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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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으라!
- 막 11:12~14, 19~25
1. 비정상적인 무화과나무
오늘 본문 12~14절에 나타난 무화과나무 사건은 예전부터 난제로 생각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닌데, 예수님께서 왜 무화과가 없다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셔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다고 하기도 합니다.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닌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그만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라는 것이죠.
단편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당시 배경과 그 당시 문화와 그 당시 상황을 그리고 문학적 기법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의 시기는 유월절 기간으로 태양력으로 계산하면 4월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기후가 달라 건기와 우기로 나눠지는데, 건기가 4~10월, 우기가 11~3월입니다. 4월이면 막 건기가 시작된 기간이죠.
우리나라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일 년에 2번 정도 열린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4~10월까지 총 5번의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로 열리는 열매를 파게라고 하는데, 파게라는 단어는 어디서 봤을까요?
11장 1절에 나와 있는데요. 네, 바로 벳바게입니다. 벳바게란 집이라는 의미의 베트와 무화과라는 의미의 파게의 합성어로 무화과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맞은편 동네인 베다니도 이와 비슷하게 집이라는 의미의 베트와 무화과라는 의미의 테헤나가 합쳐져 무화과의 집 베다니라는 동네가 된 것이죠. 그러니까 벳바게와 베다니는 무화과의 집으로 같은 이름이죠. 그러나 파게는 처음 익은 무화과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고 테헤나는 나중에 익은 무화과를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총 5번 무화과가 열리는 무화과 중 처음으로 나오는 열매인 파게는 작은 잎사귀와 함께 열리는 작은 열매이기에 당도가 떨어져 상품성이 없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주인은 서민들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놔두죠. 서민들 입장에서는 11월에 대추야자 열매를 수확하고 나면 12월부터 4월까지 5개월간 과실을 먹을 수 없기에 파게는 서민들에게 기쁨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주인 입장에서도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은 더 좋은 테헤나 열매가 얻기 위해선 일일이 파게를 따주어야 하는데, 서민들에게 파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는 기쁨을 주고 주인 역시 노동력 절감이 되는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복숭아가 여름에 열리고 사과가 가을에 열리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무화과 열매가 언제 열리는 지를 잘 알죠. 무화과의 이름이 파게와 테헤나가 있는 것만 봐서도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에 대해서 잘 알겠구나 생각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약 30년 이스라엘에 사셨기에 무화과의 때를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무화과의 때는 테헤나를 말합니다. 정식 무화과 열매를 말하죠. 예수님께서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 무화과가 없어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 무엇이 있어죠? 잎사귀가 있었습니다.
아까 파게를 설명할 때, 파게는 작은 잎사귀와 함께 열리는 작은 열매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특징 중 하나가 잎사귀가 있으면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멀리서 이 나무에 잎사귀가 있는 것을 보시고 그 나무에게 가신 것이죠. 그 나무에게서 파게를 찾으신 것입니다. 근데 그 나무에 파게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본 무화과나무는 비정상적인 나무라고 볼 수 있지요. 잎사귀와 함께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열매가 없는 나무입니다. 잎만 무성한 나무이지요. 예수님은 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2. 비정상적인 이스라엘
예수님께서 비정상적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 나무를 싫어해서 또는 내가 배고픈데 나무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맞은 편 마을에 가보지도 아니하시고 나귀 새끼가 있는 지 아시는 예수님께서 왜 굳이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에 무엇이 있는가 보러 가시고 그 나무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셨을까요? 가기도 전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아셨을 것인데,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며, 기도와 휴식의 처소이고, 평화의 성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여러 구절이 있는데, 그 중 2개만 보자면, 호세아 9장 10절에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함을 알 수 있고요.
우리가 노래로도 잘 알려진 하박국 3장 17~18절에서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말하며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였는데요. 우리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다음 단락에 나타난 성전의 상황이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는 이유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약 무화과나무가 3년 동안이나 열매가 없다면, 여러분은 이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가복음 13장에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있는데, 한 사람에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그 열매를 계속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3년 동안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하자 포도원지기에게 말하길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잎만 무성한 나무는 주인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화려하고 경건한 척하는 외식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외식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보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마치 열매가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모습과 같죠.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외식을 고발하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다음 날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봅니다. 놀랄 일이죠. 잎이 무성하게 잘 자라던 나무가 말씀 한 마디에 하루 만에 뿌리째 말라 죽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함으로써 현재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21절에 베드로의 물음에 답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렇게 말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하나님을 믿으라!’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중적인 표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석에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에 놀란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저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되지 않기 위해선 하나님을 믿어야한다는 것을 강력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과 같이 그들의 중심이 되는 성전부터 썩어버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회복되기 위해선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회당에서 말씀을 보고 율법을 지키며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라고 결론을 맺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문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모습이 있었는 지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교회를 다닐 수 있고 말씀을 볼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 정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행동이 사람의 눈치를 보고 하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 곧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인지를 보는 것이죠.
우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람을 보면서 주의 일을 하면 그 일에 기쁨이 없습니다. 주의 일이 세상 일처럼 느껴지고 짐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보고 주의 일을 하면, 힘든 일이여도 마음이 기쁩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함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조 1항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잘 형성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녹아드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그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찬송하는 삶은 너무나 복된 삶이지요. 내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이 넘치면 그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시며, 23~24절에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2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사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과연 저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도 제목은 누구나 믿음으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23절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 그리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이 없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런 굳건한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굳건한 믿음이 있을 때, 24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기도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기도는 주님께서 받아주시고 이루어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구하는 내용의 기도들이 많겠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문제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기도가 무엇인지 25절 말씀하십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산이 들려서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이 가장 큰 기적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유성이 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등 수 많은 기적이 구약에 나타났지만, 그 어떤 기적도 하나님과 우리의 화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놀라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간 것은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의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뭐 얻어 먹을 것이 있는가 해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이적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케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화평입니다. 우리와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일어나면 24절 말씀처럼 구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우선순위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는 기도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간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여러분도 들어본 적이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6~18절 제가 읽겠습니다. “(사 1:16~18)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과 우리과 화목해야 됨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위해선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24절의 내용도 그 중 하나인 것이죠.
그렇기에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길 소망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열매가 많이 달린 무화과나무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잎사귀만 있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함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같이 보겠지만,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그 당시 이스라엘은 그들의 중심되는 성전문화부터 썩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해결책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까?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열매를 찾으실 것입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두려움의 순간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에 맞는 믿음의 열매들을 맺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