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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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보다
막 4:35~41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주심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우리의 이해로는 알 수 없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즉,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할 때, 우리는 말씀에 더 집중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깨닫는 지혜와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그냥 두시지 아니하십니다. 더 많은 것들을 부어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끔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에 해당하였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 당시 누구보다 더 많은 은혜를 누렸음은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고 또 많은 사역들을 같이 함과 같이 저와 여러분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이끄심에 동참함으로 많은 은혜를 누리길 소망합니다.
무리를 떠나시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니, 벌써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비유를 베푸시고 가르치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충분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기에,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들이 무리를 떠나는데, 많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그들을 볼 때, 예수님을 따르기조차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봅니다. 그들은 날이 저물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떠나시니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놓고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저는 그 이유에 대해 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것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보다 자신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과 달리, 무리는 자신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자신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예수님보다 크게 느껴지거나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도 우선순위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지 판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들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구원해주러 오신 예수님이 가장 중요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사,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과 같이 사역을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을 신뢰하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 중에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음을 느낍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어느새 주님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도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람을 친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몇 년이 돼도 연락하지 않는 사람을 친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자주 만나고 자주 이야기할수록 더 돈독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볼수록 하나님께 기도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비록 그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보낸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리게 될 것이며, 우리 삶이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는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2. 풍랑을 만나다(37~38).
그러나 37절을 보니 믿음의 길로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바다 위의 큰 광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삼킬 듯한 사나운 풍랑이죠.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결코 탄탄대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알지 않습니까? 고난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고난에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가나안 정탐사건을 보면 출애굽 1세대들이 거인을 보고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가나안 정복을 포기합니다. 축복의 땅을 앞두고 포기합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내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제외하고도 약 200만 명이나 되는 그 많은 수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결국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난이 두려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면 출애굽 1세대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을 보십시오. 실패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합당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은 주님을 정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제자들이 사나운 풍랑에 두려워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물결이 배에 부딪히며 배에 물이 가득합니다. 배가 침몰할 지경입니다.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무서운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40절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말에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예수님을 믿지 않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믿음이 없다니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일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단순히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과 믿음은 다릅니다. 목사님이 저번에 믿음은 신뢰 곱하기 지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인 신뢰의 마음과 믿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선한 분이라서, 또는 그 분이 성인군자라서 그 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이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믿음으로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역시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에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누이로 속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이스마엘을 얻는 믿음 없는 모습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붙드시는 그 과정을 통해 그의 믿음이 성장하였고, 노년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들이 믿을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주권대로 제자들을 부르셨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환경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보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 들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본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병 고침과 축귀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보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그 분의 복음을 들었던 제자들이 사나운 풍랑 앞에 무서워합니다. 왜 그들이 풍랑 앞에 엎드러졌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8절에 그들의 외침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은 주께 대한 간청이 아니라 그들의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주께 대한 비난과 책망의 말입니다. 그 동안 주께서 제자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셨고 아끼셨으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다급해지자 주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봅니다.
사나운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음에 일어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 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사나운 풍랑 소리에도 예수님은 고요히 주무셨습니다. 배가 출렁이고 물이 가득차도 예수님은 평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바다 위에 부는 광풍은 아무리 예수님의 시선을 빼앗고자 해도 빼앗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무서운 바람 소리가 들려도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오직 우리를 향하여 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 예수님을 원망하는 목소리로 주님을 부르짖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부름에도 반응하셨습니다.
그리고 39절에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십니다. 사실 이 장면은 구약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40절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번 장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장면입니다. 마가복음 4장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가득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 등불 비유, 자라나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 등 대부분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지요.
마지막 역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하고 끝나야 할 듯한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사건은 이번 장에서 꼭 필요한 사건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면 마가복음 4장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말하며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최소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더 명확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께서 많은 비유를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만, 제자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자, 그럼 그들이 보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심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였다고 말합니다. 큰 광풍이 일어날 때보다 더 두려운 상태를 말하죠. 그들은 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사나운 풍랑보다 더 크신 분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본 그들의 고백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함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무작정 예수님을 따른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두 글자를 믿는 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을 무작정 따라간 제자들처럼 인격적인 신뢰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며, 그 분을 나의 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소유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전인격적으로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제자들이 보인 반응과 같이 심히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만물의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대신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그 길은 우리가 보기엔 사나운 광풍이 일고, 물결이 배를 덮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그 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의 기도를 친히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끝까지 그 길을 가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 그 날까지 주님 잘 믿고 모두 다 천국에서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