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이 있더라(행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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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여러분 혹시 스포츠경기 좋아하십니까? 저는 스포츠경기를 그렇게 많이 즐겨보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제가 손에 땀을 쥐며 보았던 경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얼마 전 도쿄올림픽에 여자배구경기를 기억하십니까? 일본과 터키전에서 대한민국은 짙은 패색 속에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승리를 따냈습니다.
이 역전은 책, 드라마, 영화 등의 스토리 소재에도 사용됩니다. 질 것 같을 때에,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일 때에 주인공이 그 모든 역경과 위기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역전하며 기뻐하는 그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짜릿함을 맛봅니다. 이 귀한 예배의 시간에는 저와 여러분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대 역전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역전이 우리에게도 이미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것임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함께 말씀 살펴보시겠습니다.

배경

오늘 말씀 속의 사건 속에 있는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오늘 사건의 배경을 한 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도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초대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부흥하자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러 지혜와 믿음이 좋은 사람을 뽑아 집사를 선출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일곱 명의 집사들이 세워집니다. 그 집사들 중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그리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던 스데반이라는 집사님도 있었습니다.
이 스데반 집사님은 전도에도 열심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에게 은혜와 권능을 부어주심으로 큰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그분에 대해 배워보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몇몇 유대교인들은 이를 좋게 보고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대교인들의 회당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유대교인 몇 명과 논쟁이 붙습니다. 하지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 앞에 유대교인들은 패배하게 됩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이대로 두면 안 될것 같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 집사님이 신성을 모독했다 하여 법정에 고소하게 됩니다.
재판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변론의 시간에 오히려 천사같은 얼굴로 제사장들과 유대교인들을 향해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읊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을 언제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꼬집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의 마무리는 예수님을 예언했던 세례요한의 죽음에 너희가 가담했으며 죽였음을 말합니다. 이 설교에 양심이 찔린 자들은 결국 스데반 집사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씌워 유대인들의 처형방식에 따라 돌로 쳐 죽였고 그렇게 스데반 집사님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하는데요, 바로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열심으로 박해했던 청년 ‘사울’입니다.

복음이 갇히다.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사울은 스데반 집사님이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하게 생각했고, 그 일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일이자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에 대한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선포하고 다니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변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울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열심을 품고 살아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의 순간들과 마음의 중심에 품은 열심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영광으로 올려드려지는 진리 안에서의 열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것을 쉽게 깨닫게 하는 기준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다가 이런 기준을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 기준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있을까 죽이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 성경이 말하는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 구제하는 것 등은 분명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하고 또 추구해야 할 열심입니다. 다만, 나의 경건의 삶이 기준이 되어 누군가를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이 된다면 이것은 경건에 대한 잘못된 열심일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누가 드러나느냐입니다. 내 열심을 통해서 자기만족이나 나의 공로와 의가 드러난다면 또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열심일 확률이 큽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잘못된 열심을 가진 이 사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군일 때는 참 힘이 되는 사람인데, 적군일 때는 참 두려움의 대상이구나. 똑똑한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무섭다던데 사울이 바울이 되어서 참 다행이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정말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굉장하리만큼 집요한 사람이었고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며 수많은 고난들을 당하면서까지 집요하게 예수님을 전했고 끊임없이 복음에 대해 변호하며 논쟁하고 편지를 쓰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오늘 본문 속에서는 반대로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무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상만으로도 무섭지 않으십니까? 심지어 이 때의 사울은 힘이 충만한 ‘청년’이었습니다.
사울과 유대교인들은 스데반의 죽음을 승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 예수를 믿는 자들과 그 공동체인 교회를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건을 ‘큰 박해’라고 표현합니다. 이 박해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흩어지게 됩니다. 사울의 집요함은 여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교회를 더 이상 남겨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해서 그들이 속해있던 교회를 멸하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교회는 거의 씨가 말랐습니다. 엄청난 부흥을 이끌어냈던 초대교회는 전례 없는 큰 박해를 받아서 흩어지고 나뉘어졌으며 남아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복음은 퍼져야 하는데 지금은 옥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 하는데 눈앞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복음은 생명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복음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의 상황. 어떠십니까? 복음이 선포될 수 있는 방법도 그리고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교회에, 복음에 소망이 있어 보이십니까? 희망이 있어 보이십니까? 집사로 세워진 스데반이 순교하는 것을 보며 또 큰 박해를 경험하면서 흩어지는 또 옥에 갇히는 무력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지금 믿고 있는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이신가에 대한 의심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복음에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었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었고 풍성함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생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역전극,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길 소망합니다.

