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왕을 섬긴 다니엘이 말하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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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섯 왕을 섬긴 다니엘이 말하는 감사
본문 : 다니엘 6:1-15
[도입]
최근 다니엘기도회 한 간증을 보았습니다.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의 저자 김희애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간증의 타이틀은 “삶의 힘은 감사입니다.”였습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얼굴의 반이 매우 큰 점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녀는 나이가 자라며 자신의 얼굴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어린 나이에, 특히 외모에 더 관심을 가졌을 그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알게된 그녀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게 물었습니다. “만약 동일한 상황이 나에게 똑같이 주어졌다면, 과연 나는 집사님처럼 감사했을까?”
그녀는 고아로, 보육원에서 김희애라는 이름으로 또 7월 7일생이라는 간단한 정보 아닌 정보만으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자신에게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후원자’의 유무였습니다. 보육원의 친구들은 자신을 향한 후원자가 있었고, 또 그 후원자들로부터 생일이 되면 선물을 받는 것을 보며 부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7월 7일 자신의 생일에는 늘 빈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도 후원자로부터 생일선물을 받고자 다짐을 했습니다. 또 실천했습니다. 어떤 실천일까요? 그녀는 구세군혜천원보육원에 있었는데, 보육원이 속한 구세군교회에 출석할 때 였습니다. 그녀는 교회에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단 한명의 후원자를 꼭 붙여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그 해 후원자가 생겼고 생일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또 우스겟소리로 자신이 단 한명의 후원자를 기도했더니 정말 단 한명만 붙여주신 것 같다고, 기도는 조금 더 크고 구체적으로 하라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당시 김희애라는 어린이는 단 한명의 후원자를 통해 충분히 감사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간증 속에서 후원자를 만난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후원자로부터 “사랑하는 희애에게”라는 말이 모든 것을 위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년 365일 중 364일이 힘들고 우울했어도 7월 7일에 오는 그 편지 한통, 첫줄에 적힌 “사랑하는 희애에게”는 모든 힘듬과 슬픔을 위로하며 이기게 한다 하였습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담긴 점을 과거에는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지금은 복점이라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보기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지내니 모든 것이 걸림돌이고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세상이 말하는 미의 기준에 의하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가졌습니다. 또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그러한 점이 얼굴에 있다면 수긍하며 살기보다 좌절과 어쩌면 살아는 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김희애 집사는 주어진 것 속에서 감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발견하는 과정 속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어떤가?’ 간증을 듣다보면 이미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감사하는 삶을 은연중에 살아내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단 한명의 후원자가 생겼을 때에도, 성인이 되어 보육원에서 그대로 일하게 되었을 때에도,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을 때에도, 결혼을 했을 때에도, 아름다운 아이가 생겼을 때에도 그녀는 늘 감사 또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복점을 설명함에도 요한복음 9장 2절과 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라 말입니다.
김희애 집사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 감사할 수 있었듯, 우리 또한 정체성을 바로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명지대학교 김형민 교수는 청소년의 진로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할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먼저 알 때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으며, 이는 성경관과 비슷하다 부연설명합니다. 크리스천이 자신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바로 알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내게 계획된 하나님의 일들을 능히 해 나갈 수 있다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다니엘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 감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우리는 지킵니다. 한 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잘 추수하여 나가도록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진리와 또 그 진리를 통한 믿음의 고백과 감사가 우리 입술로 고백되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니엘서 배경설명]
먼저 다니엘서에 대한 배경을 조금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우리가 흔히 ‘엄친아’ 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는 실제로 귀족의 자제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함으로 정치인질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그리고 고레스까지 총 네명의 왕을 섬겼던 모든 왕들로부터 신뢰를 받던 자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다리오 왕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벌어진 일로 그 유명한 다니엘과 사자굴 이야기가 기록된 아주 유명한 장입니다.
[아무 근거, 아무 허물없는 다니엘]
다리오는 자신의 뜻대로 고위관리직 120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했으며, 이 120명을 총괄하여 통치할 자로 총리 셋을 세웠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다니엘입니다. 앞서 말했듯 다니엘은 엄친아 중 엄친아였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옴에도 그는 정치인질로 오게 됩니다. 심지어 다리오 왕도 다니엘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를 향해 어떻게 표현하나 보면, 3절,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고 기록합니다. 다리오 왕 보기에 그는 빠릿빠릿하고 일처리가 매우 깔끔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직장에서 이쁨을 받는 직원들 또는 동기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이상하게 꼴불견입니다. 분명 일도 잘하고 외모도 준수하고 심지어 취미마저도 심히 잘 할 정도로 뭐하나 빠짐없이 잘하는데, 이상하게 우리 보기엔 아니꼽게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또 오늘날의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는 아니었나 봅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니, 그 이유를 우리는 4절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세 명의 총리 중 하나는 다니엘이었으니, 남은 두 총리와 전부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만약 다니엘이 위의 상황과 같은 이유로 미움을 받았다면 120명 모두의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120명의 고관들이 다니엘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다니엘을 다리오 왕에게 고발할 조그마한 문제점이라도 발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어떻습니까? 다니엘의 모습이 너무나 완벽했기에 조그마한 문제점 조차 찾을 수 없어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했다 기록합니다.
