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라는 부적(민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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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라는 부적
본문 : 민수기 14:1-10
[도입]
과거 동유럽은 상대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기독교의 영향이 약했습니다. 그 결과 동유럽에는 수많은 미신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주로 유령과 흡혈귀, 늑대인간, 마녀, 드라큘라 등이 있습니다. 또한 세부적으로 종류 또한 상당해서 일본의 귀신 숫자만큼이나 상당하다고 합니다.
당시 이들에게는 광견병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이 미비했습니다. 아니 지식이 없었다 표현해도 무방하다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광견병 환자들을 보며 늑대인간이 아니냐, 또 뱀파이어가 아니냐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많던 당시에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극도로 흥분하여 닥치는대로 도륙하고 시체를 훼손했으며 또 식인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뱀파이어, 즉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현대의 흡혈귀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인 ‘드라큘라’에서 정립이 됩니다. 보통 흡혈귀는 농부나 하층민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표현해왔는데, 소설을 보면 조나단 하커가 드라큘라 백작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입술이 싱싱하게 붉다. 짙은 콧수염 밑에 송곳니 두 개가 나 있다. 손바닥에 털이 나 있다. 박쥐처럼 귀가 뾰족하다.” 동시에 그의 모습이 귀족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흡혈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약점이 몇 가지 존재합니다. 마늘과 겨자를 싫어한다는 것,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 귀금속 은에 약하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흡혈귀의 약점은 아마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보면 두려움에 떨며 십자가로 상처를 입히면 화상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흡혈귀를 만나면 그들로부터 도피하거나 승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늘 품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마치 오늘 날의 부적과도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 과거의 동유럽 문화입니다.
비록 과거 동유럽의 문화였다 말하지만,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부적처럼 사용되는 것은 오늘 날에도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2017년 1월 25일,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강원도교육청은 “초등학생들에게 편향된 종교교육과 무분별한 선교활동을 해온 2개 초등학교 3명의 교사에 대해 징계를 내렸다.”고 밝혔다. 학생들에게 선교활동을 한 교사에 대해 징계 조처한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이는 무슨 일인가보니, 춘천지역 2개의 초등학교에서 3명의 교사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화장실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이유로 화장실 갈 때 ‘예수보혈’이라고 적힌 부적을 만들어 지니고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부적을 지니지 않은 자들을 향해서는 ‘예수보혈’을 외친 후 화장실을 이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귀신을 보았다하여 화장실을 가질 못하니 자신의 경험을 전해준 것이라 말했지만, 어찌되었든 이들의 태도는 ‘예수’라는 이름을 마치 부적처럼 쓴 것이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부적’처럼 쓰는 자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예수의 이름을,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처럼 망령되어 일컫는 행위는 여전히 존재했으며, 뿐만 아니라 과거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처럼 여기던 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마치 부적처럼 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본문의 상황이 발생한 이유]
본문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선 13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17절부터 20절 상반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곳의 상황이 어떠한지 정탐하고 보고하라 말합니다. 이때 모세는 12절 하반절을 통해 이들을 향해 이렇게 외침을 보게됩니다. “담대하라” 불과 12명이라는 적은 수의 인원이 한 나라의 모든 것을 숨어 살펴보고 되돌아 와야 합니다.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 이들의 불안함을 모세는 알고 ‘담대하라’고 위로합니다. 용기를 심어 줍니다.
