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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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1
- 막 10:1~16
1. 하나님 나라의 시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나라의 시민으로써 사회 규범을 지켜야 합니다. 한국인이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법과 도덕을 지켜야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그 사람의 지위가 높거나 가진 재물이 많다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써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해야합니다. 한국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고, 한국의 언어, 문화, 사람 등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전에 SNS에서, 선진국에서 우리나라로 일반귀화를 한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이 가족의 품을 떠나 많은 고생을 하면서까지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이유는 너무 간단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언어, 우리나라의 문화, 우리나라 사람들 등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해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백성들 등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2. 바리새인과 어린 아이
1)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자
오늘 본문을 보면 경건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2절에 예수님께 이혼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혼과 결혼에 관한 질문한 이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죠.
이혼 문제는 바리새인들 간에도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고 지금 예수님이 계신 지역에는 헤롯 안디바의 이혼과 부적절한 결혼을 책망하다 처형당한 세례요한의 문제도 있고 해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렇듯 민감한 문제였던 이혼 문제를 제기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4절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묻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5절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말하며 모세가 이혼을 자유롭게 허락했다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신명기 24장 1절에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혼증서의 목적은 이혼을 했다는 확인증이 아니라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안정장치입니다. 그 당시 사회는 일부다처제였기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는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혼증서가 있는 여자는 재혼할 수 있게 되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게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법이 변질되었죠. 이혼증서를 써 주면 합법적으로 아내를 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인을 보호하는 율법의 목적과 기능은 상실된 채 무조건 이혼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죠.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여인들은 이혼증서로 말미암아 쉽게 남성들로부터 버림받는 사회풍조가 만연됐고,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교묘하게 자기 입맛대로 바꿔 합법적으로 자기 아내를 버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치되는 일’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이혼 사유로 확대해석을 했습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밥을 태웠다거나, 아내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다닌다거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한다거나, 아내가 시끄러운 여자이라거나, 혹은 남편이 더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다면, 아내는 버려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편의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멋대로 해석한 것이죠.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5절 완악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생각을 더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혼 증서가 나오게 된 환경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유리할 때로 해석하려는 자들이야 말로 그 당시 법을 모르고 악을 행해왔던 자들보다 더 완악한 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시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창세기 2장 24절을 말씀하시며 결혼 제도가 인간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원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9절 말씀에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혼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죠.
예수님께서는 더불어 이혼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비판하시는 데, 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음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삼위 하나님의 관계적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들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동등하신 것처럼 삼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드셨다면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서로 동등하신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11~12절에 누구든지 아내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장가 또는 시집을 가는 자는 간음을 행함이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만드는 결혼 제도를 완악함으로 인하여 깨뜨리고 변질시키는 자들은 그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라 말씀하십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동등한 자로써 똑같이 잘못을 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바꿔버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가 어느 자리에 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자입니다.
2)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1~12절에 바리새인이 나온 것과는 반대로 13~16절에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나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달리 2천년 당시 여자와 어린아이는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사회 구성원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는 더 낮았죠. 그 이유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중요한 일에 성가시게 하고 정신을 산만케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3절에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 당시에는 아이들이 조기에 많이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면 아이가 이른 죽음을 면하지 않을까 해서 온 것이죠. 그러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고 막습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막은 이유는 아이들로 인해 예수님께서 쉬지 못하시거나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행동에 노하시며 “어린아이가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오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와서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1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연달아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선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유치성, 무계획성, 미숙성, 이기성, 무례성 등 안 좋은 점만 보고 그들을 무시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 곧 천진성, 순수성, 단순성, 겸허성 그리고 절대의존성 등을 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은 순수하여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말씀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말씀을 고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르쳐준 그대로 이해하며 실천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러지 않죠. 우리가 바리새인들을 보았듯이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고 자기의 유리한 데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무시한 체, 자기들만 생각합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귀찮다고 피곤하다고 오늘 한 번만 그냥 넘어가자, 생각하며 말씀에 불순종한다던지, 아니면 말씀을 내 유익에 맞춰서 자신만의 해석으로 자신의 행함을 정당화 시킨다던지 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서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이 아니죠.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명확한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며 올바른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욕심을 행하기 위해서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를 더 중요시하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굴복시키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들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말씀을 왜곡시키지 말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실천하는 겸손한 자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어린아이는 또한 의존적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죠. 또한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부모가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사소한 일이라도 부모를 찾고 부모에게 의탁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적 행동이 그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주님께 기도로 시작하고 주님께 의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자들,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들,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들, 말씀으로 자신의 유익을 계산 하지 않는 자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의 장점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앙의 순수함과 겸허함 그리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의존성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제자들의 행동을 통한 우리의 자세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바리새인의 교만함을 보았고,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겸허함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회구성원으로써 신분도 높은 위치에 있고 말씀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 또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금하지 못했죠. 그만큼 바리새인들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세력은 크고, 겉으로 경건하고 말씀에 대한 지식도 높았기에 육적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장점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꾸고 이용하는 그들의 교만함을 보셨습니다. 그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합당하지 않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당시 사회에선 어린아이들은 신분도 낮고 무시당합니다. 제자들도 오는 것을 막습니다. 그만큼 어린아이들은 철저하게 사회에서 미천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은 그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오게 만드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며 그들을 높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위협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다가 예수님께 축복받고 싶어 나아오는 아이들에게는 오는 것을 금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자들을 신분과 귀천에 상관없이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자는 우리가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적인 얄팍한 생각으로 복음의 통로를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과 잣대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 들어난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는 하나님께 칭찬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과 겸손함이 있는 지? 말과 혀로만 주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함께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자로써 여김을 받는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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