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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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이신 예수님
막 10:46~52
1. 맹인 거지 바디매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에 있는 성읍으로 종려나무가 많아 종려나무의 성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비옥한 곳이라는 것이죠. 또한 여리고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곳이기도 하죠.
그런 비옥한 배경과 달리 오늘 등장하는 한 인물인 바디매오는 46절에 맹인 거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맹인 거지로 표현되는 부분은 아마 오늘 본문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만큼 바디매오의 상황이 좋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죠.
맹인이면서 동시에 거지라는 것은 바디매오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강력히 어필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병든 자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고, 가난한 자를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자로 보고 있기에 병들고 가난한 맹인 거지라는 표현은 얼마나 강력한 말이겠습니까? 맹인인 것도 서러운데,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 당하고 무시당하며, 자신을 무시하는 자들에게서 구걸까지 해야 한다면 얼마나 그 삶이 힘들까요?
그럼에도 그가 계속 구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도 참담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바디매오의 상황은 마치 죄인이었던 옛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그렇게 비참한 상태였다는 것이죠. 단순히 맹인이 아니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맹인 거지였던 삶이 바로 우리의 옛 모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죄악 속에서 어떤 소망도 없이 멸망을 앞두고 있는 비참한 상태가 우리의 옛 모습이었다는 것이죠.
앞이 보이지 않아 어디도 갈 수 없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자기를 보호해줄 집도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현실에도 힘들어하고 답답해하는데, 우리의 삶이 바디매오와 같다면, 그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주눅 들고 자존감까지 낮아졌지만, 그가 매일 구걸하며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희망의 근원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며, 희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나음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셨다는 소리도 들었죠.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소문보다 바디매오에게 있어 더 큰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 받을 수 있을 거란 소망이 생긴 것이죠. 그는 날마다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눈이 밝히 떠지는 그런 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바디매오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고 주니 만나기를 사모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그 날이 오기를 누구보다 고대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이 정말인지 보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의 소문을 믿었고 예수님을 만나면 그 분이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가 희망을 가졌고, 그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죠.
2. 다윗의 자손 예수
오늘도 희망을 간직한 체, 길 가에 앉은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예수’라는 이름이 흔하였기에 구별하기 위해 예수님이 사셨던 ‘나사렛’을 앞에 두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예수님께서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 예수님을 비하하는 목적으로도 사용하기도 하였죠.
예로 요한복음 1장에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말하자, 나다나엘이 말하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빌립에게 말하였습니다.
갈릴리 지역 내에서도 나사렛이란 동네는 별 볼일 없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나사렛이란 동네를 무시했죠. 갈릴리 지역 내에서도 이러한 데, 다른 곳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여리고는 나사렛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번성한 도시이죠. 그렇기에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은 여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르는 그 외침은 예수님을 더 특별하게 나타내보입니다. 우리 47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를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 때문이죠.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것이죠.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지도 또 보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들으며 그 분이 메시야임을 믿은 것이죠.
바디매오의 고백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물론 그가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도 있지만, 나사렛 예수라는 그들의 생각 속에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라는 단어를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나사렛 예수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죠. 그 누구도 나사렛 예수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사렛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다!’라는 고백은 오직 예수님에게 사용되는 유일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습니다. 그들은 바디매오의 참된 고백은 듣지 않고 바디매오의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며 그에게 잠잠하라 합니다. 오히려 육적인 눈이 영적인 눈을 가린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곳곳에서 복음이 퍼져나갑니다. 바디매오의 고백의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계속 퍼져나가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복음의 씨앗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에 심기기까지는 매우 어렵죠.
그들이 바디매오를 본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디매오를 하찮게 보는 것은 그들 자신이 바디매오보다 낫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들의 모습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의 꾸짖음에 바디매오가 외침을 멈췄습니까? 아닙니다.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려주기라도 한 듯 말이죠.
사람들에게 정죄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그가 외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자신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에겐 예수님 말고는 답이 없는 것이죠. 깜깜하고 답답한 인생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사람들의 구걸로 먹고 사는 그에게 있어 사람들의 동정은 그의 유일한 돈벌이었습니다. 동정을 받기 위해선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죠.
그런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아량곳 하지 않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남은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맹인인 그가 예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믿음을 보셨죠. 이미 그의 믿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해 외치기 전부터 그의 믿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기다렸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그가 외치길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고백을 기다리신 이유는 그 고백이 값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만 생각했다면 그가 예수님을 부르짖기 전에 그에게 다가와 그를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러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신 것은 그의 고백이 바디매오에게 뿐만 아니라 바디매오를 꾸짖는 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첫 번째 외침에 반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잠잠하라 꾸짖는 그들의 앞에 다시 외치는 두 번째 그의 외침에 반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고백에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 말씀하십니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을 멈추시고 한 영혼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행색을 보고 그의 소리를 외면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의 음성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대속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부르는 한 영혼의 외침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의 고백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시끄러워서 그를 부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신 것은 그가 하는 고백이 참임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신 것이죠. 그렇기에 51절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이 담겨있죠. 이 물음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비춰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죠. 물론 이 질문은 36절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 질문이 바디매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유는 그 역시 하나님의 백성임을 암시하는 것이죠.
부자청년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주체가 나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죠.
바디매오 역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었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였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이죠.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보기를 원하였고,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볼품없는 칭호가 다윗의 자손으로 덧입혀져 유니크한 독보적인 메시야 예수가 되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그 고백이 예수님을 돋보이게 만든 것이죠.
3. 바디매오의 믿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말하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도 예수님이 메시야이신줄 몰랐습니다. 마치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출신, 예수님의 외모 등 외적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평가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떻게 생기신지, 예수님의 행하심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가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도마 이야기를 알지 않습니까?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말하자,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8일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시자 도마가 주님인 줄을 알아보고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하십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그런 그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바디매오를 통해 배워야 할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가 오늘 보여준 모습들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들이기 때문이죠.
첫 번째,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는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기도인지를 알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배가 고픈데도 부모님을 찾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부모가 아이를 사랑을 주지 않았기에 아이가 부모를 찾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 말고는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 말고는 자신이 의지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누구의 도움을 구해야겠습니까? 예수님의 도움을 구해야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기도의 열매가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길 원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는 주님을 가장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겉옷을 내버리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에게 있어 겉옷이란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집이며, 그의 보호자였습니다.
겉옷이 무엇인데 그리 중요하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건조하기에 밤이 되면 춥습니다. 집이 없는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추위에서 자신을 건져줄 집과 같았고, 자신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내버리고 주님께 뛰어갑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린 것이죠.
마치 부자청년이 떠나간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고백한 것처럼 바디매오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음을 봅니다. 마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믿음 가지고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세 번째,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채워줄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의 한 몫을 챙기려고 하였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 받은 수 많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 사람을 몇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예수님을 따를 때, 해결됩니다.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부자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영생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예수님께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내 눈 앞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님 떠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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