 이런 것들을 공급받고 있는가? 이런 영광스러움을 누리고 있는가? 은혜로 충만해지고 감사로 충만해지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예배를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수여하신 하나님의 문제인가, 아니면 예배에 참여하는 나의 문제인가.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은혜를 주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 예배가 참된 예배여야만 한다. 참된 예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답게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 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요,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기꺼이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 이렇게 예배 드리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참된 예배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시길 축원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바른 예배 공동체로 세워져가는 우리 양문교회와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
기도
주여,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참된 예배자가 바로 제가 될 수 있길 원합니다. 다른 어떤 인간적인 방법들을 제거하고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맞는 합당한 예배를 올려드리는 제가 될 수 있길 원합니다. 예배의 의미처럼, 하나님의 손에 내 모든 것들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굴복하고 주를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길 원합니다. 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들이 풍성하게 일어나는 우리 양문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함께 주여 한번 외치고 기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