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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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 막 12:28~31
저번에 우리는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서로 앙숙 같은 존재였으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 되었고,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 왔죠.
첫 번째,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가지고 온 질문은 세금 문제로 정치색이 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질문을 가지고 온 이유는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자 두 번째 사두개인이 질문을 가지고 옵니다. 사두개인이 가지고 온 질문은 부활 문제로 신학적인 질문이었는데, 이들은 그동안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기에 예수님 역시 대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께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릴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른 선지서도 아닌 그들이 보는 모세오경을 가지고 부활을 입증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깎아내릴 명분이 없게 된 것이죠.
이 때,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과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서기관이란 율법을 필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전문 율법학자를 말합니다. 서기관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있는데, 이들은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서기관들의 대부분은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죠. 당시 율법교사 혹은 랍비라고 불리는 이들이 서기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서기관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잘 대답하시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으로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질문한 내용은 28절 하반절에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서기관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그 당시 서기관들 사이에서 이 질문에 대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죠.
여기서 서기관이 말하는 “모든 계명”이란 모세의 율법을 포함한 모든 가르침과 훈계를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계명은 랍비들이 모세오경에서 찾아낸 계명들인데, 이 중에서는 해야할 법이 248개,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 365개였다고 합니다.
랍비들은 613개나 되는 많은 계명을 다 기억할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었기 때문에, 계명의 첫째 되는 계명 곧 모든 계명의 동기가 되는 계명을 찾아 근본적인 진리를 지키길 원했죠.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없을지라도 모든 계명을 함축할 수 있는 신앙의 근본이 되는 계명을 안다면, 그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신앙의 근본이 되는 계명을 찾지 못하였고, 첫째 되는 계명을 찾기 위한 논쟁은 예수님께서 계셨던 당시에도 결론을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서 세금논쟁, 부활논쟁을 지혜롭게 해결하시는 것을 보고 서기관에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데, 우리 29~3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신명기 6장 4-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하루에 두 번씩 즉 아침과 저녁으로 암송하는 구절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주의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성경 구절로 흔히 ‘쉐마’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할 때, ‘들으라’의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이 ‘쉐마’이기 때문이죠.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에, 부모들은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신명기 6장 4절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달달 외우는 쉐마는 생애의 시작과 함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암송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신명기 6장 4~5절의 고백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6절 이하의 말씀 때문인데요. 신명기 6장 6~9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신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암송하는 전통을 만들고 이 말씀을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신앙고백을 자신들이 가진 신앙의 본질로 삼아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쉐마를 암송하는 의식을 지키고 또한 가르쳤는데, 정작, 그들은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인 ‘쉐마’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외우는 ‘쉐마’를 가장 큰 계명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쉐마’를 외우는 것이 형식적인 관습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면 문제가 무엇이냐?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멀어지는 외식적인 신앙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참 무서운 것이죠. 입으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머리와 마음은 하나님을 떠난, 영적으로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며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구제할 때에도 나팔을 불고,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고 금식을 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외식의 모습들이 유대인들 가운데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죠.
그들의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사람들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영적 관계의 회복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된 신앙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도 매주 신앙고백하는데, 무엇이죠? 사도신경이죠.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해 신앙고백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곧 전능하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 곧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재림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 그리고 거룩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사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실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 나타나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우리가 주문처럼 외워야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되새겨보면서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닌 마음의 고백으로 녹여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도신경을 외운다면, 유대인들이 매일 쉐마를 형식적으로 외웠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입술로 나오는 고백은 결코 마음으로 우러나온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예배에 모든 시간 시간을 집중하고 정말 내가 하나님께 나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우리 마음 밭에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드리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 역시 단순히 그 말씀을 암송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라고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역시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며,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 위한 믿음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줄 믿습니다.
쉐마의 주 내용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죠. 이는 우리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계명의 첫째로 하나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계명의 동기가 되는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하셨고,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보다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아무리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도 내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 자와는 같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멜렉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울이 하나님을 명령을 듣지 않고 아말렉의 좋은 것들 곧 기름진 양과 소를 남기면서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다” 하죠. 그러자 사무엘이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양과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묻자, 사울이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고 말합니다. 그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죠.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믿음의 한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순종이 중요한 것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계명의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이를 증언한 사람으로 다윗이 있지요. 그는 시편 119편 47~48절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 아닙니까?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행할 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한 일에 대해 우리 마음이 무거운 짐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다윗처럼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으로 말씀을 맺으시지 아니하시고 연이어 이웃 사랑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12장 38절 이하를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긴 옷 곧 특별한 예복을 입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문안을 받고 대접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과부의 가산은 삼키며 외식하는 자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이 금식하고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식적인 행동은 잘하면서 가난한 이웃에 대해 구제나 선행은 하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예수님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분리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의 동기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 즉 그 중에는 이웃에 대한 계명들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에서도 세분화하면 6계명이 이웃에 대한 계명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죠. 이웃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살펴보기 위해서 요한일서 4장 20~2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지 않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듣고 믿고 깨달았기에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를 압니다. 그렇기에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와 이웃들 또한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요나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요나에게 니느웨란 어떤 곳인가요? 자기 나라를 짓밟고 이스라엘 백성 곧 자신의 혈족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죽인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 같은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할 때, 요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니느웨와 정반대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끝까지 요나를 붙드시고 니느웨로 보내신 것은 선민의식으로 인해 다른 나라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민족주의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택한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 같은 나라의 백성도 사랑하시는 데, 다른 모든 나라 백성은 당연히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사명에 대해서 다시 기억나게 하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신 것을 기억하고 받은 그대로 이웃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웃 사랑이죠. 그리고 이웃의 범위는 나와 가까운, 나와 친밀한 관계를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품기 위해선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전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에도 처음에는 비틀거리고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결국엔 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으로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실천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멈춰서지 말고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