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 리턴즈

요한계시록 강해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0 views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요한은 주님의 환상을 보고 죽은 자와 같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영광스러웠고, 그 영광 앞에 자신은 초라한 피조물이며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오른 손을 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키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신 분이시며, 죽음 이후의 세계도 주관하시는 분임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이 처음과 나중이 되셔서 세상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임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은 환란을 당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며, 죽음 앞에 설 때에도 주님이 죽음 이후의 세계의 주관자가 되어주시며, 그 이후의 삶까지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너트릴 어떠한 권세도 주님이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주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 영광과 사랑이 너무나 커서 두렵고, 기뻐할 것입니다. 요한의 두려움이 이러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있어 환란 속에서도 기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교회에 자신의 사자를 보내셔서 교회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눈으로 보기에는 교회는 연약합니다. 문제가 많고, 우리가 보기에도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교회를 다르게 보십니다. 연약해도, 아직 고쳐야 할 점이 많더라도 교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적용 : 여러분의 정체성은 자신에게서 찾지 마세요. 주님이 보시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봐야 안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성도요. 자녀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교회와 삶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영광스러운 교회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며 교회를 온전케 하실까요? 오늘 에베소 교회를 통해 주님의 사랑스러운 말씀과 음성을 듣는 영동제일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교회, 온전한 교회, 생명이 있는 교회로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1. 주님의 칭찬-믿음의 행위
1) 주님은 아신다.(3절)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3절의 하반절은 ‘내가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교회가 당하는 문제와 성도들의 수고와 고난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함께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금촛대 사이를 언제나 거니시며, 교회의 모든 것을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로 다가옵니다. 주님이 교회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에 함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주님을 향한 교회의 충성됨과 수고를 아심도 있고, 우리의 연약함에도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성도로서 연약함도 충성됨에도 모두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위로를 얻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행위와 수고와 인내(2절)
주님은 그들의 어떤 것을 아셨을까요?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셨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3절에 자세하게 드러납니다. 2-3절은 긴밀하게 연결이 됩니다. 3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들은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게 버텨내며, 인내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축구선수가 45분 경기를 전후반을 모두 뛴 것과 같이 몸을 모두 소진하여 수고한 상태입니다. 지치고 피곤하여 애쓴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지치고 피곤하기까지 애썼던 교회였습니다.
모든 것을 소진해본 적 있으신가요? 여기까지라고 정했지만 그만 두지 않고, 더 나아가 소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지칠 만큼 수고하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던 신실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쉼이 없었습니다.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몸에는 언제나 짐이 지워져 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사람으로서 포기하면 편한 일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신실한 성도들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인내와 견딤과 게으르지 아니한 신앙을 칭찬하십니다.
3) 믿음의 행위!!(살전 1:3)
행위와 수고와 인내/참고 견딤, 게으르지 아니한 삶으로 든든한 교회를 세워가는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편지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의 모습 가운데서 이런 비결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들이 가진 인내와 행위의 비결은 모든 행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위/역사를 만들어 냈고, 믿음이 사랑을 만들어내어 수고하게 했습니다. 또한 믿음은 소망을 주어 인내를 만들어 냈습니다.
