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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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을 이기는 방법"
- 막 6:45~56
믿음의 방해꾼
인터넷 뉴스를 보면 생각보다 많은 유명 연예인이나 선수들이 음주 운전, 도박, 마약 등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을 잃어버린 경우를 봅니다. 이런 뉴스들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공인으로써 아름다운 모습으로 열매를 맺으면 본인도 또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서로 좋을 텐데,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싶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또한 우리의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아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살아왔더라도 다시 주님 앞에 죄를 짓고 돌아서면 우리가 행한 공의로운 일이 하나님 앞에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막는 믿음의 방해꾼들이 있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걸고 넘어뜨리지 않습니다. 교묘하게 우리가 스스로 넘어지도록 우리를 유혹한다는 사실이죠. 우리를 죄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에 죄가 없었던 아담도 넘어졌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을 2번이나 하였고, 다윗도 밧세바 사건, 인구조사 사건 등 많이 넘어졌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은 죄를 지었고, 사도바울도 자신이 곤고한 자라고 말하며, 자신이 연약한 자임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유혹을 이기셨는데, 마지막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유혹을 이기시기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누가복음 22장 40절에 우리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유혹을 이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2. 유혹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넘어뜨리려는 유혹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유혹들이 그 당시에만 나타나는 유혹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유혹이라는 것이죠. 오늘 이 시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유혹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욕심의 유혹
첫 번째, 욕심의 유혹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요한복음 6장이 잘 나타나 있기에 요한복음 6장과 같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은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들에게 여러 말씀을 가르치시고, 또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때에 요한복음 6장 14~15절을 보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며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 세상에 임금이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죠. 그러나 제자들은 생각이 달랐죠. 마가복음 9장 34절을 보면 “서로 누가 크냐하고 쟁론”하기도 하고, 마가복음 10장 35~37절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구합니다.
그 시절, 제자들의 목표는 이 땅 위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줄을 잘 섰다고 생각했겠죠.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겠노라 생각했지 않겠습니까?
그런 욕심이 그들에게 몰려오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욕심의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사실 그 누가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누리며 살고, 마음껏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떤 누가 욕심이 없겠습니까?
그 틈을 사단마귀가 노린다는 것이죠. ‘세상에서 즐겨라, 세상의 것을 바래라,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라’ 이렇게 마귀가 속삭이는 것이죠. 이 유혹은 네 가지 밭 비유에도 나와 있죠. 네 가지 밭 비유에서 가시 떨기 밭의 내용을 보면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오는데요.
“(막 4: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재물의 유혹, 즉 욕심의 유혹에 휩쓸리면 결실을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꿈을 가진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욕심의 유혹을 가지고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 광염 모토 중에서 ‘돈은 사랑하지 말고 사용하자’가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많이 모아두고 살면 뭐합니까?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니,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욕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돈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행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의 자녀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두려움의 유혹
그런데, 문제는 유혹이라는 것이 욕심의 유혹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 49절을 보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두려워함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52절 말씀과 같이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잊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심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고 유령이라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을 보면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건들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 한 것도 두려움 때문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본 출애굽 1세대들이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한 것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한 그 외에도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나서지 않는 것도 두려움 때문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를 의지하는 것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거짓말하고, 포기하고, 도망치고, 다른 나라를 의지하였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도 회당장 야이로가 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두려움은 믿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으면 온전한 믿음 가운데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시며 그의 믿음을 붙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두려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야곱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에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믿는 백성들에게 항상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0절에서도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바람을 그치게 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죠. 이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다시 인식함을 의미합니다. 예전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재우셨음을 기억한 것이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두려움의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경제가 힘들고 감염병의 위협에서도 두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의지해야할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을 믿어 두려움의 유혹에서 벗어나길 소망합니다.
3) 게으름의 유혹(잊어버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유혹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게으름의 유혹입니다. 이 게으름의 유혹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유혹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나타난 게으름의 유혹은 기억하지 않음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날마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지 않으면, 오늘 제자들의 모습처럼 마음이 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잊고 산다면, 그만큼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게으름을 피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라고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안일해서는 안됩니다. 제자들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출애굽을 한 것이 보통 일입니까?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과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입니까?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이 걍팍해지고, 둔해지지 않았습니까? 제자들 역시 오병이어의 사건이 지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놀라우신 기적을 본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잊어버렸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한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은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55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진 것이죠. 그들은 보지도 않고 소문을 의지하여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물론 그들이 그만큼 열의를 가진 것은 살기 위함이죠. 그들의 삶을 위해서 멀리서도 달려오고 침상째 메고 나아오는 것은 대단한 부지런함이지 않겠습니까?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이렇게 부지런할 수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는 더 부지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부지런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게으름의 유혹을 떨쳐버리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게으른 자로써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서지 말고 부지런한 자로써 하나님께 기쁨으로 서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3. 유혹의 대처 방법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욕심의 유혹, 두려움의 유혹, 게으름의 유혹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죄의 길로 빠뜨리는 유혹은 한 두가지가 아니죠. 오늘 본문 말고도 수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런 죄의 유혹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 이끄는 유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처하셨습니다.
1) 유혹의 자리를 피하라
첫 번째, 유혹의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5절을 보면 제자들을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욕심의 유혹이 깃들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하시는 것입니다. 중독이라는 말이 있지요. 술 중독, 마약 중독 등 여러 중독들이 있는데, 우리가 중독에 빠지기 전에 그만두는 것은 쉽지만, 중독에 걸린 상태에서 그만두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욕심의 유혹에 깊이 들어가기 전, 미리 그 자리를 피하도록 제자들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의 자리를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는 영적 민감함이 있길 소망합니다.
2) 기도하라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을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이죠. 예수님은 46절에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셨지만,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질 수 있으며 어떤 유혹이 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어떤 유혹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치 못하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말씀하셨죠. 이는 기도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3) 기억함
세 번째 유혹에 대한 대처 방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억한다기보다는 기억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내 생각과 마음에 새겨지는 것을 말하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게 새겨지기 위해선 우리의 어떤 행위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죠.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실감할 때,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기억되어지는 것이죠.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 전부를 팔아 밭을 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우리 안에서 느껴지면,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내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느낄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죄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기억되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4. 유혹을 이기는 방법(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런데 죄의 유혹으로부터 대처 방법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유혹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바울도 로마서 7장 23절에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말하며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고합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 또한 항상 고민하는 문제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전략이 있어도, 그 전략을 실행할 수 없으면 그 전략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방법을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무엇이 필요하냐? 이 방법을 꾸준히 실행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만약 그랬다면 사도바울이 자신의 연약함을 그리 토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해야 합니다. 당뇨병에 걸린 사람이 당뇨 약을 먹듯이 우리 역시 죄된 본성을 지닌 존재로써 우리는 죄의 본성이 더 커져나가지 않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되어지진 않죠.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선 수많은 시도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반복을 많이 해야합니다. 먼저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우리 역시 죄를 끊어버리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만 끊으려고 하면 끊기 어렵습니다. 또한 반대로 우리의 노력이 없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성령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은혜를 갈망하는 동시에 우리 또한 그 은혜를 힘입어 최선의 노력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유혹이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삶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