[세상이 바라본 다니엘의 흠]
우리가 볼 땐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행동이라 왜 흠인가 싶지만, 그들은 유일한 흠을 어디서 찾았는가보니 ‘하나님의 율법’에서 찾았다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7절을 보니 총리와 고관들이 다리오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의논하고 이야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말하지만, 사실 이 마저도 거짓임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과연 모든 이들과 함께 의논하여 금령을 정하였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처음 듣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어쩌면 고관들 모두가 함께 동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모두가 동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총리 두 명이 머리를 굴려 나온 금령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부정부패한 과정 속에서 벌어진 모든 과정 속에 나온 이 금령을 다리오 왕 앞에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레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아니하도록 제안을 합니다. 왕의 입장에서 제안된 금령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좋은 제안입니다. 삼십일간 자신의 권위를 확고하게 잡을 수 있고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또 나름 왕의 입장에 그들이 충신으로써 보일 수 있는, 관계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 마저도 자신들의 국왕이 누구인지 인지하게 하며 그들이 자신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살게 할 수 있는 아주 절호의 찬스입니다. 9절입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부정부패 속에 세워진 금령은 다리오 왕의 욕심에 의하여 끝내 선포가 되어버렸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이런 모습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남이 잘되는 모습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축하해주고 또 도전의식을 받아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 그리고 심할 경우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합니다. 다니엘에서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들었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보아도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남이 잘 되는 모습에 박수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또 이 모습은 흔히 하는 속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입니다. 또 한국소설 ‘흥부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놀부다 제비다리를 고쳐주고 엄청난 복을 받자 이마저도 흥부가 아니꼽게 보며 질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많은 곳에서, 또 상황에서 우리는 남이 잘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중에 다니엘은 감사]
실제로 많은 이들의 질투를 견디지 못해 좋지 못한 선택을 하는 사례들을 종종 접하곤 합니다. 다니엘은 어떤 선택을 합니까? 10절을 보니,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정말 다니엘은 대단합니다. 그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전에 하던 대로 행동합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니엘도 큰 유혹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금령을 보면 기한이 무기한이지 않습니다. 30일이라는 기한이 딱 정해져있습니다. 딱 30일만 눈감고 참으면 모든 문제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30일 제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던대로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저는 신사참배때의 상황이 그려집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딱 한 번만 눈감고 ‘예수를 부인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거부하며 투옥과 석방을 반복 또 반복하다 끝내 1940년 목사직을 박탈당하셨으며 1944년 옥사하며 순교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을 설립하신 한상동 목사님도,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를 외친 안이숙 사모,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려 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옥고를 치루셨던 조수옥 권사님 등이 계셨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은 거꾸로 매달려 고춧가루를 물에 타 눈과 콧구멍 등에 넣으며 각종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라며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치며 믿음을 지켜나갔다고 합니다.
이들처럼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딱 한 번, 눈 딱 한 번만 감고 지나갔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다니엘은 신사참배때의 믿음의 선배들처럼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금령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참된 진리를 알았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써 결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 다니엘]
다니엘은 그런 믿음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저 고향이기에, 향수병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다니엘은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과 9장을 보면 솔로몬이 첫 성전을 봉헌할 때의 기도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라 하겠지만, 어찌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여기에 둠으로 이스라엘 백성 누구든 주님께 간구할 것이 있거든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기만 한다면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범죄하여 환난을 당할 때에도 이곳을 향해 기도한다면 용서하여 주시옵고, 모든 환난으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솔로몬의 기도를 근거하여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뽑아내신다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성전도 바벨론 군대에게 무너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다니엘이 매일 기도하던 그곳에는 성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당장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하여도 미래에 다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로 그곳에 성전이 세워질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실천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신명기 12장 5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신명기 16장 2절,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신명기 26장 2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말들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성전이 세워지는 곳은 하나님께서 정하셨었고 또 오직 그 장소만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성전을 바라보며, 유일한 통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 지금 이 통로는 너무 중요했습니다. 자신에게 더 큰 위험이 다가왔고 하나님과의 교통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 : 요셉]
다니엘의 감사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쩌면 칼이 눈 앞에 다가온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택하였고, 더 나아가 감사함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인물들이 악조건 속에서 감사하며 나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채색옷을 입고 형제들을 찾으러 간 날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음모를 당해 감옥에 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애굽총리가 된 그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창세기 45장 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감사 : 욥]
욥은 어떻습니까?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칭함받던 자였습니다. 자녀복도 많았습니다. 아들도 일곱에, 딸이 셋이었습니다. 재물복도 상당했습니다.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겨리, 즉 천 마리, 암나귀 오백 마리에 그를 따르는 종도 많았습니다. 인간됨으로도 물질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부족함 없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탄의 시험에 의하여 자녀와 재물 그리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 그 누구보다 처참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욥기 1장 21-22절,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장 10절,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을 불쌍히 여긴 다리오 왕]
다니엘은 그랬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더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금령에 의하면 다니엘은 이제 죽을 목숨입니다. 하지만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매우 아꼈습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니,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다가 해가 질 때에 이르렀더라” 그를 어떻게든 살리고자 노력에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구원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택하여 끝내 사자굴로 던져지는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말하는 감사]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본 자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이 감사할 수 있었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킴으로 한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자 하나, 오늘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기도함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다니엘은 네 명의 왕을 섬기며 지냈습니다.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그리고 고레스까지. 보통 정권이 바뀌면 보직을 해임당하기 마련인데, 네 명의 왕을 섬길 수 있었음은 그만큼 다니엘이 일을 잘했다는 것이고, 모든 왕들에게 신뢰가 있었다는 것이며, 모든 이들로부터 인정받을만한 자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진짜 섬긴 왕은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말 섬긴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을 지닌 자로써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옵기로는 우리의 삶 속에 다니엘과 같은 감사의 삶이 주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믿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켜 실천하기에 까지 이르는 귀한 우리 청년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 다니엘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바라보는 자가 될 수 있도록
- 추수감사주일뿐 아니라 매일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도록
- 회복을 넘어 부흥의 주역이 내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