적용 :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어내고 자신의 짐을 포기하지 않은 신실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신실하고 굳건히 견디어 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 오는 불이익을 묵묵히 감당하며 인내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비추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수고한 적이 있는가? 불이익을 감수하며, 예수님을 끝까지 믿으며 견디어 낸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지워진 짐을 끝까지 견디어 내며 지고 있는가? 포기하며 도망가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우리는 믿음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려 할 때 소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있는 것, 날마다 채워지는 것을 내어 줄때는 더 풍성해집니다. 여러분 주님께 믿음을 구하셔서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행위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4) 다음 대지와 이어짐(사랑이 식게됨)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잘 아셨습니다. 본문의 의도는 주님의 사랑을 불이 붙게 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견디어내며, 인내하며, 섬겼던 성도들이었지만, 그들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진리의 전사로 이단들과 거짓 형제들을 진리로 이겨 누구보다 반석위에 서 있어보였지만, 공허함만 남은 빈 상자였습니다. 여러분 사랑 없는 행위는 소진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의무만 남게 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의무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 믿음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빠져 겉 모습만 남았지 그들의 사랑은 식어져만 갔습니다. 이는 마치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의무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더 깊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믿음의 행위/신앙의 생활이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행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사랑과 의무가 필요한 관계를 저는 부부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부부의 관계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맺어주신 부부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서로의 친밀함을 늘려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과의 교제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주님과의 교제가 있으신가요? 있기를 소망함.
사랑이 빠진 부부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사랑이 없는 부부관계는 권태롭고, 새롭지 못하고 냉랭합니다. 그래도 의무가 사라진다면, 사랑으로 회복할 길도 없어지기에 위험합니다. 부부의 관계는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친밀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게 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2. 처음사랑을 버렸다.
1) 거짓된 것을 드러내시다. 처음사랑을 버림
주님께서 하시는 에베소 교회의 책망은 그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식은 정도가 아니라 버렸다고 합니다. 부부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식으면 다시금 회복할 수 있지만 그들은 사랑을 버렸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은 회심한 마음의 결정적 증거이다.” 네 맞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우러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한 결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적용 및 코칭 :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껍데기만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보기에는 믿음과 인내, 견디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신가요? 지금 교회 생활/신앙생활을 하나님과 교제가운데 하고 계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껍데기 행위만 가진 것입니다.
지적 동의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신자의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봉사와 경건, 의무를 버리지 않았지만 제일 중요한 사랑을 버렸습니다. 신앙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가 신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포 : 여러분 이 문제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에베소교회를 보면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들이 이미 성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는 편지 말미에는 교회에 있는 촛대까지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신가요?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서 계신가요? 지금 우리에게 닥친 교회의 많은 문제 속에서도,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시며 감당하고 계신가요? 그렇지 않으시다면 우리의 마음은 곧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자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화 : 호세아 선지자는 그의 시대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을 때, 백성들과 나라마 범죄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을 때, 그들은 참된 보호자를 잃었고, 힘을 잃었습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을 때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와 견딤, 옳은 행동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있나요?
2. 진짜 사랑 리턴즈
진짜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아는데서 참된 지식과 사랑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지식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진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하는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복된 소식에서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한 기쁨은 우리의 유익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체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앎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기쁨과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거룩하고 선함을 알기 때문에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시작할 때,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사랑, 이기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적용 :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가 떨어진 장소/대상 : 우리가 떨어지는 장소는 고난을 통해서 넘어집니다. 마귀도 이를 잘 알고 욥을 시험하기 전, “저가 까닭이 있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취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단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시며 그를 인정하시고,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인정해주십니다.
욥을 볼 때 고난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식게 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았을 때 우리가 범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며,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온전한 관계는 멀어지지 않고, 관계를 확인합니다. 고난은 참된 관계를 확인하는 결정적 계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떨어진 곳이 어딘지 분별하기 원합니다. 어느 시점이 아니라 대상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처음행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처음행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날마다 자라가는 처음 행위를 가진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버리기 전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는 것은 자라기를 포기하고, 하나님 찾기를 포기하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포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며, 자라가던 때로 믿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온전히 찾는 자라가는데 자신을 내어주는 처음 행위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배교의 문제와 이단의 문제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며 인내하며 이겨낸 에베소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칭찬을 받고 있지만, 책망을 위한 발걸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해 보였지만, 연약합니다.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실패를 통해 성장합니다. 그들의 실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패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묻고 계십니다.
결론 및 적용 : 여러분 사랑이 사라지면 행복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에베소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의무와 형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신앙을 하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현재 사랑하고 계신가요?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