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동화되면 일어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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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가 며칠 전 봤던 뉴스 이야기입니다. 어떤 인도 사람이 자신이 숭배하는 신에게 자신을 바친다며 45년동안 오른쪽 팔을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에 대한 엄청난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오른쪽 팔이 완전히 굳어버려서 현재는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가 없답니다. 그냥 팔이 죽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죠. 그는 이 일을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그가 놓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신이 그것을 진짜 좋아할까 하는 점입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예전 개그맨의 말이 떠오릅니다.
[본론]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며 행동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등장합니다. 앞서 이스라엘 연합군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쟁에 나갔지만 두번이나 패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 숫자가 베냐민 지파보다 훨씬 많아서 질래야 질수 없는 전투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께 이 전쟁을 해야할까요? 말아야할까요?라고 묻지 않고 ‘누가 제일 먼저 싸우러 올라갈까요?’라고 주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번이나 지고 나니까 그제서야 주님께 ‘전쟁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동족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해야하는 지 말아야 하는 지 주님께 물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님께 묻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단지 승리의 부적 정도로 여긴 것이죠. 그래서 두번이나 진 것입니다. 그런데 세번째 기도에서는 이 질문을 물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스라엘 연합군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한 세번째 전쟁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결정을 자신이 다 내리고 난 후 주님께 맡겨드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에 대한 페이크, 속임수입니다. 자기가 다 결정해놓구선 주님께 잘되게 해달라는 것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 안되면 주님께 불평, 불만을 터트립니다. 기도했는데 왜 안되냐고 말입니다. 처음부터 주님께 제대로 묻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교회를 제 맘대로 시작해놓구선 우리 교회를 축복해달라고 하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교회를 세워야 하는 지 말아야 하는 지 그것부터 주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실수 우리는 너무 자주 합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일수록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의 동기가 순수한지, 그 결정과정이 옳은 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예상해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연합군의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두번이나 패배했던 이유는 교만해서 주님께 제대로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번째 그들이 승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연합군의 기습과 매복작전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앞서 두번의 전쟁처럼 이스라엘 연합군을 만나 그들을 30명쯤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전쟁에서 승리하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스라엘 연합군은 도망가는 척하며 베냐민 지파를 멀리 유인했습니다. 이 때를 노려 베냐민 군대가 성읍에서 멀어지자 이스라엘 연합군 매복부대가 기브아 성읍을 점령했고, 신호에 맞춰 주력부대도 반격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신 전쟁을 보면 기습과 매복작전을 많이 펼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전들은 언더독들이 주로 하는 전쟁기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전쟁에서 언더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습, 매복작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31절에 보면 베냐민 지파가 꾐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35절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이 패배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의 기습,매복작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때문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불량배들을 보호해주려 했습니다. 그 불량배 안에 지도자의 자녀가 있어 보호하려 했을수도 있고, 이스라엘 연합군과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고 자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모하게 자기 동족들과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단호하게 불량배들을 처리하거나 이스라엘 연합군의 요구대로 그들을 넘겨줬더라면 전쟁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죄에 대해 단호하지 않으면 이렇게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내에도 분명한 죄가 있다면 단호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도 형제 하나가 자매들을 많이 찝쩍거리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가 그냥 경고만하고 놔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더 큰 사고가 나서 결국 몇명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죠. 그런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처음부터 잘 살펴보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은 원래 레위인을 동성강간하려던 자들입니다. 그러다 레위인이 자기가 당하기 싫어 첩을 그들에게 대신 준 것이죠. 그러자 레위인이 자기 첩을 12토막내서 12지파에게 보냈고, 이것이 그들의 분노를 자극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첩이 그렇게 된 데에는 레위인의 책임도 큽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잘 조사했어야 합니다. 레위인말만 듣고 이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은 꼭 2-3명의 증인을 두어 이런 사건에 대한 판결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율법조차도 이스라엘 연합군은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연합군의 승리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레위인 일행을 환대하지 않았던 점, 종교지도자로 알려진 레위인을 동성강간하려 했던 점, 레위인의 첩을 무참히 윤간한 점 등을 볼 때 그 당시 베냐민 지파가 얼마나 종교적, 윤리적으로 타락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세기때 엄청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셨듯이 베냐민 지파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에 성읍에 큰 연기가 구름기둥처럼 치솟았다는 표현이나 40절에 온 성읍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표현들이 모두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나온 표현들입니다. 베냐민이 타락해서 완전히 소돔과 고모라 땅처럼 변해 하나님이 기브아 그곳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39절에 보면 베냐민 지파 관점에서 다시 서술되어 있습니다. 왜 같은 이야기를 한편에서는 이스라엘 연합군 입장에서 서술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베냐민 지파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을까요?
