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관에 앉아있다 만난 긍휼

대강절 2021 - 4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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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환영과 인사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풍성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은혜 충만하세요’하고 인사 나눕시다.
네 감사합니다. 코로나19의 위세가 더 높은 요즘입니다. 하루에 8천여 명을 넘나드는 확진자 수로 인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다시 위축이 되고, 정부도 새로운 대책을 내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교회를 향한 이런저런 걱정스러운 말들이 오가는 시간입니다. 교회도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함께 이 어려운 시기를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믿음과 섬김에 힘쓰시고 가족을 중심으로 성탄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보에는 성탄 전야에 가족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순서지를 삽입해 두었습니다. 가장들을 중심으로 성탄 전야에 가정 예배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함께 축하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시고 다음 날 성탄 예배에 함께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S2. 주제 제시

오늘 우리는 대강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아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함께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를 말씀하시며 국가의 세금 제도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조세와 관세를 납부하는 일에 성도들이 성실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걷는 세리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세금 징수는 국민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불균형한 부를 분배하는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를 부르셨을 당시에는 세관이 매우 부정하고 부당한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때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의해 피지배 민족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세관은 정복민인 로마의 부당한 권위를 상징하는 특별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세관에 앉아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은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걷는 마태를 보시고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9절 말씀을 봅시다.
마태복음 9장 9절
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러자 마태는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동종업에 있는 당시의 많은 죄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세리와만 사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수한 세리들과도 교제하면서 천국의 복음을 나누셨습니다. 본문 10절을 봅시다.
마태복음 9장 10절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S3. 문제 제기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민족을 배신하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이런 세리들을 심판하시기는 커녕 도리어 함께 식사를 하신 일은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나라를 빼앗고 국민의 세금을 강탈하는 이방 나라를 섬기는 이를 제자로 부를 수 있으며, 더구나 그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매우 분노하여 이 일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11절을 봅시다.
마태복음 9장 11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J1. 하나님의 속성, 심정, 그리고 방법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는 국가와 민족의 차별이 없는 창조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류는 한 혈통이었고, 강한 자가 지배하여 제한된 자원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먹을 충분한 식량을 주셨고, 땅은 사람이 수고하지 않아도 풍성한 곡식을 제공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저주를 받아 땀을 흘려야만 먹을 것을 내어주는 곳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제 인간은 약육강식의 자연 세계를 살아야 했고, 민족과 국가의 담을 쌓아 서로를 차별하고 약탈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무역 장벽을 내리자며 관세 철폐를 부르짖는 많은 나라들의 이면에는 자국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타국의 경제를 장악하고자 하는 악한 의도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국가별 장벽은 곳곳에 차별과 불이익으로 인한 갈등을 낳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힘겨운 삶을 사는 인생을 가장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가 만든 이러한 상처와 아픔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신 것입니다.

J2. 하나님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을 넘어 택하신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권세나 돈의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남을 지배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그 나라의 왕으로 믿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두를 불어 모읍니다.
이는 곧 인간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의자하여 영접하는 자는 누구나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혹은 로마인이기 때문에 천국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천국은 그 믿음을 가진 자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J3. 사람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사시고, 죄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으며 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애도하는 유대인들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11장 35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하나님은 우시지 않으시나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눈물로 인생의 고난에 참여하시며 고난과 고통의 삶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W1.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보면 세리는 악인이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들은 모두 병들어 긍휼함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본문 11, 12절을 봅시다.
마태복음 9장 11, 12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의사가 필요없는 건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되어 자기 민족에게 비난과 죄인 취급을 당하는 이들은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하다 이방 로마에서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와 같이 신체적 약점으로 그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던 버림받은 병든 자들이 바로 이들 세리들이었던 것입니다.

