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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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막 3:1~19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들을 보면 다양합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고, 기도의 응답을 받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으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 예수님 믿고 달라진 가족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 부모님을 통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 등 사연들을 들어보면 기가 막힌 사연들도 있고, 그저 그런 사연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연이 되었든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실인 것이 중요한 것이죠.
오늘 본문도 다양한 존재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자도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과는 반대적인 경우죠. 같은 곳, 같은 상황 속에서 누구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누구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정 반대의 상황인 것이죠.
1. 예수님을 대적하려는 자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에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율법에 매여, 죄에 매여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안식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그들에게 간접적으로 알리셨습니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이 치유 사역인 것이죠.
오늘 본문을 보면 3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병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었는데, 지금까지 치유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병을 고치기는 어려워 보이는 병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5절 말씀에 그 병자를 회복시키심을 봅니다. 그 전에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을 받았다면, 그 사실이 놀랍고, 병이 치유되었음에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오늘 본문은 1장과 2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1장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실 때는 예수님께 놀라며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음을 봅니다.
그러나 2장에 오면서 약간 분위기가 달라지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종교 지도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관찰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 분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편인가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그들은 처음에는 속으로만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자신의 속마음이 걸렸음에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쳤음에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2장에서 죄인들과 같이 먹는 예수님을 보며,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며, 이들은 우리와 다르구나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는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깨뜨리는 예수님을 적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가 주시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그들이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죠. 덫을 쳐놓고 기다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재밌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 세운 것이죠. 그리고 그들에게 역으로 질문합니다.
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막 3:4)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의 질문은 어린아이도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문제인 것이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잠잠합니다. 그들이 잠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의 율법은 안식일에는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역시 일이기에 금지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 역시 일이기에 금지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악을 행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납니다.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그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잠잠한 것은 그들이 어떤 말을 해도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맞다고 하면, 손 마른 사람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예수님을 고발할 수 없게 되고, 반대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하는 악을 행하라고 하면, 율법에 어긋나므로 그 역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옳고 그른 지를 알면서도 잠잠해 하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에 예수님께서 노하시며,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십니다.
사람이 얼마나 완악한지 예전에 제 자신을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도 이단에 빠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실 것입니다. 이단에서 기독교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자꾸 세뇌를 시키는데, 처음에는 면역반응처럼 목사님을 옹호하다가도 어느 순간 설교가 들리지 않고 말실수나 꼬투리를 잡기 위해 설교를 듣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본문을 보니 그 때 생각이 납니다. 마치 바리새인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잡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은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가르치시는 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옳지 않은 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예수님이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음에 분노를 표출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악했다면,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고 선을 행하셨습니다. 그 누구에게 잘못할만한 일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정죄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려하고 선을 행하려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지난날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들의 조상들을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헤롯당은 헤롯 왕정과 로마 법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로마에게 협력하는 정치세력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유대교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에게 해방되기를 원하는 세력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둘은 결코 친하게 지낼 수 없는 관계인 것이죠.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려는 예수님과 안식일에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누가 선을 행하고 누가 악을 행하는 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들이 서로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까지도 품기 위해 노력하셨으나, 그들의 완악함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리지 않게 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2. 주님을 따르는 자들(7~12)
그러나 6절과 상반되게 7절을 보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은 8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듣고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역을 보면 갈릴리 뿐만이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 등 여러 지역에서 주님께 나아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소문이 전 지역에 퍼졌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이 심화될수록 예수님의 소문 역시 전 지역에 퍼짐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몰려온 이유는 10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수많은 무리 중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하며 나아온 자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예수님의 소문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다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오직 병을 고치시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이 아니라 자기의 사업이나 건강 등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행히도,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병이 치유되고 망하던 사업이 다시 일으킨바 되어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면 좋은 일이겠지만, 주님의 그런 은사를 맛보고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주님을 멀리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11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들을 듣고 보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죠. 그들의 목적은 애초에 병 고침에 있었으니 말이죠.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아셨지만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만 그들을 피해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배를 준비하신 이유는 배에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에게도, 자신을 이용하려는 자에게도, 편애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동일하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오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를 보면서, 예수님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할지라도, 겉으로만 예수님을 따르는 척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제자의 모습이 아님을 봅니다.
3.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 중 열둘을 세우십니다. 유대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성취되는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두 지파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를 세움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를 세우심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장면이죠.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신 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는 자들입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주권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장면인데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어떤 자격과 재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심을 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중에 누구도 자신의 뜻에 따라 된 사람이 없습니다. 또 자신의 공로나 노력으로 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다 주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서로를 정죄해서도 안 되고 자기를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과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그 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제자의 삶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첫 번째,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평생을 함께 하는 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사역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함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과 동거동락하면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대속사역이 가까이 왔을 때에는 함께하는 삶 곧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심을 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잘 나타나있는데요.
여기에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축약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이며,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말하며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에 모든 것이 담겨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시고 마지막까지 그들을 사랑하사 자신이 떠날지라도 자신과 함께하는 연합의 삶을 가르쳐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두 번째, 그들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1장 38절에서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귀신이 공존할 수 없듯이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됨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곧 계명과 사명, 이 두 가지는 제자의 삶의 기본이 되는 지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로써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닙니다. 좁고 협착하며, 고난의 길입니다. 그대로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할 것은 우리와 비슷한 성정의 사람도 이를 해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열두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뽑으신 열두 제자는 한결같이 유력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비록 보통 사람이며, 심지어 연약하고 다양한 성향을 지닌 자들이었지만, 그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더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매일매일 주님께 나아가는 삶을 산다면 제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 마치고 주님 품에 안긴 것처럼 우리 역시 항상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면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주님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주십니다. 2달란트의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5달란트를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받은 재능에 따라 최선을 다할 필요는 있습니다. 1달란트 받은 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승리의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에 가면 갈수록 점점 지치고 쓰러지고 싶고 내가 이것을 왜 했나 싶지만, 결승점이 점점 다가올수록 우리가 힘들어도 희망을 가지고 뛰는 것처럼, 비록 지금 내 안의 죄된 본성과의 싸움이 힘들고 어려울 지라도 하루하루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대하며,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반드시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아픔들을 다 위로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밤이 깊을수록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지금 세상은 마치 캄캄한 어둠에 있는 것 같이 곳곳에 많은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더 깨어 근신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는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지만, 자신의 뜻과 다르다는 이유로 주님을 대적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주님을 이용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을 어떤 분인지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려고 하지도 아니하는 그들의 오만함이 결국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들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어부출신, 세리출신 등 유력하지 않고 심지어 연약하고 다양한 성향을 지닌 자들을 택하시며, 그들을 이끌어가심을 봅니다.
이 시간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주님, 우리를 택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무것도 잘난 것 없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 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 우리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제목과 각자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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