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인생의 생명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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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와 소식의 차이를 알고 계십니까? ‘충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조언하는 것이고, ‘소식’은 이미 실행된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충고는 우리에게 무언가 일을 해 내라고 촉구하고, 소식은 이미 벌어진 일을 인식하고 그에 맞게 반응할 것을 촉구합니다. 충고는 모든 것이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소식은 이미 누군가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침략군이 쳐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에 필요한 것은 군대 참모입니다. 그의 충고가 필요합니다. 참호를 어디에 파야 하는지, 어디에 보루를 쌓아야 할지, 탱크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려줄 충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막강한 군대가 이미 침략군을 요격해 무찔렀다면 그 나라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군사 참모가 아니라 사자입니다. 소식을 알리는 사자는 ‘너희가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만 도망가라! 더이상 요새를 구축할 필요가 없다! 더는 스스로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왕께서 너희를 구하셨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구원을 충고 정도로 이해하고 그렇게 전하곤 합니다. ‘당신이 노력해서 구원을 쟁취해야 합니다. 당신이 어떤 일들을 해야합니다. 당신이 기도하고, 순종하고, 의식을 바꾸어야만 구원이 옵니다’ 듣는 이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 줍니다. 복음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신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성경의 근본 메시지는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이 티끌만큼도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고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해야할 일은 나를 어떻게 단련하는 수양이 아니라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이루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말 인간이 되셨는가?”
“예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당하시고 돌아 가셨는가?”
“정말 장사 되신 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는가?”
이 사실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일, 목자들이 양을 지키다가 천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일, 묵을 곳이 없어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우신 일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재미있고 쉬워서 성탄절이 되면 자주 듣게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조금 특별하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동화나 전설, 신화처럼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옛적에”라는 말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이 되지는 않지만 배울 점이 많은 이야기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려주는 말입니다. 마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행적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성경의 이야기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감동적인 충고일 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의 소식이 아니라면,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성탄절은 기독교가 그저 좋은 충고를 하는 곳이 아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진 곳임을 보여주는 날입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공상 소설이나 신화와 전설 따위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모습에 개탄했습니다. 현대인들이 소설에 빠져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이런 비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는 여러 형태로 동화를 활용한 영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에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같은 유명한 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허구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초자연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갈망, 죽음을 피하고 싶은 갈망, 영원한 사랑을 만나려는 갈망을 채워주는 것만 같습니다. 극사실주의적인 이야기는 결코 이런 열망을 건드리거나 채워 줄 수 없습니다.
<미녀와 야수>는 우리가 자초한 야수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사랑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우리가 일종의 마법에 걸려 잠자고 있으며 고귀한 왕자님이 와서 입맞춤으로 우리를 깨워 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설렙니다. 마음 속 깊이 그것을 사실로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 속에 묻혀 살아가다가 성탄절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 이야기도 다른 전설이나 판타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성탄 이야기 속 인물은 다른 세상에서 우리 세상으로 침투해 오는데, 기적을 행할 수 있어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립니다. 대적이 나타나 그를 죽여서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모두를 구원합니다.
다른 훌륭한 소설 못지 않은 한 편의 훌륭한 소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님 이야기를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 않고, 족보로 시작해서 동화가 아닌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1년 12월 오늘날의 문화는 개인주의적인 문화입니다.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스펙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홍보하고 드러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이 기록된 당시는 가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였습니다. 지금은 ‘박진관’이라는 한 개인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자격증이 있는지가 중요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는 그의 집안과 가문이 어떠한지가 중요했습니다. 즉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주는 족보가 곧 이력서였던 것입니다.