그리고 40일의 시간이 흘러 정탐꾼들이 복귀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합니다. 물론 보고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나뉘어졌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전에 이들이 공통된 보고를 한 것이 있는데, 27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보니 이런 보고를 공통되게 합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수많은 종족이 그 땅에 있으며, 젖과 꿀이 흘러 보기에도 먹음직하며 먹기에도 좋은 수많은 과일들이 그 땅에 존재한다 보고합니다. 이 보고를 기반으로 상상해보았을 때, 가나안이라는 땅은 심히 좋은 곳, 즉 파라다이스와 같은 공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공통된 보고를 끝으로 보고가 나뉘게 됩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처럼 보고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이 둘은 가나안에 거주하는 모든 종족을 상대로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다 보고합니다. 믿음이 대단합니다.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든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이 둘의 보고가 마치자마자 둘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다른 보고를 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왜 이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까요? 우리는 그 힌트를 3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네피림이 무엇입니까? 이는 창세기 6장 4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을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많은 학자들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천사들이 이 땅에 왔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에 정확히 밝혀진 사실은 없으니 우리는 여기서 타락한 천사가 아닌,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타락한 하나님의 자손으로부터 자식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들이 어떤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까? 용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네피림은 ‘떨어지다’의 원어로부터 나온 단어이지만, ‘용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이런 네피림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아낙 자손입니다. 즉 정탐꾼들이 보고 겁을 냈던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은 겁을 낸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
자!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봅시다.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1절을 보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결정권을 지닌 모세 앞에 한 명 빠짐없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울부짖습니다. 그것도 밤새도록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쩌면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가지고 보고했는데, 모두가 반대의 의견을 내며 울부짖으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이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통곡에 원망이 섞여 나옵니다. ‘오히려 애굽에서 죽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며 원망과 통곡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눈 앞에 넘지못할 것만 같은 산을 볼 때 마음이 참담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일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문제 앞에 두려움이 없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 앞에 우리는 많이 무너져 내립니다. 또 두려워 일찌감치 포기하기도 합니다. 문제의 종류는 참으로 많습니다. 가정간의 문제, 형제 자매 간의 문제, 직장 내의 문제, 사회 내에서의 문제, 친구와의 문제, 일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이 세상에는 문제가 참으로 차고 넘칩니다. 내가 겨우 문제를 넘어 조금이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면, 내 옆의 사람들이 문제를 넘고 있고, 또 그들이 채 문제를 다 넘기도 전에 내게 새로운 문제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정말이지, 문제 투성이 입니다.
이런 곳에서 크리스천은 기독교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행동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8절과 9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이들은 울분과 통곡, 원망과 분노로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엎드려 옷을 찢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아라.’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사비나 :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이는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14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던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와 그의 아내 사비나 웜브란트의 사랑과 용서를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예화에는 약간의 스포가 담겨 있으니, 스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 말은 못하겠고, 아주 잠깐이니 듣고 꼭 영화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전반부에는 유대인이었던 두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 마르크스주의 책을 가까이 하던 남편인 웜브란트는 결핵에 걸려 병원 생활을 하던 중 성경을 접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는데, 자신이 가까이 하던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에는 역사적으로 갈등이 있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렇게 그는 자연스래 기독교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갑니다.
후반부에는 루마니아를 점령하며 유대인 사냥을 나섰던 독일군들이 소련군에 의해 퇴각 당하는 상황을 그려냅니다. 그러던 중 독일군이 도망 중에 유대인이었던 웜브란트 목사 가정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제 핵심은 이 장면에서 나오는데,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통해 보시고,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힘쓰던 독일군을 맞이하게 된 웜브란트 목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제가 용서받은 것처럼, 당신도 용서를 구하면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거에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사비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을 향해, 우리가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 메세지를 전달해 줍니다.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오자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외쳤습니다. 여호와를 끝까지 믿고 의지하며 또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됨을 알게 합니다. 또 웜브란트 목사 가정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잊지 아니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처럼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봅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냈습니까? 고통과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과 불만, 원통과 통곡이 가득한 삶을 살아내지는 않으셨습니까? 400년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을 얻어 기쁨을 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광야에서 자그마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불평합니다. 불만을 가집니다. 배고프다고 쫑알쫑알, 덥다고 쫑알쫑알, 춥다고 쫑알쫑알, 목마르다고 쫑알쫑알.
코로나 시대 속 모든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 또한 자영업자시기에 거리두기 개편안이 나올 때마다 마음을 졸이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아도 코로나로 제한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해외도 갈 수 없고, 사람이 좀 많이 몰린다 싶은 곳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재택이란 이유로 때로는 더 많은 일들을 받기도 하고, 불합리적인 일들을 부여받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는 날마다 쌓여가고 마음은 답답해져만 가는데, 이를 해소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시기 속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필요할 때만 예수를 부적처럼 꺼내 쓰는 신앙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필요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다, 모든 일이 끝나면 언제그랬냐듯이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탈을 쓰고 예수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런 삶을 살아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는 것이 크리스천의 탈을 쓴 자가 아닌, 진짜 크리스천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를 거역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내며 진실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믿는 것.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 고 옥한흠 목사님은 살아 생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옳은 길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있어 예수는 부적입니까? 믿음입니까? 바라옵기로는 부적 예수가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의 예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청년 여러분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 예수를 부적처럼 여긴 지난 날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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