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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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중요성
- 막 7:1~23
1. 예수님을 쫓는 두 부류
예수님의 이름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두 부류였는데요. 한 부류는 제자들이고, 다른 부류는 오늘 본문에 나온 종교지도자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1)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께 올인한 자들이죠. 올인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죠.
2)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무리가 제자들과 같았다면 참 좋았을 것 같지만, 제자들과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곧 종교지도자들이죠.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위해서, 예수님께 먹을 것을 제공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써 높은 위치에 있었고 서민층들과 다르게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율법을 공부하며, 자기만의 확고한 지식을 가졌고, 가진 것도 많은 무리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쫓는 것은 예수님을 감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집요하게 쫓아다녔죠.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대적하게 된 원인은 예수님이 말씀을 잘못 전해서도 아니고, 예수님의 행동이 선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전통을 따르는 종교지도자들
서기관, 바리새인이 지키는 장로들의 전통은 구전율법을 말합니다. 구전율법이란 유대인들의 말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과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모세오경을 남겼는데, 모세가 모세오경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구전율법이라고 합니다.
입으로 전승되어진 구전율법은 모세 시대부터 입에서 입으로 내려와 에스라 이후 서기관들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구약성경의 권위가 맞먹을 정도로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구전율법을 강화시키면서 문제가 된 것은 구전율법의 목적이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전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전해진 것이었는데, 종교지도자들이 구전율법을 강화시키면서 그 목적이 인간의 생활 유익이 아닌 인간을 규제,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1) 전통으로 남을 평가함
그러면서 문제점들이 들어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전통으로 남을 평가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마가복음 7장 5절에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 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당신의 제자들은 전통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부정한 자이다라는 것을 말하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이죠.
우리가 계속해서 마가복음을 살펴보고 있지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정죄하느냐? 말씀이 아닌 전통을 가지고 정죄한다는 것이죠.
성경에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안식일에 병든 자를 치유하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 종교지도자들은 말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랍비들의 해석인 전통으로 정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통을 중요시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 때문입니다. 그 권리를 지키고자 전통으로 규제하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의로움을 과시하는 것이죠.
2) 전통을 말씀보다 중요시함
또한 전통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하다보니 전통을 말씀보다 중요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8~9절 말씀하시죠.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0장 2절을 통해 그 사실을 인정했죠.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다는 것에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목적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자기 의를 세우는 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전통을 말씀보다 중요시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10~13절에 이어 그들의 잘못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10~13절은 고르반에 관한 내용이죠.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림,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인 의미였습니다. 한 번 고르반이 된 것은 절대 다른 곳에 쓸 수 없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재산을 드린다는 것은 정말 믿음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죠.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인 지를 봅니다. 11절의 내용을 보면 “(막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1절의 말씀은 “내 재산은 앞으로 고르반이 될 것이기에 부모님께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내용인 것이죠. 즉,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부모를 공경하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0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하나님께만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이웃에게도 잘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 못한 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3.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전통은 지키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져버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6절 같이 읽겠습니다. “(막 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외식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자가 외식하는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5절에 보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14절에 보니 무리라는 표현을 보아 바리새인과 서기관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 상황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 따로 가서 예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 묻는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우리는 외식하는 자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5절에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마 6:5)” 말씀하십니다.
외식은 남에게 보이는 자들이기에 사람을 의식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울 왕이 있죠. 사울왕은 사람들을 의식하여 사무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이 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하는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결국 사울의 잘못은 무엇이냐? 사람들을 의식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남의 시선을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미지, 자기의 의를 위해서, 곧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 위해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을 보니,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약해집니다. 사람을 의식하니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행동은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도 은밀하게 하라 말씀하시고, 기도할 때에도 골방에 들어가서 하고, 금식할 때도 사람에게 금식하는 것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마태복음 6장 2절에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남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의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 갖추어지길 소망합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다보니 남을 정죄합니다. 5절에 나타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 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흠을 드러내어 예수님을 깎아내리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웃을 비방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자들이 이웃을 정죄한다면, 그 어찌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시편 101편 5절에 ‘자기의 이웃을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헐뜯고 정죄하는 것, 남을 비판하고 깎아내리는 행동은 결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가끔 정치권 사람들이 나와 토론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좋은 정책을 내기 위해서 한 발을 나아가야 하는데, 서로 헐뜯고 깎아내리기에 바쁜 것을 보면서 다른 채널로 돌릴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비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남을 헐뜯는 것이죠. 교만한 생각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4~5절에 보면 “(딤전 6:4~5)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말합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그 사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한 자는 자신을 높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타인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의를 자랑합니다.
반면, 겸손한 자는 어떠할까요? 빌립보서 2장 3절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자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에 남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남을 헐뜯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겸손한 자로써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길 원하십니다. 이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겸손하여 남을 정죄하는 죄악에 빠지지 않길 소망합니다.
결국 외식이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에서 기인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죠. 이러한 마음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5절에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4. 마음의 중요성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 15절 이하를 통해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박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 곧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곧 그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는 까닭은 아담 범죄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말하며, 사람의 마음이 부패했음을 알려주고 있지요.
또한 디모데후서 3장 8절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가 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를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부패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음이 부패한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부패한 자들은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 마음에 악한 생각이 가득하게 되죠. 악한 생각은 오늘 본문 21~22절에 나타난 죄악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악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명기 4장 9절을 보면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말합니다.
모세는 마음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끄신 일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의 죄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부패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가 되면 안되겠죠?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부패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부패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부패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 성령 하나님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곧 겸손과 순종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며 그들을 걱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떠나는 마음은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마음을 살피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물이 어떤 거냐에 따라 우리 마음 역시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보물이 이 땅의 것이라면 우리 마음 역시 이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물 곧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 마음 또한 하나님을 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잠언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항상 돌아보며,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