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32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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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리는 삶
막 12:13~17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께서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신 목적은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종교지도자들이 악한 농부임을 알 수 있죠.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 싶었으나, 무리를 두려워함으로 예수님을 두고 갑니다. 그들이 무리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분파가 여러 개가 있었고, 그 중에는 서로 대립적인 분파들도 있는데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서로 앙숙 같은 존재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13절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사이가 안 좋은 분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집단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유대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헤롯당은 헤롯의 왕가를 지지하는 유대인의 한 당파를 말합니다. 헤롯 가문은 로마의 지지를 얻어 유대의 분봉왕이 되었기에 헤롯에게 줄을 선 많은 사람은 당연히 친로마 정책을 추종하죠. 반면 바리새인은 율법에 충실하며 전통을 고수하던 자들로 유대의 재건을 바라며, 유대가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였던 자들이죠. 즉 반로마 정책을 지향하는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가시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죠.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올무를 놓는데, 빠질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것이죠.
14절을 보면 예수님을 칭찬하고 한껏 높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칭찬한 말들을 보면, “선생님, 당신은 정직하시고,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칭찬을 보면 앞뒤로 반복적인데요. 먼저 선생님과 마지막에 가르치다라는 단어는 디다스코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고, 앞에 나오는 참되다와 나중에 나오는 진리로써가 알레데이아로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다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문장 안에서 같은 의미를 2번 반복을 하면 강조의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 당신은 사람의 어떤 외적인 지위와 권위에 휘둘리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된 것만 가르치는 분이시죠?’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판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준비한 질문을 하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여기서 가이사란 로마황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죠.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쉬운 것 같아 보이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골라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대다수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혐오했는데, 그 이유는 세금을 바치는 것은 유대 나라가 이방 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를 신격화 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만약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민족의 배신자로 몰아 유대 법정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세웠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많은 유대인에게 환호성을 듣겠지만, 로마정부에 붙어있던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끌고가서 로마 정부의 반역자로 몰아 로마법정에 세웠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어느 쪽을 골라도 곤란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칭찬하나 속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그들의 외식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기 앞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내게 접근하고 질문한 의도를 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 반항,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도전, 반항, 불신앙으로 인함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마가복음 12장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주인에게 반항하는 악한 농부들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드러내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기 앞서 15절 하반절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주화로 로마의 동전화폐, 은화를 말하죠.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노동자나 군인의 품삯이었는데, 신약 성경에 많이 언급된 화폐 중에 하나입니다. 그만큼 데나리온은 로마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많이 사용되는 화폐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동전을 보면 양 쪽에는 그림이나 글씨가 써져 있는 것처럼 데나리온에는 양 쪽에 그림과 글귀가 있었는데요. 데나리온의 한 쪽 면에는 올림픽의 승리자로 묘사된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흉상이 새겨져 있고, 테두리엔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가이사 티베리우스’라고 글귀가 써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면에는 가이사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올리브 나무로 된 신의 권좌에서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올리브 나무의 가지를 든 형상이 새겨져 있고 ‘지극히 높은 사제’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가이사의 어머니가 신이 내리는 평화를 가져오는 여인으로 상징화시켜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죠. 따라서 로마의 주화는 단순히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어떤 것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오라고 하신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내는 세금이 1데나리온이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는 세금을 걷을 때, 그들의 나라 돈으로 걷지 않고 로마의 돈으로 걷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 지역 사람들에게 로마 황제는 곧 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는 말씀에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가져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을 순순히 가져온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예수님께서 세금에 대한 답변을 하실 거라는 것이기 때문이죠.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은 데나리온을 가져오면서 예수님이 올무에 빠졌다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데나리온을 가져온 그들에게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데나리온의 새겨진 형상과 글은 로마황제의 형상이며, 로마황제에 대한 글이 써져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답변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17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그들이 매우 놀랍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어떤 올무에도 걸리지 않는 명쾌한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의 올무를 피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 중심이 어디 있냐는 것이죠?
우리는 저번에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종교지도자들의 실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베풀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가산을 삼키며, 억압했죠.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죠.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포도원의 소출을 바치지 않는 악한 농부처럼 자신이 성전의 주인처럼 행세했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며, 자신을 하나님 말씀 앞에 바로 서도록 노력해야 함에 불구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날에 원수 같던 이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그들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외식을 보시고 17절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말씀하시면서 ‘너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가이사의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않습니까?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 새겨진 데나리온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 새겨진 것이 곧 하나님의 것이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9장 6절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31장 33절을 보면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기록되어 있죠.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 새겨진 데나리온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형상과 법이 새겨진 우리는 누구의 것이라는 것이죠? 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7절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죠. 우리의 삶의 일부분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모든 초점이 하나님께 있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던지 내가 무엇을 하던지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이란 내 뜻과 내 생각대로 마음껏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일부분을 주님께 드리는 삶이 아니라 온전히 내 삶을 드리는 삶이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의 모든 방향이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이 말은 모두 목회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되는 부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내가 무언가를 부단히 노력해서 성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삶,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 힘을 쓰기 보단 먼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하나님의 영광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일이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힘이 나고 신이 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 지루하고 싫증나는 세상 일처럼 느껴지지 아니하고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놀이처럼 느껴지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삶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고 새 힘을 주고 영원한 기쁨을 주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보다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 분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알고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우리 삶을 드리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