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어디있는가?

사사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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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가 읽는 책중에 ‘해로운 신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 수많은 해로운 신앙의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주로 소위 ‘종교중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낯설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들이라서 놀랐습니다.
요즘 기독교가 욕먹는 이유중에 하나도 이런 해로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사기에도 이런 해로운 신앙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본론]
사사기는 17장부터 사사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삼손이 사사기에 등장하는 마지막 사사이고 그 다음부터는 미가라는 사람의 가정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미가 가정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단지파 이야기입니다.
미가의 가정과 단 지파 이야기를 통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단지파 이야기의 처음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없어서 어쨌다는 것일까요?
그 앞에 17장 6절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대로 하였다’
원래는 ‘자기의 뜻’이라는 말이 ‘자기 눈에’ 옳다고 보이는 대로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없어 기준이 없고, 통제가 안되니 백성들이 모두 자기 눈에 옳은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사사기 결론부분인 17장이후 입니다.
17장에는 미가 집안의 모습이었고, 18장에는 단지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1절에 보면 단지파는 아직 그들이 유산으로 받을 땅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여호수아서를 보면 모든 지파들에게 땅이 분배됩니다.
단지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럼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장 34절을 보면 ‘아모리 사람은 단 지파 자손을 힘으로 산간지방에 몰아넣어, 낮은 지대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모리 족속에게 몰려서 분배된 땅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1절 하반부에 보면 ‘그들이 자리잡고 살 땅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단 지파 자손은 소라와 에스다올에 살고 있는 지파의 온 가문에서 용감한 사람 다섯 명을 뽑아서 땅 정찰 임무를 맡기고, 땅을 탐지하고 살피도록 보냈다’라고 말합니다.
단지파는 자신들에게 분배된 땅을 차지하질 못하니까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힘드니까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용감한 사람 다섯명을 뽑아서 다른 땅을 정탐하게끔 합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탐하게 한 모습을 따라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하나님이 분배해주신 땅은 그 땅을 차지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모리 족속이 무서워 주저하고 용기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곳말고 더 좋은 곳이 있을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는 사명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부르심, 인생의 존재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그 사명의 장소가 직장일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 학교일 수도 있습니다.
힘들어도 그곳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 친구중에 너무 자주 직장을 옮기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일도 많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지 않다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제가 이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게 하나님 뜻일까요? 아닐까요?’
‘제가 행복하지 않는데 이곳에 계속 있는 게 하나님 뜻일까요?’
이런 고민을 자주 털어 놓았습니다.
물론 정말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옮길 수도 있겠지만 자주 옮기는 것이라면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항상 내게 좋은 일만 있고, 최상의 조건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때로는 힘들어 어려운 곳에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 곳에 보내셨다면 그 곳을 감당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먼저 하나님께 그 곳을 감당할 지혜와 용기를 구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곳이 맞다면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좀 힘들더라도 내게 주신 가나안 땅이라고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좋은 조건인 것 같은 직장이 나오면 곧바로 옮겨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더 좋은 조건이 오면 그것을 그냥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단지파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땅을 정탐하러 사람을 보냈는데 그들이 우연히 이르게 된 곳이 미가의 집입니다.
거기서 레위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단지파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레위인의 말투나 억양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그를 알아보고 왜 여기있는 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레위인은 미가가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자신이 이 집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도해주셔서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 있는 이유는 그냥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이렇게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파의 행동이나 레위인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단지파는 레위인에게 자신들이 하는 정탐이 성공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에 레위인이 뭐라고 대답하나요?
6절입니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평안히 가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이 가는 그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는 그들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곧바로 대답합니다.
그는 대답할 말이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레위인으로서 사람들에게 해주는 상투적인 대답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애매모호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이게 성공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애매모호하게 대답해야 나중에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점쟁이가 몇년 안에 좋은 남자 만날거야 이런 말과 비슷합니다.
지금 레위인은 직업적인 제사장으로 뻔한 축복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말, 좋게 해석할 수 있는 말 해준 것뿐입니다.
이런 직업적인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이런 레위인같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제가 동일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직업적인 목회자, 영감없는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자, 오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을 떠나 도착한 곳은 라이스입니다.
7절 보십시오.