이스라엘 연합군이 승리했다며 이야기가 끝났다면 그냥 승리한 전쟁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의 입장에서 다시 서술한 것입니다. 베냐민 입장에서는 지파가 거의 전멸당한 최악의 사건입니다. 47절보십시오. 겨우 군사 육백명이 살아남아서 도망쳤습니다. 48절도 보십시오. 이스라엘 연합군은 성읍에 있던 여자들, 아이들, 가축들 할 거 없이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대 성읍들도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베냐민 지파가 얼마나 철저히 멸망하게 되었는 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부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부전쟁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앞에서는 외부전쟁을 다루지만 뒤에서는 내부전쟁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너지면 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죄와 오해 거짓과 선동으로 인해 일어난 내부전쟁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한 지파를 몰살할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싸워야 하는데 세상과 제대로 싸우지 않으니 교회 내에서 치고박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내부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니 소금이 밟혀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 내부에 문제들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내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자녀로서 제대로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매번 내 죄의 문제로 골치아픈 것입니다. 왜 나는 내 죄의 문제로 이렇게 힘이 들까? 그렇다면 세상속에서 내 모습이 어떤지 한번 돌이켜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치열하게 싸우면 내 안에는 문제는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이 승리를 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승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형제 지파인 베냐민 지파가 거의 몰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혼내주려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지나쳤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전쟁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전쟁도 아니고, 승리한 전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실패한 전쟁이며 희생자만 남은 전쟁입니다. 예를들어, 가족끼리 싸워서 이기면 이긴건가요? 진건가요? 이겨도 이긴게 아니죠.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몰살시킨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은 가나안 민족들에게 해야 하는 것이지, 같은 동족에게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들 역시 가나안 사람들처럼 잔인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써 복수하게 되어 있어 어떤 한계선을 두셨습니다. 나한테 한만큼만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그곳에는 같은 동족인 남자들, 여인들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가축도 있었습니다. 여인과 아이들, 가축까지 죽일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들 역시 가나안화되었다는 말입니다. 베냐민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고, 동성강간이 성행할 정도로 형편없이 타락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냐민 역시 가나안 민족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들처럼 진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은 패자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둘다 심판하신 것이죠. 자기 눈에 옳은대로 행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사사가 없자 자기들이 ‘사사’가 되어 모든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곳에 정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사는 하나님뿐입니다.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치고 자신들이 ‘사사’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처럼 보일지라도 너무나 큰 희생을 치뤄 실제로는 실패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공이 진짜 성공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성공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간증을 들으면 그 성공을 마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성공인지는 나중에 보면 알게 됩니다. 자기 뜻대로 해서 성공해놓고선 하나님 이름으로 치장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가나안 족속들처럼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해 타락하다보니 가나안 족속들처럼 하나님을 부적처럼 생각하고 도구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이 더 중시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톰소여의 모험을 지은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은 내가 태어난 날과 내가 태어난 이유를 깨닫는 날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태어납니다. 부모님께 한번 태어나고, 또 한번은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삶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에 동화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 한낯 부적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모두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