그래도, 복음은 피어난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서 달아난 사람들은 유대 땅 전역과 사마리아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사람들은 자신이 있던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시골에서 살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몇 가족들이 이사가 온 겁니다. 얼마나 관심이 가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이사 왔는지 물어보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복음이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만 있었던 부흥이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특별히 이스라엘과 앙숙 관계였던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이 퍼지게 된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춥니다.
2절에 등장하는 빌립은 스데반 집사님과 함께 세워진 집사였습니다. 이 빌립 집사님은 특이하게도 사마리아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사마리아인들은 이 빌립 집사님께서 전하신 복음에 관심을 보입니다. 심지어는 관심을 넘어서 한마음으로 빌립이 집사님께서 전한 복음을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사마리아인들에게도 메시아를 바라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4:25 NKRV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메시아에 대해 자신의 압제를 풀어줄 통치자, 왕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하고 율법을 가르칠 선지자, 교사를 바랐습니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욱 믿음이나 경건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마리아에서 빌립 집사님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말뿐 아니라 복음이 가진 능력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그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사도행전 8:7 NKRV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아멘. 우리 다시 한 번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가진 복음의 능력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도행전 8:7 NKRV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아멘. 그리고 복음이 전해진 그 성에는 기쁨이 넘쳤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당할 때만해도 분위기가 어떠하였습니까? 능력을 잃고 흩어져 슬픔이 가득하고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어떻습니까? 흩어지고 나뉘어졌던 교회는 그곳에서 다시 뭉치고 부흥합니다. 슬픔이 가득해야했던 교회는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옥에 갇힌 줄 알았던 복음은 오히려 더 많은 곳에서 선포되며 열매들을 맺을 준비를 시작합니다. 죽임당하고 죽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곳곳에서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대 역전극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후에 보시겠지만 그 박해의 중심에 있었던 사울마저도 변화시키시고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속의 박해 이후에도 역사는 끊임없이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는 흩어졌고 슬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그 진리는 그럴수록 교회가 더욱 굳건해지고 부흥되어져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핍박으로부터 역전을 거듭해왔습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역전승을 할 수 밖에 없는 비밀이자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

가끔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책을 보다가 완벽한 각본과 연출 때문에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전개를 맞닥뜨릴 때에 충격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깔려 있었던 수많은 복선들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역전에 대한 복선들을 곳곳에 숨겨두시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그 복선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곤 합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깔아두신 복선이 있으십니다. 이것이 역전의 대명수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이자 비장의 무기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 드라마틱한 상황을 조성하시고 아 답이 없다 싶을 때에 그 상황을 더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전해내시는 것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역전과 우리의 역전의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부터가 사실은 낮아짐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리를 뒤로하고 이 땅 가운데 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배고픔을 느껴 음식을 먹고 언어라는 것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고 졸리다는 느낌을 받으며 잠을 자야한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어서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에게 맞고 침뱉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반항도 없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절망하고 또 실망했을 것이고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 감추인 비밀을 모든 세상 가운데 알리십니다.
이 모든 절망적인 상황들은 역전을 위한 복선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사십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신 주님은 승천하셨으며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으로 심판자로 이 땅 가운데 다시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계셔서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지만, 이 사실은 천국의 천사들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소망이 없으며 희망이 없고 슬픔에 잠겨있을 때에 이 비밀이 풀리고 대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를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드러난 것이라 말하고 있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이미 정하였으나 감추어졌던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 복선을 알았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대역전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 그리고 천국을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교회가 또 역사적으로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역전이 곧 교회의 역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소망과 희망이 땅에 속하지 않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시며 다시 영광 중에 이 땅 가운데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에 복음은 갇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잠깐의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 또한 영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이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비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역전을 우리의 삶에 한 번 적용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은 분명히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방향으로 전에 없던 큰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 속에서 교회가 흩어지듯 우리의 마음이 조각조각 찢어져서 혹은 우리의 믿음이 찢어져서 흩어질 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발견하기 힘들고 심지어는 복음이 옥에 갇혀있는 것과 같은 나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인이었고 우리의 힘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소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죄에 대하여 밝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그를 믿는 우리에게 같은 역전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또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를 향해 살아가야 한다는 감추인 비밀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역전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아멘. 예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역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서 빌립 집사님이 그러하였듯 그리고 많은 곳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였듯 그리고 옥에 갇힌 베드로와 바울과 실라가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였듯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대역전을 일으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이제 말씀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함께 만난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슬픔과 죽음 그리고 갇힘 속에서도 역전을 만들어내시는 역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역전의 시작이자 근거가 되는 대역전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음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심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높아지심이라는 놀라운 대역전을 보여주심으로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크신 계획으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역전은 예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된 공동체 가운데에 일어나는 모든 역전에 근거가 되었습니다. 사울의 핍박에 의해 교회가 전멸하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형국을 역전시켜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부흥을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울을 바울로 부르셨습니다. 또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 역전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위치는 이제 죄인이 아니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우리에게 나아오며 우리를 멸시하던 자가 우리 발 아래 엎드려 우리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할 것을 기대하며 역전의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굳건한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결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보면 또 상황과 환경을 보면 소망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흩어지고 이따금씩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악해집니다. 이 모습을 보며 복음의 능력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마저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교회를 망하게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슬픔과 박해는 잠깐이요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흩어진 교회는 그곳에서 또 다른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밤에 제가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절망과 슬픔 그리고 아픔들이 회복되고 낫는 역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서울 광염교회 가운데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또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복음이 선포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의 주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을 쫓고 아프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전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이 속한 모든 곳에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또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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