그 곳 사람들이 한가하고 평화롭게 사는 시돈 사람들처럼,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땅에는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고 그들을 해치는 자가 없었다.
라이스라는 곳은 매우 평화로운 땅이고, 폭력이 없는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단지파는 점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9절, 10절입니다.
어서 가서 그들을 치도록 합시다. 우리가 본 그 땅은 정말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망설이지 말고 빨리 쳐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가 거기에 가기만 하면, 넓은 땅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는 백성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단지파의 정복전쟁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의 모습과 매우 다릅니다.
여호수아는 점령하기 어려운 땅을 목숨걸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지금 쉬운 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나안은 죄로 물든 땅이었지만 이 곳 라이스는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이 땅을 무력으로 빼앗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레위인이 자신들에게 해준 말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정복전쟁은 믿음으로 싸우는 전쟁이었다면 그들의 정복전쟁은 불법적인 전쟁일 뿐입니다.
어떤 학자는 단지파가 영토는 얻었을지 모르지만 가나안 사람들의 가치에 자신들의 영혼을 팔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우리는 좋아보이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무지의 산물입니다.
내 눈에 좋아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롯은 보기 좋은 땅이던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결국 죽을뻔했습니다.
삼손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을 대로 선택하다가 비참한 운명을 맞이 했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조건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주변에 일에 있어서는 성공했지만 소중한 것들을 다 잃고 전보다 더 못한 형편이 된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하고 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간증을 보십시오.
대부분 자기가 성공한 이유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갖다붙여서는 안됩니다.
이제 단지파가 라이스라는 곳을 치기 위해 6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 도중에 들린 집이 전에 방문했던 미가의 집이었습니다.
정탐꾼 다섯명은 전에 머무를 때 미가의 집을 잘 살펴뒀던 것입니다.
미가의 집에 은으로 입힌 목상과 에봇, 드라빔과 여러 우상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라이스를 가기 전에 이 곳에 들려 그것들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매우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미가가 자신의 집에 숙박할 수 있도록 도와줬는데 은혜를 베풀어준 집에 6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포위해놓구선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그냥 자기들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면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우상들이 필요할까요?
라이스를 치기 전에 더 축복받는 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그곳에서 만났던 레위인까지 스카우트를 합니다.
단 사람들이 우상들을 들고 나오다가 제사장 레위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단번에 그 제사장을 설득해 버립니다.
19절입니다.
조용히 하십시오. 아무 말 말고 우리를 따라 나서십시오. 우리의 어른과 제사장이 되어 주십시오. 이 집에서 한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야 이스라엘의 한 지파와 한 가문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단지파는 제사장까지 데리고가서 자신들이 복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무조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축복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 지파의 모습을 보며 기복주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기복주의란 복받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기복주의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중 하나입니다.
기복주의자들은 어떤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타 종교들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양양의 어느 관광지에 갔더니 그 관광지 옆에 절같은게 있었습니다.
그 앞에 사람들이 소원을 얼마나 많이 붙여놨는지 모릅니다.
소원성취, 만수무강, 성공, 합격 등
이들은 종교행위에 대해 매우 열심을 보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것입니다.
미얀마 불교에 가면 금박지를 사서 부처상에 붙입니다.
이 때 자기 소원을 빕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붙였던지 작았던 불상이 엄청 커져버렸습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타른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최종목적지는 자신이 성공하고 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을 받자’입니다.
여기서 웃기는 건 레위인의 태도입니다.
그는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며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17장에 보면 미가가 제사장을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고 말합니다.
정말 잘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단지파가 제시하는 조건을 듣자 곧바로 수용하고 그들을 따라가버립니다.
믿음도 없고, 의리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이익만 되면 언제든지 관계는 버립니다.
이런 사람을 기회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고등학교때 ‘꺼삐딴리’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딱 그런 사람입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하는 사람말이죠.
그는 연봉을 많이 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미가가 처음에 준 연봉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그는 단지파를 따라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위치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아무런 고려 조건이 되지 않는다.
제사장이 이런 수준이었으니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배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과연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왜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은 이를 1절에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눈에 옳을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것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왕이란 인간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사람들이 행하며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자기 욕망, 자기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의 영적전쟁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내 삶의 왕이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최초의 인류로 알려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자신들이 왕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하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까?
우리 다카포 교회 식구들이 모두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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