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 더리버처치 주일예배 (행1:21-26) '대강절3: 봉사의 일을 지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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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서론
서론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가룟 유다는 3년 동안이나 주님을 좇은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제 곳으로’ 갔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자기 집착에 얽매여 자기 감옥에서 스스로 목매 파멸한 어리석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과 성도들은 자살한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 한 명을 보선해야 했습니다. 이에 사도로 선출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베드로가 직접 밝혔습니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심으로 이 땅에서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란, 주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즉 주님의 공생애 전 기간을 일컫습니다. 그 공생애 기간 내내 제자들과 항상 함께 다닌 사람이 사도로 보선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비천한 갈릴리 사람에 지나지 않는 제자들과 함께 다닌 것이 무슨 대단한 자격이 되겠습니까?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항상 제자들과 함께 다녔다는 것은, 그 기간 내내 제자들과 함께하신 주님을 좇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좇은 사람, 바로 그것이 사도로 보선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이었습니다.그리고 사도가 행해야 할 임무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내내 주님을 좇은 사람이라면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베드로가 밝힌 자격을 갖춘 사람 중에서 제자들과 성도들이 요셉과 맛디아를 추천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제비를 뽑게 하여 맛디아가 사도로 보선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 시간에도 우리가 주목하려는 바는, 그들이 제비 뽑기 전에 성도들이 함께 기도드린 내용입니다.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여기서 우리말 ‘직무’로 번역된 헬라어 ‘토포스τόπος’는 장소를 가리키는 ‘곳’을 의미하고, ‘대신하다’로 번역된 ‘람바노λαμβάνω’는 ‘취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라는 구절을 원문에 좀더 충실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가 되어, 봉사와 사도 됨의 곳을 취할지를 보이시옵소서.본문은 사도가 된다는 것을 ‘봉사의 곳’을 취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제 곳’으로 간 것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기 집착에 사로잡혀 제 곳으로 갔다가 끝내 자기 감옥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자기 감옥에서 해방되어 봉사의 곳으로 훌훌 날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인간이 자기 집착과 욕망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제 곳이 아닌, 타인을 위한 봉사의 곳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그 속에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넘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본론
본론
ㅇ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제기 (원인과 결과)
ㅇ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제기 (원인과 결과)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든 거기에 처음부터 몸담은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한 지분과 기득권을 지니고 또 행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2천 년 전 초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는 가장 화려한 경력이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내에서 세상의 그 어떤 경력도 주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셨던 경력과 필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던 그들은 초대교회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주장하며 얼마든지 기득권을 내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제 곳으로 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가룟 유다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초대교회는 이미 2천 년 전에 인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2천 년 전 비천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소멸되기는커녕 오히려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한 것은, 그들이 모두 자기 감옥에서 벗어나 ‘봉사의 곳’으로 향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친히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뜻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는 오늘날 집사라는 의미로 알려진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파생된 단어로, 영어로는 서비스service입니다. 본래 집사란 흔히 오해하듯 특별한 직책이 아니라 봉사자를 일컫는 단순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서도 ‘디아코노스’가 집사로 번역된 세 곳(빌 1:1; 딤전 3:8, 12)을 제외하고는, ‘섬기는 자’(마 20:26) ‘하인’(요 2:5) ‘일꾼’(롬 16:1)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봉사자라는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기 위함입니다. ‘디아코노스’, 즉 봉사자란 본디 ‘식탁에서 섬기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온갖 솜씨를 다해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리고 조리가 끝난 음식을 식탁 위에 정성껏 차려 놓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음식점의 요리사나 웨이터라면, 그의 행위를 가리켜 봉사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서비스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받는 봉사료service charge는, 돈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적 관습이 낳은 미국식 단어일 뿐, 성경이 말하는 서비스는 이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이 언급하는 서비스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식탁을 차리는 행위 역시, 아무리 지성을 다한들 봉사일 수 없습니다. 봉사란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ㅇ 해결방법
ㅇ 해결방법
이런 관점에서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식탁 준비에서 참된 봉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성의를 다해 음식을 만들지만 자신이 먹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어머니라고 먹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순위는 늘 마지막입니다.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손수 음식을 만들되 자신의 입맛이 아니라 가족에게 맞춥니다. 음식 준비가 끝나도 먼저 먹지 않고 가족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 일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계속합니다. 물론 가족에게 봉사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모든 행위는 고스란히 봉사가 됩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 갈수록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지는 것은, 그와 같은 어머니의 봉사 속에서 우리가 양육되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어머니의 경우일 뿐, 세상에는 정상에서 벗어난 어머니도 수없이 많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를 지우거나 갓 태어난 자식을 버리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서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자식을 위한 수고의 대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어머니도 부지기수입니다. 더욱이 요즘은 가족보다 자신을 더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어머니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봉사의 원형을 우리 주님에게서 찾게 됩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주님의 명령을 좇아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은, 예전에 고기 잡던 갈릴리 바다를 보는 즉시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도 까맣게 망각한 채, 허망한 옛 삶으로 돌아간 것으로 그 내용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한 한심한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주님께서는 도리어 제자들을 위해 정성껏 조반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제자들은 스스로 부끄러워, 주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준비해 주신 음식에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으로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끼 양식이 아니라, 당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사랑과 생명의 결정체였습니다.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심으로써 참봉사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모습은, 당신 자신을 버리심으로 인간을 위해 영원한 사랑과 생명의 식탁을 완성해 주신 십자가의 주님을 연상케 합니다.자신들은 주님을 망각하고 배신하였음에도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생명의 식탁으로 섬김 받았던 제자들이, 요한복음 21장에 이어 전개된 사도행전 1장에서 ‘제 곳’이 아닌 ‘봉사의 곳’으로 향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당신을 버리시기까지 사랑과 생명의 식탁으로 그들을 섬겨 주신 주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ㅁ 당신을 버리시기까지 나를 섬겨주신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살아 있어야 한다
ㅁ 매일 공의와 사랑의 복음에 노출되어야 한다
ㅁ 봉사의 일을 지속해야 한다
ㅇ 나타난 결과
ㅇ 나타난 결과
결론
결론
ㅇ 핵심내용 정리
ㅇ 핵심내용 정리
ㅇ 결단할 내용
ㅇ 결단할 내용
축도문
축도문
지금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 역사가
세계 각지에서 주의 복음을 위해 삶을 태우는 선교사님들과
흑암의 땅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북한의 성도들과
사랑하는 더리버처치 성도와 가정의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찌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