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3

마가복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6 views
Notes
Transcript
복음에 합당한 자
- 마가복음 2장 1~22절
오늘은 ‘복음에 합당한 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은혜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고정관념
“누구나 생각하면서 산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생각이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난 후 '의견'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의견'은 습관적으로 생각해 온 '의견' 즉 자기 중심적 '편견'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본 '선입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은 자기 나이만큼 키워온 개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개 이름은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이 글은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의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라는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글의 내용은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이라는 사각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가끔 유튜브를 보면 한국과 다른 나라의 문화를 비교하는 영상을 접하게 됩니다. 그 중 기억나는 내용은 미국의 한 대학 수업에서 한 아이가 다리를 꼬고 껌을 씹으면서 수업을 듣는 영상이었는데요. 많은 댓글들이 이를 두고 갑론을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기에 무엇이 옳은 지 그른 지, 평가할 수는 없는 내용이지만, 우리는 간혹 다른 나라에 갈 때에 문화차이를 실감하며,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왔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유대 종교 사회라는 사각의 틀 속에서 배우고 자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복음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며,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 지 깨닫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
(1) 중풍병자를 고치시다(1~12절)
오늘 본문의 내용들은 모두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사건들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더 기억하기 쉬운 내용들인 것이죠. 그 중 1~12절에 나타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은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한 번 들어도 잘 기억되기도 하지만,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서 임팩트가 있기에 더 잘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네 명의 사람보다 예수님을 보러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 유대 지도자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짐으로 인해 많은 곳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보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인정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마가복음 2장 5절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신 것에서 일어납니다. 이 말이 문제되는 이유는 7절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죄 사함은 하나님의 권한인데, 예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니 신성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9절 말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막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사실 저는 엄청 고민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권한인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역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란 확신이 있지 않으면 도무지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둘 다 저에겐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어보였습니다. 물론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을 먹을 경우에는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가 아무래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선포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아무튼 둘 중에 어떤 것이 쉬운 지에 대해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선포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한인 것만큼 병 고침 또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맹인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9장 2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이처럼 1세기 당시 유대 문화는 병에 걸린 이유를 죄에서 찾았습니다. 그렇기에 병의 나음 역시 죄 사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으로 보면, 죄 사함과 병 고침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시선으로는 죄 사함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에, 말로만 봤을 때는 사람들 앞에서 죄 사함에 대한 선포가 쉽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치유의 역사는 육적으로 일어나야 되기 때문이죠. 행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10절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큰 기적인 것이죠. 그들은 중풍병이 하나님께서 치유하지 아니하시면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그들로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까지 감찰하신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음에도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변치 않음을 봅니다.
(2) 레위를 부르시다(13~17절)
두 번째 사건 역시 예수님의 행동에 딴 지를 거는 사람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심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집니다.
그들의 율법으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먹는 것 역시 죄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죄인들과 로마정부를 위해 동족의 혈세를 걷어가는 세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같이 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교에는 크게 두 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토라와 구전율법인데요. 토라는 모세오경에 나타난 법률을 말합니다. 모세오경에도 많은 법들이 있지만 그 중 십계명이 대표적인 예죠. 두 번째로 구전 율법은 토라에 대해 랍비들에 의한 해석으로 만들어진 법률을 말합니다. 구전 율법은 종료가 많지만 미드라쉬와 탈무드가 그 중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전율법은 613가지 계명과 사람의 계명 또는 전통이라고 불리는 ‘미쉬나’라는 규율 등이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저명한 랍비들의 해석을 따라 행하였기 때문에, 오랜 전통 속에 지내온 바리새인의 서기관들 입장에선 저명한 랍비들을 따르지 않는 예수님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을 랍비들보다 못하게 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보다 뛰어난 줄은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따지지는 아니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집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신학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을 꾸짖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율법의 규례를 위반하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그들의 스승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이 손상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 17절에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우리가 의사를 찾는 것은 아프고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프지 않고 병이 없다면 의사를 찾을 이유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의인에게는 구원자가 필요없습니다. 그는 의인이니 자기 의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3절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에 노출되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에 누가 죄인이라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수많은 율법을 지키며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의롭게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율법을 지키며 성경을 연구한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난하며, 자기의 의를 과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롭다 칭하는 그들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강림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토라를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랍비들의 문학을 통해 배우고 읽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처럼,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심을 드러내시며, 메시야의 오심이 죄인들을 향하여 있음을 그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면 그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신다고 하셨고,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메시야가 이 땅 특히 유대 지역에 나신 것은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마저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인 동시에 율법으로 의로움을 매기는 그들의 전통 사회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전통을 지키며 살아감을 봅니다.
