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이유
한 꼬마가 운동장에서 야구 모자를 쓰고, 야구 배트를 들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공을 하늘에 던진 후에 떨어지는 볼을 받아치는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을 하늘에 던지기 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치는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이렇게 마치 장내에 있는 관중들에게 안내 방송을 한 후에 공을 힘껏 하늘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공을 받아치려고 힘껏 배트를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그만 헛 스윙을 하고 말았습니다. ‘스트라이크 원!’
공을 주어든 그 아이는 다시 “세계에서 가장 잘 치는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 후에 공을 하늘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크게 스윙을 했습니다. “스트라이크 투!!!” 하고 외쳤습니다.
다시 공을 줏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에 공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또 그만 헛 스윙을 하고 말았습니다. “스트라이크 뜨리!!!”. 그 아이가 “와우!” 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나는 세계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다.”
때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자신들은 늘 자신을 방어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라고 말합니다. 꼬마가 놀면서 가장 위대한 타자로 멋지게 안타를 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자 자기가 세계 최고의 투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우리가 힘이 들 때면 우리 안에서 이런 방어기제가 작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속삭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아니면 저런 이유 때문에 이런 결과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설혹 사실이라 하더라도 새해에는 이런 방어 기제를 피하고, 나에게 해결하고 발전시켜야 할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를 늘 생각하고 자기를 계발함으로써 2009년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올해처럼 전망이 어두울 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모두가 경기 전망이 어렵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자녀인 우리들은 이런 말들 속에서 내 자신에 대한 위로를 찾아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힘들어 하니까 내가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해!” “경기가 어려우니까 나도 이렇게 힘들지!” 하는 말로 위로 받고자 하는 나를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내 자신의 방어 기재가 발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들은 곧 주저 앉고,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가 이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방어기재가 아닙니다. 나를 더욱 채찍질해야 합니다. ‘이삭이 기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백배의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 일을 우리의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불경기로 위축될 때,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불경기가 기회가 되어서 내 손을 통해 오병 이어의 기적,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도록 하겠다는 각오로 내 자신을 더욱 더 채찍질 해야 합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2009년도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집을 건축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내가 내 집을 건축자가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축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건축자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내 인생을 설계하고, 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동이 빛을 발하고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본문에는 바벨탑이라는 역모델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집을 짓는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난 후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족보대로 한다면 약 백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지만, 그러나 창세기나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는 많은 생략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 세월을 계산해 내서는 안됩니다. 홍수 후에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은 땅으로 퍼져 나가면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 산에 안착을 했다면 노아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 곳을 찾아 약 3백마일을 이동하다가 그들은 참으로 천혜의 땅을 발견했습니다. 주변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그 산 주변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 ‘시날 땅’에 한 분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안에 탑을 세우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건설했을까?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한가지는 ‘흩어짐을 면하자.’ 그들은 흩어지지 않기 위하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이름을 날리자.’ 그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탑을 건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악으로 비쳤습니다.
그렇다면 왜 흩어짐을 면하고, 이름을 날리기 위한 도시 건설과 탑의 건축이 문제가 될까? 그들은 이런 도시와 탑을 건설했기 때문에 그것은 다 무너져 버리고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인생의 집과 탑을 세워야 완성된 집, 무너지지 않는 집을 건축할 수 있을까? 이런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끝없이 개척 정신을 가지고 흩어져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흩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익숙한 곳에서 안주하려고 합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도시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은 좋은 땅에 머물러 안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살만한 땅을 찾기 위해 계속 히말리야 산 아라라트 정상에서부터 여기 저기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날 땅에 도달해 보니 그곳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주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있습니다. 산이 둘러쌓여 있어서 바람을 막아 줍니다. 또 분지여서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런 곳은 도시가 들어설 수 있는 천혜의 땅입니다. 마치 무학 대사가 서울을 보고 도읍지를 정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그곳이 너무나 좋다고 생각하여 그곳에 모여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흩어지지 않기 위해 탑을 쌓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탑의 용도가 몇가지가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이렇게 높이 쌓은 탑이 하나의 표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짐승을 잡기 위해 사냥을 하다가 낯설은 땅에서 이 탑을 보고 방향을 잡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축복하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흩어져서 땅에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다 보면 장점도 있지만 무수한 도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밀집되어 있어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다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가축 떼는 많은 데 목초지가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싸웁니다. 이것이 도시 문제입니다. 이삭과 그랄의 목자들이 우물을 놓고 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들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싸웁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살다 보면 편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안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주하여 도시를 형성하고 살다보면 사람들은 서로 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원이 부족하니까 렌트를 해서 사는 사람들이 생기고, 자원이 부족하니까 홈리스가 생기고, 도시 문제가 생겨납니다. ‘자원’을 빼앗기 위해 끝없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만약, 사람들이 흩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성지 순례를 위해 터키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광활한 땅을 달리고 달려도 너무나 좋은 땅이 계속 되었습니다. 