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3)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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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오늘 나의 상황에 좌절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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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스포츠에 통용되는 명언들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그 명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명언을 담고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불리는 요기 베라의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모든 스포츠 종목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야구는 9회말 2아웃 풀카운트에서도 역전 홈런이 터지고요, 축구도 인저리 타임의 역전골이 발생합니다. 농구도 종료 휘슬 0.1초를 앞두고 던진 슛이 림으로 빨려들어가는 버저비터가 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장면이 스포츠가 가진 큰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그 선수들을 보며 끝까지 응원하는 팬들이 빚어내는 장면은 감동적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어떨까요? 우리의 현실은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항상 밋밋한 일상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인생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극적인 감격이라던가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보고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시작하는 이 시간, 이 질문을 가지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아가 봅니다.

본문1 -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오늘 말씀은 스바냐 예언자를 통해 남유다왕국에 울려퍼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바냐서의 마지막 말씀이고요, 그만큼 하이라이트가 집중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유다사람들에게 두 가지 요청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먼저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래를 어떻게 부르라고 하십니까? “기쁘게 부를지어다”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쁜 노래를 부르려면 내 마음 상태가 기뻐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14절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라고 주문하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걸 봅니다.
두 번째로 요청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함께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늘어뜨린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우리가 언제 손을 늘어뜨립니까? 힘이 없을 때도 그렇지만 의욕이 없을 때, 희망이나 기대하는 것이 없을 때 팔이 축 늘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주변의 상황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또 좌절하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유다백성들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고,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기뻐하라고 힘을 내라고 주문하시나요?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스포츠 경기도 역전극이 일어날 법 해야 희망을 갖고 응원을 하는것 처럼, 뭔가 비빌만한 구석이 있어야 기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유다 백성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본문 15절과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요, 두 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유다백성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 예루살렘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유다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 하나님께서 유다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기뻐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동일한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에게 임한 화와 재앙, 아픈 현실들을 물리치히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거친 파도가 향해 와도, 주님께서 건져주신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유다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거에요.

본문 2 - 유다왕국의 상황

이렇게 본문을 보면 우리가 기분 좋게 묵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본문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스바냐 예언자가 이 말씀을 선포한 시대적 배경을 함께 살펴보면, 우리는 이 말씀이 정말 놀랍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바냐서 1장 1절은 스바냐 예언자가 활동한 시기를 분명하게 알려주는데요, 1장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절은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아직 요시야가 율법책을 만나지 못했던 시절이고요, 당연히 종교/신앙에 대한 개혁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요시야 직전까지 유다왕국은 우상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요시야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므낫세 왕은 무려 55년을 다스렸는데, 전국에 바알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해/달/별들을 신으로 섬기겠다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포악하기는 얼마나 포악했는지, 무죄한 이들의 피가 예루살렘 온 땅에 가득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아들이자 요시야왕의 아버지가 되는 아몬 왕도 똑같아서 우상을 섬기고 온갖 악을 저지르다가 신하들의 반역으로 암살을 당합니다. 그렇게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겨우 8살이었습니다.
이 당시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이 시절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고요, 온 땅에 선왕들이 저지른 악행과 불의가 가득한 시절이었습니다. 심지어 북왕국도 멸망한 뒤라서 애굽과 앗수르-바벨론이라는 커다란 고래들의 싸움에 유다의 등이 막 터져나가니 마니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요시야는 아직 사리 분별을 다 하지 못하는 꼬마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기를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면, 문자 그대로 ‘절망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다 못해 하나님을 아예 버린 시대였고요, 주변에는 너무나 강력한 제국들이 호시탐탐 유다땅을 노려 날마다 근심을 하게 만드는 시대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렇게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당신들은 망해도 싸!! 하나님이 당신들 버릴걸? 벌을 받아도 아주 크게 받아야해!! 죽어도 할 말 없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일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힘을 내라!”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스바냐 선지자도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심판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합니다.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린 이들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유다 백성들, 그 악한 이들의 이야기가 심판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구원이요, 회복이요, 기쁨이요, 희망이라 말씀하십니다.
평화와 희망을 누릴 자격이 없는 유다 백성들, 더 나아가 당장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포한다는 것- 이 사실 자체야말로 오늘 말씀이 가진 놀라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이야기 - 우리도 이스라엘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각 사람, 그리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공동체들도 유다백성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봅시다. 내 안에 얼마나 내가 많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면서 그 응답을 내 마음대로 정해놓습니다.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내 삶의 이유라고 말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없어 힘들어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기보다는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 아닙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만큼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공동체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정말 전방위 로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골라서 하는 것 같습니다. 재산을 물려주니 마니, 누가 가졌니 마니 해서 싸우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교인들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아요. 그런 일들에 바른 소리하려고 하면, 사탄 마귀라고 매도나 합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한국 사회에서 겨우 7%, 10%도 안 되는 신뢰를 받는 것이 지금 교회의 현실입니다.
우리를 이모저모 뜯어보아도요, 우리 안에서 뭔가 잘된 구석을 발견하기가 정말,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교회에게 희망이 있는지, 회복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는 생각만 드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유다처럼, 이스라엘처럼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겁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유다에게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시고 기쁨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무슨 뜻입니까? 바로 그런 우리들을, 꿈도 희망도 없고 의로운 구석 하나도 없고 답이 없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날마다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겠다는 거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꿈과 희망이 되어주시니, 지금의 내 모습, 내 상황, 내 믿음보고 좌절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도, 우리의 교회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자, 그렇다면 오늘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대림절을 보내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 1 - 겸손해야한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합니다.’ 19-20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바냐 선지자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칭찬을 받고 명성을 얻는 것- 이 모든 것은 누구의 덕입니까? 하나님의 덕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열정이 타오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생겨날 때가 있죠.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섬김의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진짜 세상 어떤 일이 닥쳐와도 내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때가 한 번쯤은 있지 않았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매번 나쁜 공동체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주는 교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요, 우리가 그런 공동체에 동참하는 경험들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 봉원교회도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바로 그런 상황에 있을 때, 오늘 말씀은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잘 선택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덕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즉, 겸손할 수 있는 겁니다.
종교개혁자 칼뱅도 우리의 믿음을 촛불에 빗대면서 그 촛불이 지금 활활 잘 타고 있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지 않으면 언제든지 꺼질 수 있는 연약한 촛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때-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 자리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는 형제 자매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메시지 2 - 희망을 가져야 한다.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두 번째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1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무리 악하고 부패한 유다, 예루살렘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그 성읍을 사랑하시기에 기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다 - 회복할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악하고 부패했어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아도-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약속해주십니다. 먼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 회복시키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로 물들어있어도,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끝내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어떤 모습이더라도 우리를 끝까지,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품은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두려워하는 우리를 진정시키시고요, 우리를 새롭게 빚어내신다 약속하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부족하다고 해도, 연약하다고 해도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촛불이 꺼질 것 같아보여도, 그 불이 어떻게 살아날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생각과 행동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요,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삶을 살게 하실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고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형상다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희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내기를 바라십니다.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주님 주시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마무리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 말은 분명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살피지 못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처음과 끝을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걸음의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를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너무 일희일비하지 맙시다. 교회가 문제가 많아요. 정말 화가나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 많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시고 의롭게 빚어가시고 끝내 하나님의 기쁨을 고백하도록 만드심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답해줍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면서 겸손함과 희망으로 충만한 형제 자매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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