재밌는 점은 요즘 사람들이 이력서를 위조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이력서를 위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력서를 쓸 때 자신의 경력에 불리한 부분은 은근슬적 빼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족보에서 이름을 뺐습니다. 헤롯 대왕도 자신의 업적에 해가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공식 족보에서 삭제해서 자신의 업적을 높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고대 많은 족보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자가 다섯 명이나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 족보를 보니 저희 어머니가 어디 집안 출신이고, 어떤 직장을 가졌는지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이 시대에는 당연히 족보에 여자가 기록되고 있지만, 고대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를 족보에 기록한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여자들의 출신이 어떻습니까? 대부분 이방인이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이방인을 무시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던 중 갑자기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오자 발뺌하는 모습을 바울이 책망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밥 먹는 것도 부정하게 여겼는데 이런 이방인을 예수님의 족보에 굳이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가 굳이 기록한 이 여인들이 어떤 여인들인지 알고 계십니까? 당대 족보에 여자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굳이 예수님 족보에 기록했으니 대단한 여인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들은 대단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어서 유대인이라면 성경의 가장 더럽고 추하고 부도덕한 사건들 중 몇 가지를 떠오르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잘 떠오르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바로 이 사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였던 유다를 속여 동침한 여인이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읽어보시면 유다가 다말에게 잘못한 것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상황이 어떠했든 이런 근친상간 행위는 성경 어디를 보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유다와 그의 아들 베레스만 기록해서 거짓말 하지 않고도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었지만, 굳이 당시에 기록하지도 않았던 여자인 다말의 이름을 기록해 추악한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6절에는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조상 중에 왕이 있으니 누구나 원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마태는 여기에다가도 초를 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라고 말한 것처럼 “다윗이 솔로몬을 낳고”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여기에도 여자를 등장 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자의 이름이 아니라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기록했습니다. 6절 하반절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말합니다. 사무엘하 말씀에 ‘밧세바’라는 이름이 버젓이 등장하는데 마태는 굳이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비참하고 끔찍했던 장면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사울 왕을 피해 도망할 때 다윗의 편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우리야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이 되어 생명의 은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덮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결국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 만든 뒤 밧세바와 혼인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인데 그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마태가 친절하게 기록해 둔 것입니다. 밧세바를 무시해서 그녀의 이름을 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유대 사회에는 ‘의식상 부정하다’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과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함이 전염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은 죄인인 우리에게 닿아도 부정해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께 닿으면 예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전염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 왔든지 상관 없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오점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혈통이나 지위, 재물, 행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살인을 했다고 할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도 않으시고 죄인이라고 족보에서 은근슬쩍 지우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가족 중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뉴스에 나올만큼 악한 범죄를 저질러 온 사회의 지탄을 받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우리의 형제 자매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십니까? 아마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숨길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빠져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온갖 죄악을 덕지덕지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은혜를 너무 당연히 여기지 마시고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배우게 되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많은 세대가 흘렀다는 것입니다.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지만, 약속의 시작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그녀가 낳을 아기에 대해 말하기까지는 수십년이 아니라 수천 년, 수십 세기가 흐른 뒤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직전 400년 동안은 하나님이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침묵기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잊으신 것처럼 보지만 결국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야이로가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고쳐달라고 할 때 즉각 가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 그의 딸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예수님이 시간 체크를 잘못하셔서 이런 일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지금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약속을 이루실 최적의 시간이라고 여겨지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면 우리는 불안해 합니다. 지금 이 일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시니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을 잊으신 듯 보이지만, 내 삶의 형편과 상황을 다 잊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좋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마태는 마지막 17절에서 족보의 세대 수를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부터 예수님까지 열네 대라고 기록했습니다. 열네 대가 세 번 있었으니 일곱 대가 여섯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일곱 대 묶음이 일곱 번째로 시작하는 시점에 계십니다.
성경에서는 7이라는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고 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의 개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농부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이 자양분을 회복할 수 있도록 농사를 쉬어야 했습니다. 일곱째 해는 안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25장에는 일곱 번째 일곱 해 중에서 마지막 해인 마흔 아홉번 째 해는 희년이라고 해서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고 빚을 탕감해 주는 해로 삼았습니다. 온 땅과 온 백성이 짐을 벗고 안식하는 해였습니다.
마태는 이런 안식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족보를 보면서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안식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 그 안식을 마음껏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은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 스토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성탄이 전하는 소식에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없고, 온통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로 가득한 소식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자격도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방인과 간음한 자와 살인자까지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가족으로 삼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 역시 당신의 가족 삼아 주셨음을 깨닫고 누리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 어려움 때문에 슬픔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십니까?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내가 예수님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 절망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님의 족보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었길 소망합니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힘들어 울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손 내미시며 우리에게 참 생명줄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슬픔을 거두고 참 안식 가운데 거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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