호수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시날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흩어져 나갔다면 그들은 그 좋은 땅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뭔가 조금 잘 되어 가는 것 같을 때 항상 거기서 자리를 트고, 안주하려고 합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또 특별히 아내들의 경우가 이렇게 안주하려는 성향은 더 강해져 갑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늘 하는 불평은 우리 집사람은 내가 무엇을 좀 하려고 하면 발목을 잡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 이유가 아내들의 경우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주했을 때 우리가 일으킨 사업의 수명은 자꾸 짧아져 갑니다. 혁신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에서 자기를 계발하지 않는 사람, 혁신이 없는 사업, 혁신이 없는 직장, 혁신이 없는 직장은 곧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지금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현재에 안주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꾸 퇴보하게 되고, 밀리게 됩니다. 애플 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 보다 훨씬 기술력이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망할 뻔 했습니다. 혁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티브잡스가 애플을 경영하면서 지금 애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혁신하고,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흩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여기를 떠나면 망막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보다 더 좋은 땅, 더 좋은 기회, 더 많은 축복을 이미 예비하고 우리보고 흩어지라고 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개척정신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올 해 갑절의 축복, 절대 배가의 축복은 우리 자신에 대한 끝없는 혁신, 개척 정신을 가지고 ‘너희는 가라. 그래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라’라고 하시는 명령을 순종할 때, 새로운 도전을 감행할 때 이 축복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쌓는 이유가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흩어져야 하고, 그곳에서 축복을 받고, 우리의 집을 건축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왜 사람들은 자기가 쓰고도 남는 돈을 움켜쥐고 있을까요? 자기 만족의 탑을 쌓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야 먹고 쓰면 남는 것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사람들은 먹고 남는 돈, 쓰고 싶어도 돈이 너무 많아서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돈이 싫으냐 하면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렇게 돈이라는 탑을 쌓아 올리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에 한번 맛을 들인 사람은 그 권력을 놓기가 너무 싫습니다. ‘남보다 더 위에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과거 히틀러는 세계를 제패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비롯한 무수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것은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수한 혈통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고,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레닌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생산하고, 동등하게 분배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공산주의 혁명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념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 것입니다. 과거 일본은 천황을 신이라고 하고 자기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을 이루기 위해 많은 나라를 침략했습니다. 이 모두가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최고니까, 자신의 생각이 최고니까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가 움직여야 하고, 자기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자기 이름을 내는 ‘업적주의’입니다.
내가 건설하는 내 인생의 집이 ‘내가 무엇을 해 놓았다’는 이런 업적,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명예나 체면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이런 집은 미완성의 집으로 끝나고, 이런 집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들의 집을 건설해야 할까? 내 이름이나, 내 업적이나, 내 체면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그리고 내 이웃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어제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 해 동안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저희 교회가 한국 농어촌에 10개 교회,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개척한 한 교회, 그리고 멕시코에 있는 교회를 지속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금액의 선교비가 지급되고 있는 데 그 12개의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있는 교회는 딱 한 교회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보내주신 선교비를 잘 받고 있습니다’라는 단 한마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을까? 저는 그것이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데, 그 중 한가지는 흔히 쓰는 말로 ‘쪽팔리기 때문’입니다. 쪽팔린다는 말은 체면이 안선다는 말의 비속어 아닙니까?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고맙기는 하지만 체면이 안서지요. 체면이 안서는 것은 바로 이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은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보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일년 동안 보냈는데 받는 사람이 아무런 의사 표시가 없습니다. 받고 있는지, 받고 있지 않은지, 제대로 전달은 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계속해야 하나? 하고 마음에 의구심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내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때로 우리들처럼 무슨 대단한 이름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름을 내기 위해 사업을 하고, 집을 짓고, 인생의 집을 짓는 것은 체면이 깍여지지 않고, 내 자존심이 상처를 입지 않고, 내 이름이 낮아지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름을 날리지 않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 입장, 혹은 내 체면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입장, 남의 체면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마음으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체면과 입장을 헤아려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내 이름, 내체면, 내 입장, 내 자존심만 헤아리면 말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시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같더라도 내 체면과 입장, 자존심만 헤아리면 결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과 체면, 자존심을 헤아리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의 입장과 체면을 살려주는 집을 건설해 가면 말이 통하게 되고,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내 이웃과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우리는 완성된 집을 짓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가 집을 짓기를 원하십니다. 집을 짓는데 안주하려는 집을 짓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가지고 자꾸 미지의 세계로 흩어져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고, 계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내 이름과 체면, 입장을 위해서 집을 짓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 입장, 체면을 위해 또 내 이웃의 입장과 체면을 생각하면서 집을 짓기 원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시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이 질문을 하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이라면 내 남편, 혹은 내 아내, 혹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이 질문을 계속 물으면서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은 더욱 견고한 집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