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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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족
막 3:20~35
가족이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공동체이자 가장 끈끈한 공동체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가족보다 중요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엄청난 애정을 과시합니다. 그만큼 가족이 우리에게 끼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가족보다 소중할 수 없고,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가족에게 일어난 급한 일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일이라면 어느 사회에서도 인정해줍니다.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가족에 대한 일이라면 말이죠.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녀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다 아는 사실이죠.
저 역시 가족의 관계가 끈끈하다고 느끼는 것은 비록 사소한 일에 다투기도 하지만, 언제 다퉜냐는 둥 다시 화목해지고, 서로 용납해주고 이해해주고,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주고 또 먼저 달려가는 이런 관계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가족 공동체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가족 공동체의 관계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와 비슷하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그만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그런 공동체가 없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그런 곳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가족도 이렇게 참 소중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한데,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 된 영적 가족은 어떨까요?
우리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대해서 알 순 없겠지만, 어떤 자들이 우리 영적 가족이 되는 지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영적 가족들은 어떤 자들인가? 살펴보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적인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나 돌아보시면서 말씀을 보길 소망합니다.
등장인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등장인물들은 총 3부류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가족, 두 번째는 서기관들, 마지막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죠.
1) 예수님의 가족
먼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사역하기 전 약 30년간을 같이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집안의 장남이었던 예수님이 갑자기 집을 떠나 복음을 전파하러 다닌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나 성경을 따로 배운 적도 없고, 목수 일만 한 했던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치유 사역을 한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는 것이죠.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을 때에도 가족은 예수님을 찾으러 온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1장부터 살펴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얼마나 멀리 퍼져나갑니까? 온 갈릴리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퍼지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갈릴리를 넘어 예루살렘 살렘 사람들까지 예수님에 대해 알았다면, 이스라엘 전역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이 선지자다, 메시야다, 이런 저런 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기사와 이적들을 듣고도 예수님을 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오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보고 자라온 형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은 것이죠. 오히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그들에게 더 사실처럼 들려졌을 것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함께해왔고 가장 믿어주어야 할 가족이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믿고 따르는 무리들과는 정 반대적인 모습이죠. 저는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는 사실에 대해 ‘예수님이 걱정되어서 예수님을 데리러 온 것이다’라는 뉘앙스보다 예수님이 가족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는 것이 조금 더 커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소문에는 예수님을 찾아가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미쳤다는 좋지 않은 소문에 예수님을 붙잡으러 갔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마음 한편에는 걱정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하지 않음을 봅니다.
2) 서기관들
두 번째로 볼 인물들은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22절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는 것으로 보아 갈릴리에서 여기저기서 모였던 사람들보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무래도 마가복음 3장 6절에 나온 바리새인들에게 보고를 받고 상부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병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사역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기적을 부정할 수 없었죠.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은 편이 아님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 곧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죄인들과 식사를 한다. 금식을 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기에 예수님이 자신들의 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만약 그들이 여기서 예수님을 인정한다면, 자신들이 지켜왔던 전통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맞음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의 문제점을 생각하지는 아니하고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을 적대하며, 예수님의 사역에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는 미쳤다. 그는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 그가 행하는 축귀사역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쫓아내는 것이다.’
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갈릴리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죠. 예수님의 사역을 본 적도 없는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비방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병고침과 축귀사역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만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율법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치부해버린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아내기 위해 유대 종교자로써 지켜왔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버렸습니다.
3)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지요. 그들은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으셨고 부르셨죠. 또한 그들은 14절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들이고요. 예수님의 사역들도 같이 하는 자들임을 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던 따라 다녔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것을 버렸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올인한 자들이죠.
2.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 누가 예수님의 가족일까요? 35절에도 나와 있지만, 그보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장 13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혈통이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데는 그 어떤 육적인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율법학자 출신이라고 해서 또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자들만이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 예수님의 가족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키던 서기관들은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치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온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면서도 귀신의 사역이다 모욕한 것입니다. 이에 23~26절에 드러난 예수님의 말씀은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축귀사역이 귀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것임을 반증한 동시에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역시 분쟁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죠.
다시 말해 예수님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면 분쟁할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분명하죠. 왜냐하면 병고침과 축귀사역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선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보다 강해야 하는 데, 귀신 중 사탄이 제일 강한데, 귀신의 힘으로 어떻게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사탄보다 강한 존재이신 하나님만이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죠. 본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비난할 수 없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가족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3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을 보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자들이 무엇을 행했습니까? 그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이나 잘라먹고, 금식도 하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했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요한복음 6장 2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다 지켜라, 성경학자가 되라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세리 등 사회에서 소외받는 자들에게 나아가셨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을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알겠지만, 병든 자들이 무엇을 해서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조건부로 치유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그들이 치유를 받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들의 일은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요한복음 10장 37~38절에 말씀하십니다.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예수님의 출신, 예수님의 외모 등 예수님의 외적 모습만 보고 예수님을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치유 사역, 축귀 사역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번에도 살펴보았지만,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데,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물어보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예전부터 유대인들은 병 걸림은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하였고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라는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병 고침이나 축귀사역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예수님 역시 이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들에게 나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믿지는 않을 지라도 내가 행하는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같은 본문인 마태복음 12장에서는 3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요.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을 알고 그들의 전통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과 부합되지 않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함으로 예수님께 무례를 범하여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일인지 알면서도 부정하고 성령의 역사들을 거역하는 일은 용서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인지 알면서도 거역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죄는 영원히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는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인데도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 또는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거짓소문을 내며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이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는다는 자체도 나쁜 일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죄들은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회개란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런 단순한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자복하고 죄의 길에서 돌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동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기쁘게 다시 맞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있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듯이 죄사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3. 결론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이라고 해서, 높은 직분과 성경에 대한 지식 또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가족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서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구주로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죄인이든, 그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사회적 소외계층이든 그 누구든 상관없이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똑같이 그를 자녀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공동체는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소망과 평안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서두에도 보았지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끈끈한 관계입니다.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남과는 다른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우리 안에서는 더 사랑의 모습과 선한 모습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처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우리는 서로 예수님 안에서 한 공동체임으로 서로에게 더 잘해주고 서로를 섬기려는 모습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가족은 닮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외적으로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같이 지내고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서로의 행동이나 모습들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가 부모를 닮아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죠.
가끔 아이들 육아 예능을 보면, 아이들이 부모님을 따라하고, 동생이 형의 행동을 따라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써 예수님의 가족으로써, 하나님을 닮아야 하고, 우리의 맏형 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본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예수님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아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의 은혜를 누구에게 나눠주시길 원하실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믿는 가족 공동체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올해 코로나19로 서로 많이 지쳐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힘들수록 서로 안부를 물어보고 연락한다면 서로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나는’이라는 찬양 가사를 보면,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의 가사가 있습니다.
저도 이 찬양을 볼 때마다 반성하게 되는 데요. 힘든 상황으로 오랜 기간 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성도님들도 있고, 아직 우리 교회에 적응하지 않는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모두 한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교회가 더 가족 같은 분위기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아무 일이 없어도 인사하고 연락하는 그런 친한 교회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수록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뭉치고 하나가 될수록 더 큰 사랑이 세상에 전달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선한 사역에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응원해주고 어떤 계기로든 함께 하는 그런 움직임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그 움직임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길 주님의 소망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분을 믿지만, 주님을 닮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부어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흐르게 하소서.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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