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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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길
- 막 8:27~9:1
지난 주 우리는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맹인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아둔한 마음까지 고치심을 봅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수 많은 가르침과 수 많은 기적을 보고도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치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해보입니다. 우리 역시 뒤돌아서면 주님을 잊어버리고 내 생각과 내 뜻을 행하여 열심히 죄의 길을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족한 것이 우리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드러내시고 기억나게 하셔도 조금만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죄된 본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물으십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 하느냐?” 우리가 이 질문을 생각하면서 주님에 대한 정체성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그에 대한 고백을 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제자들이 고백한 그 내용들을 같이 고백하고 우리 삶 가운데 날마다 그 고백이 나오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매순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를 소망하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오늘 본문의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 근처의 마을들입니다. 헬라 및 로마 문화의 중심지로 이방인들이 사는 거주지역이죠. 그 지역 마을들이 다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인데, 예수님께서 왜 이쪽으로 오셨을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을 좀 더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벳새다나 유대지역은 많은 유대인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기에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방 지역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죠.
우리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시끄러운 데서 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 가이사랴의 주변 마을로 가신 이유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이번 본문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알려주기 앞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어보실 때도 그들의 부담과 어려움을 이해하시고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시죠.
처음부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았다면 대답하기 힘들었겠지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자, 제자들이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그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28절에 제자들이 함께 이야기 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심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라는 개념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도까지는 인식을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명확하게 알지 못함을 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질문을 바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시자, 제자들이 대답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이는 제자들은 모르고 베드로만 알아서 베드로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대표로 대답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대표로 말한 만큼 제자들이 심사숙고하고 대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를 고백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죠. 우리는 마태복음 16장 17절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과정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들을 때마다 놀랐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나 같은 강퍅한 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다는 사실이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죠. 우리가 기쁘고 감사할 내용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이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가족에게, 친척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술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일으킬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메시야의 비밀 곧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고백하심을 듣고 제자들에게 이 일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는 이유는 아직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포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2.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힘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은 그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메시야 대망사상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 이후 점차 발전하게 되었죠. 오랜 시간 동안 속국으로써 고통을 받으면서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메시야 사상이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고난 받으신 종으로써 오실 메시야, 하나님의 성육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 영원한 통치자 등을 예언하지만 그들은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나라를 되찾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시킬 왕을 원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행동들이 유대인들의 눈에 보기에는 메시야처럼 느껴지지가 않았죠. 기이한 일이죠. 성경의 예언처럼 맹인이 눈을 뜨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욕심에 의한, 왜곡된 시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사상을 버리지 않음을 봅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마가복음 10장 35~37절 말씀인데요. 마가복음 10장 35~37절의 내용을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구하죠,
37절에 보면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말은 장차 올 메시야의 왕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사상을 가졌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영광의 왕국을 건설하시고 왕으로 통치하실 거라는 것을 믿은 것이죠. 이 말은 들은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왕으로 대접 받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죠. 그렇기에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자기를 왕으로 세우려는 백성들을 떠나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사상과 똑같이 생각하심을 아시고 그들에게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역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밝히십니다. 3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합니다. 이 항변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에피티마오로 ‘비난하다, 꾸짖다, 견책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큼 베드로가 거세게 예수님을 반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반대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33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사탄이 베드로에게 틈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제자인 베드로에게 들어와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인 베드로는 사랑하였지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에 틈탄 사탄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 말씀하시며, 여전히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3.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영광의 삶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영광의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고난과 수치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 이 삶은 죄된 생각, 욕심 등을 억제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삶입니다. 이는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이죠. 내 모든 결정의 권한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자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생각이 다를 때, 기꺼이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자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에는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정말 나에게 허락하신 일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주님께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고민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사인이 분명할 때에는 우리는 고민해서는 안됩니다. 고민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의 자아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내 자아가 강한 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자. 자존심이 강한 자, 욕심이 많은 자, 쾌락주의 자 등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는 자들은 자기 부인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마주한 자는 자신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세상에서 좋은 스펙들을 가졌지만, 예수님 앞에 서자 자신의 것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죠. 우리도 크신 주님 앞에 서면, 우리가 그동안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창피한 것이었는 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었는 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나의 비참함을 보고 주님께 나아감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끝이 아니죠.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들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주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데, 심각한 범죄자들은 얼굴을 공개하죠. 언론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전국에 얼굴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입술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죠. 수많은 댓글의 모욕을 당해야하고 수치를 당해야하고 형벌을 받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죄의 대가가 이러한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였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였고, 죄의 형벌을 앞에 둔 자였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자였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사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 십자가, 나를 위하여 죽임 당하신 그 사랑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은 수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2천년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무시하죠. 우리를 이상한 취급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같이, 우리 또한 어떤 고난과 수치가 있을지라도 주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 3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죠. 3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5절에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 고난의 길이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안됩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한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숨마저도 잃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에 대해서 35~36절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목숨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아신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땅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영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약속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영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만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죠. 고난과 수치와 죽음이 동반되는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죄된 본성을 지닌 우리에게는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모두 다 겪으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결과를 우리가 알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심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오실 것을 알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여 목숨에 위협을 받는 일이 없죠. 신앙생활을 편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는 죄의 유혹에 많이 노출되어 있죠. 우리는 그 유혹들 가운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내 생각이 주님의 뜻보다 앞서간다면 33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십니다. 그 때에 내가 평생에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고백해야되지 않겠습니까? 38절 말씀처럼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그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그 영광의 은혜를 얻었으니, 앞으로 영광 중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과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죄의 유혹들을 물리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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