W2. 그런데 세리들과 죄인들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죄에 찌들려 고통당하고 의지할 데 없어 오직 하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들은 오히려 세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의 가난한 마음을 긍휼히 보시고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마태복음 9장 13절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W3.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가 아니라 긍휼의 마음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거창하게 종교를 세우고,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자랑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제사가 아니라 겸손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배우라고 훈계하십니다. 호세아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 것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봅시다.
호세아 6장 6절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 하나님은 자신을 높이고 제사에 만족하며 자신의 종교성을 자랑하는 사람들보다는 참된 인애를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닮은 자들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의 마음은 모르는데 교회법은 잘 알고, ‘예배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며 교만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증언과 같이 우리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T1. 마태는 예수님의 긍휼을 얻고 같은 류의 친구들에게 은혜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준비한 식사를 드시며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천국 말씀을 전하시는 큰 기회를 가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그 자리를 이용하였으나 마태는 오히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항상 비난과 비판을 받았던 마태였기에 그는 자신과 같이 죄인으로 취급당하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아픔을 알았고, 그들에게 주님의 그 긍휼의 마음을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세리와 같은 죄인들이 천국을 누리고 그 은혜를 전파하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주님을 알고 그 분을 알리는 진정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T2. 세상은 자신의 의에 차서 천국의 의를 저버리고 삽니다.

오늘날 세상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자랑하며 살기에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고치러 찾아오시는 참된 영적 의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과 자신을 비기며 율법의 조항을 자신들이 더 잘 지키고 산다며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기에 진정한 영혼의 의사 되신 예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신의 닫힌 영의 눈과 귀를 오히려 자랑하며 사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은 결코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진정한 인애와 긍휼의 마음보다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마음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T3. 그러나 성도는 가난한 마음을 가짐으로 긍휼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의 삶을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의 복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성도는 진정한 긍휼의 은혜가 내 삶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우리가 떠나야 할 죄의 삶에 내가 얼마나 열심이 있는지를 발견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무도 종교적이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안 먹어야 하는지의 규정도 정해두고 살지만, 그런 것은 결코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사실 이런 외적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지적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15, 16절을 봅시다.
마가복음 7장 15, 16절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성도로 살면서도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온갖 음란과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등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내가 오히려 이런 죄들에 굴복당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로마서 7장 23, 24절을 봅시다.
로마서 7장 23, 24절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런 가난한 마음, 곤고한 마음이 성도 안에서 샘솟아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만하고 자신을 높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보이시는 나의 곤고함을 알고 나를 고쳐주실 진정한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참된 구원의 영광을 누리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L5.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마음은 자신을 높이고 교만한 자리에 앉아있는 저 바리새인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비난하고 낮추어 보면서 자신은 한없이 존귀한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하늘 구름을 밟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으로 사는 이들을 결코 의롭다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자인 줄 알지 못하면 결코 천국의 긍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자를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세리는 오히려 자신을 깊이 내려놓고 겸손한 자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3, 14절 말씀을 봅시다.
누가복음 18장 13, 14절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 생활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긍휼을 구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가버나움에도 많은 바리새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뒤로 하시고 오히려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를 통해 죄인들에게 천국을 전해 주셨습니다. 가난한 심령을 가진 세리 마태야말로 천국의 복음에 합당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L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강절을 보내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높아짐을 내려놓을 줄 알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 주님을 붙들고 교만과 오만이 아니라 낮음과 상함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보좌를 향해 나아 가십시다. 다윗 왕의 고백과 같이 주께서는 상한 마음을 찾으시고 깨어진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34편 18절 말씀을 봅시다.
시편 34편 18절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시절에 ‘박사 마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알면 되었지 뭐 더 바라느냐’라고 하시면서 박사 가지고 다 된 듯이 설치는 것보다 항상 내게 의지하며 나를 바라고 사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니 저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을 박사 학위보다 더 소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에 우리 모두는 오시는 주님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긍휼의 은혜를 구하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관에 앉아 긍휼을 구하는 세리를 결코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 천국의 자녀로 불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진정한 긍휼의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낮은 마음을 누리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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