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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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순종
- 마가복음 11장 1~11절
1. 예수님
10장 32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이 당할 일을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여리고가 있었고 거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셨죠. 그리고 오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 번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바로 들어가시지 아니하시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들어가지 않으시는 이유는 예루살렘 입성할 때,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제가 스가랴 9장 9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곧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근처 마을인 벳바게와 베다니에 들리신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예수님이 구약 예언을 이루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밖에 없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요.
메시야에 대한 구약 예언이 엄청 많은 거 아시죠? 약 3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구약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구약에 대한 예언들을 다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찾아보니 구약성경이 장 수로는 929장이고 절 수로는 23,134절이라고 합니다. 근데, 문제는 오늘날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마음껏 볼 수 없었다는 것이죠.
두루마리 값도 비싸기도 했지만, 회당마다 모든 성경이 있지는 않았고, 예루살렘 성전이나 랍비교육하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랍비교육을 받으려면 집안이 좋아야하죠. 목수나 어부는 배울 수 없는 계층이였죠.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경을 봐도 구약 예언들이 무엇인지 알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 어떻게 구약의 예언들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예언을 이루는 것이 쉽겠습니까? 어떤 예언은 잊어버릴 수도 있고, 어떤 예언은 하기 힘든 예언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어떤 예언은 결코 이루지 못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예언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한다던지, 갓난아기 때에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던지 이런 것은 우리가 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죠. 사람으로 오시기 전부터 사생애, 공생애 기간들을 지내시면서 그 모든 예언을 이루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전능하신 분임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1) 전능의 주(1~3)
예수님께서 예언된 말씀을 이루시는 것도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것인데, 오늘 2~3절의 말씀을 보면 주님의 전능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3절에 맞은편 마을에 가보지도 아니하시고 제자 둘을 보내어 그들이 해야할 일과 해야할 말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맞은편 마을에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부터 누가 그들에게 뭐라고 묻는 것까지 그리고 그들에게 대답해야할 말까지 알려주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능의 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지니 얼마나 놀랐습니까? 여러분이 맞은 편으로 간 두 명의 제자였다면 어떠했을까요?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가 있는 것을 본 것도 놀라운데, 사람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물을 때, 예수님께서 알려주신대로 “주가 쓰시겠다” 말하니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의 주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구원자(9)
또한 예수님은 9절에 보면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구원해주시옵소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구약 예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내용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서 대접을 받으러 오심도 아니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오심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죠. 먼저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할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하시며 그들에게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또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다를 잠잠케 하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시면서 이적을 보이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그 이름에도 의미가 담겨져 있지요. 예수님의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라 지으라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슬픔과 고통의 원인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 다윗 때와 같이 이스라엘의 전성기 시절로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말을 타고 오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약 천 년 전 시대 배경의 영화를 보면, 전쟁터에서 승리한 왕이나 장군이 성으로 돌아올 때, 말과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우리나라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죠.
3) 평화의 왕(7~10)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죠?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정확하게는 새끼 나귀를 타셨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데, 옛날 시대에도 왕이 말이나 마차가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였을까요? 나라가 평화로울 때였죠. 전쟁이 없을 평화로운 때에는 왕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며 백성에게 지금 시대가 평화의 시대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죠. 누구와의 평화일까요? 하나님과 우리와의 평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음으로 멸망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이 없었죠.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대속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죄인인 이 곳에 오사 죄인들과 함께 지내시며, 죄인을 섬기시고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심이 얼마나 우리에게 감사한 일입니까? 말을 타고 우리를 심판하러 오셨더라도 유구무언인데, 우리를 사랑하사 대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온유하신 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세상 나라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고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지만, 예수님은 세상 나라의 왕들과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낮은 자로 오사, 우리를 섬기시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순종
전능하시며, 구원자이시며,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본을 보이십니다. 순종의 본이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에게도 겪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외치지만, 그 길은 예수님께는 부당한 고난의 길이었죠.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았기에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힘든 길이라는 것이죠.
앞으로의 고난 곧 십자가 고난이 있을 줄 아심에도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를 사랑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고난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3. 순종의 원리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우리에게 순종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아무런 고난 없이 그냥 복 받는 마냥 좋기만하는 말씀은 누구나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가 뒤따르고 고난이 뒤따르는 말씀은 누구나 따를 수 없죠. 그만한 믿음이 동반되어야 하죠.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좋은 환경을 다 놔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는 최적의 환경이죠. 자기의 친족, 혈족이 있는 곳이기에 안전하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가족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이방 땅으로 가야하는데, 누가 모든 것을 버리고 고난을 자처하며 떠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죠.
우리가 마가복음 10장에 부자청년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던 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하니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결국 목숨 앞에서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순종의 본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나타내고자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고자 계속 기도하셨죠. 우리가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 기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주님이시지만, 하나님 앞에선 항상 자기를 낮추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길 원하셨습니다.
1) 겸손
우리는 이를 통해서 첫 번째, 순종에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이 없는 자를 교만한 자라고 말하는데요. 교만한 자는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자기를 최고로 여기며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합니다. 그렇기에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 예로 선악과 사건이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죠. 피조물인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8장 14절에 출애굽 2세대들에게 말하길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말하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기억하고 날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않기를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 분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인 동시에 나의 낮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 사랑
두 번째로 순종에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시고, 말씀을 읊조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치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순종을 이끌어낸다면, 사랑은 순종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일을 시키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똑같은 일을 시킬 때에 우리는 반응을 달리하죠. 나와 사이가 좋지 않는 사람이 나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지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시킬 때에는 자발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울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기울이려고 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이는 복종의 개념과 다른 것이죠. 자발적 순종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을 하는 복된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믿음의 수준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을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재밌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이죠.
4.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메시야를 환호하였지만, 예수님께 이 길은 십자가로 가는 고난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시는 그 고난의 길을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다. 첫 번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시켜줍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부당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구원의 길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순종의 끝이 영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은 다른 고난들보다 참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부당한 고난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도 참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에는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이후, 우리는 그들이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주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순교의 시대는 아니지만, 그만한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기억하는 겸손한 마음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참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임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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