(3) 금식 논쟁(18~22절)
세 번째 사건은 금식논쟁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그 당시 금식에 대한 문화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해마다 대속죄일에만 금식하도록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식하는 일들이 잦아지게 되었는데요. 칠 일(삼상 31:13), 삼 일(에 4:16), 사십 일(출 34:28), 그 이외에도 자신이 기간을 정하는 금식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후,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했던 예루살렘의 지난 역사를 되새기며 이스라엘에서는 공식적으로 일 년에 네 차례 금식일이 선포되었고, 훗날 신약 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부족하여 주 2회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 기간으로 정하고 금식하였습니다.
금식이란 본래 국가적인 재난 또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선한 의미에서 실시되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변질되고 퇴색되어 금식이 의와 경건의 척도로 사용되어버렸습니다.
18절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만 봐도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오랜 전통에 녹아져 있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우리 19~20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막 2:19~20)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는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왜 안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혼인 집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정 반대적인 상황이죠. 금식은 슬픔과 애통함이 존재합니다. 국가적인 재난이나 참회할 때 금식을 하죠. 그러나 혼인 집은 축하하고 기쁨의 장소입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떠들고 기뻐하는 공간에서 금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특히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더욱 같이 기쁨을 누리며 기쁨의 순간을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인집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혼인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슬픔과 애통함이 거하는 곳이 아니라 기쁨과 축제의 현장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인 20절에 신랑이 빼앗길 날이 이른다는 내용은 이상합니다. 혼인 집의 주인공인 신랑이 빼앗긴다는 것은 뭔가 맞지 않습니다. 유대 결혼 풍습에서도 신랑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님들이 떠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20절의 말씀은 충격적이라는 것이죠.
또한,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빼앗길 날이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신랑이 빼앗긴다면’이란 문구도 아니고 ‘신랑이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명시했습니다.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말씀하시며 금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곧 대속사역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곧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금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고통과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불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배나 더 열심히 지켰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며 가르치기에 더 많은 성경의 내용을 숙지했을 것입니다.
처음에 금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는 대속죄일의 금식만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날은 모든 사람이 금식하며 지켜온 법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었죠. 구약에서 금식이 요구되는 유일한 날일만큼 어떤 날보다 중요한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이 하시는 일들을 체험한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눈에 가시라고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3. 결론
우리는 3가지 사건을 보았습니다. 3가지 사건에는 언제나 예수님을 비방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기관이든, 바리새인이든, 요한의 제자이든, 어떤 사람들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비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 곧 바리새인 등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툭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들의 전통으로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자기들의 율법을 더하여 지키지 않으면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방거리도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 부정해진다라던지, 주 2회 금식을 해야한다던지 등 바리새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들은 모세오경을 따르는 율법이 아니라 랍비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내놓은 구전 율법들입니다. 그렇기에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지켜야하는 율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죄인 취급하며,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자들 역시 정죄하는 모습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오만한 지를 보여줍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절을 통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마가복음 7장 8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말씀하심을 봅니다.
우리는 3가지 사건을 통해 1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사역 등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관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속죄로부터 벗어나게 할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를 원했기에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낡은 전통이 그들 자신을 예수께로 나아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가복음 2장 21~22절 말씀” 읽겠습니다.
“(막 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위해선 그들이 만든 낡은 전통들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기 위해선 스스로 해석하고 만들어 놓은 성경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바라고 믿고 원하는 것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올바르게 캐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자기 생각과 잣대로 판단하여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유럽에서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초월성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그들만의 해석으로 풀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위대한들, 하나님만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과학과 지식들로 이론들을 만들며, 자기 나름대로 우주의 존재, 탄생, 법칙 등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연구한들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식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넘어서는 성경 구절이 있으면 소설로 취급해버리는 일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보면 예수님의 초림 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오늘날 모습이 오늘 우리가 본 그 당시 문화 곧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계명을 중시하는 시대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22절 하신 말씀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낡은 부대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우리 역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자기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은 결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7~8절 말씀에 자신이 갖은 명예, 지식, 출신 등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의 젊은 날들을 바리새인으로서 모든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살아온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을 접한 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낡은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담는 새 부대가 되었습니다.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우리가 그 지식을 온전히 받아드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을 아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주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등 하나님에 대한 것을 지식적으로 숙지하였다고 해서 믿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나의 주인이심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알았더라도 내 삶에 내가 주인 노릇하며, 내 뜻이 우선되고, 내가 하나님인냥 살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컵 안에 더러운 물이 있을 때, 더러운 물을 버리고 컵을 씻고 깨끗한 물을 따르고 마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더러운 죄들을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 분의 말씀을 겸허히 받아드리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자세이며, 새부대로 거듭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부대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여전히 주님을 멀리하게 만드는 의심이나, 교만, 전통 또는 복음보다 더 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런 고정관념들이 있다면, 버리고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