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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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의 축복”
막 7:24~37
1. 숨길 수 없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오자 그들과 잠깐 쉬려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아본 무리들이 가만두지 않죠.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가르치시고 먹이시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이후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쉴 새 없이 일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이방 지역인 두로의 한 집에 들어가 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잠깐 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 동네가 숨겨지지 않는 것처럼, 하늘 위에 태양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숨겨진다고 숨겨질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어느 새 퍼졌고, 이에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 예수님께 나아가는 이방인의 믿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이방인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앞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보았죠.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자들이죠. 또한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며, 수많은 소문들을 접한 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방인들보다 훨씬 예수님을 믿기에 유리했던 자들이죠.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고 배척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죠. 우리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했다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2가지 사건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는 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수치를 이겨낸 믿음
첫 번째,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나아간 믿음은 수치를 이겨낸 믿음입니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모르는 사람에게 간구하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간구하는 것이죠. 그 근거로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은 부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부정한 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과 말도 섞기 싫어하죠. 심지어 이방인을 개 취급 합니다. 자신들을 싫어하고 개 취급하는 그들에게 간구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자신을 모욕하는 그런 족속에게 누가 간구하고 싶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께 간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면 낫는 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수치를 무릅쓰더라도 예수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기 싫어서,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기기 싫어서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자신의 영광,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김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죠.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달랐습니다. 비록 자신이 유대인으로 나신 예수님께 가면 개 취급을 받을 줄을 알고 있었죠. 모욕을 당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만이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수치를 이겨내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죠.
2) 주님의 말씀에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
두 번째,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나아간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발 아래 엎드리며 간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27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정말 모욕적인 말입니다. 자신을 개로 취급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 3자인 우리가 봐도 너무 아픈 말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우월함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지라도 이 말을 직접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알고 가도 아픈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여인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시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이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그 믿음 곧 그녀의 대답은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참으로 놀랐습니다. 28절 같이 읽겠습니다.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 말하며 인정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의 뒷말이 달라졌겠죠.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걸렸고, 자신 또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간구합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내게도 은혜를 베풀어주라는 것이죠.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 행위이죠. 주님께서 내 딸을 고치실 줄을 믿습니다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말씀하셨지만, 같은 사건인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니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감을 봅니다. 여자의 딸이 고침을 받은 것은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3) 예수님을 전파하는 믿음
세 번째, 이방인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간 믿음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두 번째 사건을 보면,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와 예수님께 간구했다면, 두 번째 사건은 사람들이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1대 1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죠. 아무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자녀까지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병든 자를 데려온들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면 그는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33절에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병 고치는 기적을 은밀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병든 자와의 인격적인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병든 자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로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죠.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또한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병 고치기 전 그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을 고치시면서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믿음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하죠.
예수님은 36절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경고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쁘기 때문에 전파하는 것이죠. 우리 마음에 그런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예수님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돈을 받고 전파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했는데도, 예수님을 널리 전파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모습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이죠.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3. 에바다의 축복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님 한 분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선, 내 안에 주님이 주관하셔야 합니다. 내 자존심을 세우고 내 욕심대로 행하며 살아간다면 그 당시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았고, 자신의 부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예수님을 싫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면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사라지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하는데,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모욕적인 말을 들을 지라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보다 크신 분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고난과 수치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비록 자신에게는 아프게 들리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딸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내 멋대로 살면서, 내 자존심 세워가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찌 예수님을 주로 인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낮아지고 주님은 높아지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나는 보이지 않고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36절에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전파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자기 자신을 드러냈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37절의 내용이 달랐겠죠. 37절을 보면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전함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전해들은 것입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잘난 체하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죠. 그러나 예수님을 자랑하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이면 예수님이 가려지기 때문이죠.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작아질수록 자신이 낮아질수록 예수님이 크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아직 내가 크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가, 내 욕심이 크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 모습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죠. 내 모습이 이와 같다면,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만이 우리를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시기 전, 그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영적 상태를 고침 받기 전, 예수님과의 관계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선 우리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에바다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 나음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영적인 귀가 열리고 영적인 입이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귀가 열리게 되면 주님의 말씀을 더 잘 듣게 되고, 우리의 영적인 입이 열리게 되면 주님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가득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목표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주님을 향한 마음이 가득 넘치면, 주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금지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주님을 자랑하고 내 안에 주님이 드러나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고 수치의 길이고 부끄러움의 길이더라도 주님을 믿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길 끝에는 찬란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목적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에바다의 축복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보게 하시고 주님을 자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주님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