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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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보다(2)
- 막 5:1~20
지난번 우리는 폭풍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폭풍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보면서 심히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구약에서도 자연을 다스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 모세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자연을 다스릴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니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 분이 우리가 믿고 있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성인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인간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선생님이 이것은 반드시 나온다고 말하면, 별표를 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우리 마음에 명확하게 새겨놓은 다면 무엇이 중요한지 헷갈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시는 사건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마가복음 1장에 한 번 나오지만, 1장 이후에도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축귀 사역은 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거라사 광인 이야기’를 1~20절로 많은 구절을 할애합니다. 평소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는 사건과 그렇게 다를 바가 없는 이 사건을 유독 길게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 분의 권위 있는 행동을 보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런 활동에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이신가? 정확하게 알지 못함을 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고 따르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한 사람으로 인식을 하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마가복음 4장의 풍랑사건 곧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과 바다도 잠잠해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새로운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오늘 거라사 광인 이야기는 복음서를 보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은 1절에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이 곳은 우리가 말하면서도 어떤 곳인지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요.
‘유대인의 지방이 아니라 거라사인의 지방이다.’ 이 말 자체부터 유대 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거라사는 ‘데가볼리’라는 지역에 한 마을을 말합니다. 그 곳은 이방인들이 사는 마을이죠. 우리가 이방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근거로는 유대인들이 볼 때,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 중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요? 거라사인, 귀신, 무덤, 돼지가 있겠죠?
이처럼 부정한 것 투성이인 ‘거라사 지방’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풍랑 때문에 잠깐 피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을 물리치고라도 이 곳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 곳에 오시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기 전부터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심을 보며 알 수 있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면서까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 곳에 왜 오셨을까요?
이 곳에 구원받아야할 한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는 3~5절에 소개를 하고 있는데요. 3~5절까지 나타난 그의 모습은 정말 비참한 모습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 그가 사는 곳은 무덤입니다.
그가 무덤 사이에 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방치되었다는 뜻이죠.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 최소 마을 외곽에서라도 살아야 할 사람이, 마을과 멀리 떨어진 무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과는 같이 있지 못할 형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무덤은 어떤 곳이죠? 죽은 자들의 시체가 묻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무덤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장소였느냐? 부정한 곳이요. 귀신들의 처소였습니다.
귀신들의 처소에 거처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이 사람이 귀신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족과 마을 주민들과 떠나 홀로 무덤 사이에서 귀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그런 인생을 살면서 더 끔찍한 사실은 아무도 그를 도와줄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고치려고 하지 아니하고 그를 묶어두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같은 사건인 마태복음 8장을 통해 그가 몹시 사나워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릴 정도로 그는 강한 귀신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5절 말씀인데요. 그가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인생을 지배하며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강한 능력으로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이 강한 귀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한 사람을 파멸의 지경까지 이끌어가는 악한 귀신이 6절에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 달려와 절을 합니다.
이 사실이 충격적인 것은 그동안 그 귀신은 무덤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해코지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더니 달려와 절을 합니다.
그리고 7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아무도 제어할 수 없고 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정도로 강한 귀신이 예수님께 달려와 절을 한 이유가 바로 7절에 드러나죠. 이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께 달려와 엎드려 절을 한 것이죠.
예수님의 정체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이번 사건이 처음입니다. 그 전에 마가복음 1장에서는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 예수여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하였죠. 이 때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을 꾸짖으시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막지 아니하십니다. 그 이유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무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허락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귀신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에 대해 의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거짓말을 잘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고 할 정도면 같은 세력에 있는 귀신들 역시 거짓말을 잘하죠. 그러나 이 귀신의 고백이 참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물리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도 보았지만,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물리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면, 그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빛 아래에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감출 수가 없는 거죠.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의 고백은 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와 같은 자연만물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데, 어찌 이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피조물이라면 그 누구도 결코 예수님의 말씀에 거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9절을 통해서 알 수 있죠. 고대 사회 전쟁터에서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은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어보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이기셨기에 가능한 것이죠.
이에 귀신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예수님께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귀신이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누가복음 8장을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누가복음 8장 31절을 읽겠습니다.
“(눅 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군대 귀신이 결국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귀신들이 항복하는 장면들은 예수님이 아니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제사장들 또는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귀신을 무저갱으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심판자이신 하나님뿐이죠. 그렇다면 귀신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드러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께 택한 받은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의문이 들었으나,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확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며, 모든 권세와 나라와 주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늘 한 영혼을 위하여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며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동네가 돼지 떼를 키우고, 무덤가여도, 그 사람이 귀신에 들리고, 이방사람이어도 상관하지 아니하시며 그를 위해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지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처럼 예수님은 한 영혼을 위하여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것은 오늘 본문 13절에도 나오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심을 통해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31절에서도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귀히 여기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의인 하나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떠나 살며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탐하는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하보다 귀하게 여김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중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존중해주어야 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 또한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우리 중 단 한 사람도 귀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나온 거라사인 역시 소중한 한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폭풍을 뚫고 오셨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취급을 당하는 자들이며,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는 사랑하는 자였고, 구원받아야 할 한 영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주 무대가 갈릴리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에만 있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마리아에도 가셨고,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도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온 거라사에도 가셨죠.
그 뿐입니까? 예수님이 치유한 자들이 대부분이 유대인이지만, 예수님은 이방인들 역시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오는 자들을 예수님은 막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귀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아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까지 복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 은혜 받은 자로써, 구원 받은 자로써, 예수님을 아는 자로써, 어떤 삶을 살 것입니까?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거라사인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예수님은 거라사인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인이 가족과의 회복을 원하셨습니다. 그는 가족과 마을에게 버림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다시 가족과 마을 사람들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듯이 그 역시 받은 은혜를 가족들에게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거라사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육적인 눈으로만 보면 거라사인이 우리보다 더 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거라사인이 느낄 구원의 무게가 더 크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영적으로 비참한 인생을 사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와 거라사인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영원한 형벌의 지옥에서 구원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거라사인은 자신을 포기해버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자신의 가족에게 뿐만 아니라 데가볼리에 예수님을 전파하였습니다. 데가볼리란 도 개념의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그가 데가볼리라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받은 은혜를 크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크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반드시 해야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일을 전파한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6절에 나타난 자들이죠. 이들은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18절에 나타난 귀신 들렸던 사람입니다.
16절에 나타난 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본 것으로만 판단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파할 때 드는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 15절에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만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 17절에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시기를 간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에 비해 18절에 나타난 귀신 들렸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귀신에 들려 밤낮을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고, 아무도 구해주지 못하는 그 비참한 인생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의 복음 전파는 어떠했을까요? 20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전파하는 자의 입술은 예수님을 오히려 두렵게 만들고 예수님을 떠나보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명확하게 알고 전파하는 자의 입술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고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앞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예수님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전할 때, 참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며, 우리가 참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복음을 듣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쓰임을 받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아서 많은 사람에게 참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